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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대회의실에서 휘클리 심화반 행사가 열렸다. 강연 주제는 섭식장애였다. 김선식 기자


김선식 | 뉴콘텐츠부장

마흔 넘은 후배가 에이디에이치디(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검사를 받았다길래, 그럴 수 있는 퇴사자의 여유가 부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돌볼 수 있는 여유가 부러웠던 것 같다. 그도 현직에 있었다면 바빠서 정신없을 뿐이라며 그냥 두었을 텐데…. 난 요즘 난독증을 의심한다. 원래 느렸는데 요즘은 읽는 게 더