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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어딘가, 학대 받는 아이]
③생존기: 벗어난 그 후에도<끝>
트라우마 치유, 피해 기간 2배 필요
현실 지원은 너무 짧고 부족한 실정
그래픽= 신동준 기자


오선영(50대·가명)씨는 지난해부터 여섯 살 하윤이(가명)이를 1년째 위탁보호 하고 있다. 하윤이는 선영씨 부부를 큰엄마 큰아빠라고 부른다.

하윤이는 세 번의 아동학대 신고 끝에, 부모와 분리 조치됐다. 몸에 든 멍을 이상하게 여긴 어린이집 교사가 두 번 신고했지만 별다른 조치 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마지막에는 아빠가 던진 가위에 찍혀 다섯 살 작디 작은 머리가 크게 찢기는 상처를 입고서야 분리 조치됐다.

아이는 종종 "큰엄마, 밖에 도깨비가 있어요. 괴물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선영씨가 심리치료 과정에서 들은 설명은, '학대 부모가 찾아올까 걱정하는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구조 이후 피해 아동은 어떤 과정을 겪게 되는 걸까. 아동학대 트라우마와 치유과정에 대해 학대 아동, 학대 아동을 보호하고 있는 위탁부모, 사례 관리를 담당한 아동보호기관 직원, 치료를 담당한 심리상담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2023년 부모의 학대로 온 몸에 멍든 채 숨진 초등학생(12)이 살던 인천의 한 아파트 현관 앞. 연합뉴스


눈에 초점 사라지는 해리반응, 꼭 안아줬다



선영씨의 마음을 가장 철렁 내려앉게 했던 순간은 아이가 손에 든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물을 흘리는 등 사소한 실수를 했을 때 갑자기 주변 소리가 안 들리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이면서,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을 때다. 심리학에선 도망칠 수도 반항할 수도 없었던 아이들이 의식적으로 감정과 감각을 차단하는 일종의 '해리반응'으로 본다.

작은 몸집의 하윤이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갑자기 얼굴을 손톱으로 긁거나 자신의 팔을 꼬집고 주변에 머리를 부딪치는 등 자해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안전한 것 같은 사람에게 일부러 문제 행동을 보이며, 자신이 정말 사랑받는 존재인지, 버림받지 않을지를 계속 확인하려 하는 안정 애착이 담긴
'관계 실험'
이다. 아이들은 양육자의 반응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만, 학대 환경에서는 자란 아이는 공포와 억압으로 감정이 '억눌러지거나 터뜨려야만 살아남는 것'으로 학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선영씨는 그럴 때면 아이를 꼭 안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낮은 목소리로 "하윤아 엄마 봐 엄마 봐. 여기는 안전해, 안전해. 어떤 누구도 너를 때리거나 괴롭히지 못해.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 절대로 너를 때리거나 하는 사람 없어"하고 달랜다.

선영씨는 "'전에 물을 흘리거나 했을 때에도 엄마 아빠가 때렸느냐'고 물어보니 그랬다고 했다"며 "
아이의 행동이 떼를 쓴다고 보이기보다는, 마치 '나 구출해 주세요' '나 이렇게 힘들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이
보인다"며 마음 아파했다.

보통 학대 환경에서 구출된 아이의 사연을 '해피 엔딩'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이처럼 학대 피해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2020년 5월 경남 창녕군에서 가정 학대를 당하던 9세 아동이 목숨을 걸고 4층 높이 테라스로 탈출했다. 이 여자 어린이는 평소 화장실에서 목에 쇠사슬이 걸린 채 생활했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안겼다. 이 아이는 과거에 보호된 적 있었던 위탁가정인 ‘큰아빠 큰엄마의 집’으로 돌아가게 됐고, 여론은 안심했다.

하지만 한국일보 취재에 따르면, 올해 열네 살이 된 이 아동은 최근 큰엄마 큰아빠의 집을 떠났다. 경남가정위탁지원센터 관계자는 해당 아동이 위탁부모를 떠나게 된 경위에 대해선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서도, "트라우마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많다"면서 "(창녕 사건 아동 위탁가정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보내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성인 돼서도 이어지는 후유증



어린 시절 학대 후유증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 대표적인 후유증은 △낮은 자존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폭력성을 보임 △대인관계 어려움이다.

이재영 충북중부아동보호기관 사회복지사는 "
피해 아동들은 자신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면서 "오히려
자신이 당한 피해보다 학대한 엄마 아빠가 힘든 일을 겪게 됐다는 사실을 걱정하기도
하고, 학습 부진은 물론 자기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른 상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다"고 말했다.

학교 생활에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또래를 때리는 등의 폭력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재영 사회복지사는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하고 화가 나면 '나 이거 안 하고 싶어'라고 말하면 되는 일을 물건을 다 던진다든지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쓴다든지의 행동이 학대 후유증으로 많이 나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2020년 발생한 ‘정인이 사건(16개월 입양아 학대사망 사건)’ 학대 양부모의 공판이 열린 현장에서 시민들이 엄벌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런 후유증은 성인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임헌아 세종심리검사연구소장은 "학대 피해 아동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혹은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내가 저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관계를 형성해도 되는지 계속 실험한다'
"면서 "위탁부모뿐 아니라, 학교에서 선생님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계속 '트라이'를 한다든가 흔히 말하는 '쟤 나 시험에 들게 하네' 하는 행동을 계속 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대인관계는 주고받는 건데, 상대방이 나를 의심하고 나를 불편하게 해 멀어지면 또 '그럴 줄 알았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라고 또 확신을 하게 되는 악순환이 관계 형성을 어렵게 한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발전하고 달라진다



다만 손길이 닿으면 아이들은
저마다 속도는 다르지만 분명히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아빠의 학대에서 구조된 후 아동보호기관을 통해 심리치료를 받고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는 열네 살 지후(가명)는 한국일보에 다음과 같은 카톡을 보내왔다. "전에는 늘 마음이 힘들고 몸에 기운이 없었어요. 그런데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저를 응원한다'는 말을 처음 듣고 조금씩 힘이 나기 시작했어요.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친구들이 있다면, 꼭 도움을 청하고 마음의 병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동학대 생존자에 대한 심리치료는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과정과 사회기술 훈련이 핵심이다. 임 소장은 "가정 내 학대의 경우에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에게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애가 태어났다'고 인식을 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기 존재에 대한 신뢰가 없는것
"이라면서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넌
충분히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주고 기다려주고 믿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치유방법
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드게임이나, 낮은 단계의 학업성취 목표를 설정해 달성하게 하는 등 성공 경험들을 반복적으로 겪게 해주는 것도 치료 방법 중 하나다. 숏츠나 밈 등 또래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 소재로 대화를 이끌면서, '감정 카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올바르게 표현하는 방법도 배운다.

임 소장은 "학대 아동은 부모와의 상호작용에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이나 사회적인 규범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설명했다.

게티이미지뱅크


트라우마 치유, 자원도 시간도 부족



문제는 학대 피해 아동에 대한 지원이 긴급지원 등 구조 직후에만 집중되어 있고, 이마저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트라우마 치유에는 피해를 당한 기간의 2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평균 사례 관리 기간은 평균 1, 2년에 불과
하다.

아동학대 피해자의 어머니이자, 가정폭력 피해자이기도 한 지후 어머니 서하나(40대·가명)씨는 "아동보호전문기관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며 처음으로 장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곧
사례 관리 기간이 끝나 너무 아쉽고 앞으로가 걱정된다
"고 말했다.

학대 아동들이 지원받을수 있는 병원·심리 치료비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복지부는 '학대 예방 및 피해아동 보호 예산(2025년 기준 491억 원)'을 편성하고 있지만, 학대 피해 아동에 대한 치료비 항목은 별도로 편성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대부분이 아동보호전문기관 운영비로 지출(2023년 결산보고서 기준 413억 원)된다.

지방자치단체 예산도 그나마 서울시가 학대 피해 아동에게 연간 최대 100만 원을 제공하고 있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다보니
보통 심리치료의 경우 평균 10회기 수준에서 마무리
된다. 범죄 피해자들은
범죄피해자지원제도
를 통해 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지만, 학
대 피해 아동들은 가해자가 부모였던 경우에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
된다.

임진 부천아동보호전문기관 심리지원팀장은 "치료 지원이 긴급 또는 단기 개입에만 치중돼 있다보니 치료 연속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면서 "거점심리치료지원센터가 생기기는 했지만 센터가 많지 않다보니 지방 도서 지역 아동은 불리하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피해 아동이 기초생활수급 의료급여 혜택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인식도 있는데, 아동학대 가정은 생각보다 경제적 여건이 어렵지 않은 '일반 가정'이 많다. 사각지대인 셈"이라면서 "
아동의 회복권보다 보호자 교육 중심인 점도 안타까운 지점
"이라고 덧붙였다.

2022년 4월 2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 등이 생후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양모에게 징역 35년형이 확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아동학대 관련 종사자들의 공통된 바람은 "보다 많은 아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서울가정위탁지원센터 관계자는 "처음 아동보호기관에서 일할 때,
많은 아이들이 자신을 때리는 집으로 돌아 간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면서 "그런데 그 아이들이 그럴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평생 따뜻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없었던 것
"이라고 했다.

이재영 사회복지사는 "우리가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이에게 '네가 당한 학대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너를 도와줄 수 있는 곳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꼭 응원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민법이 개정돼 부모라도 아동을 체벌할 권리는 없으며, 아동에게 신체적·정서적·성적 학대 등을 하면 최대 10년 이하 징역 등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아동학대가 의심되면 112에 신고하고, 아동 양육·지원 등에 어려움이 있으면 129(보건복지상담센터)와 상담하십시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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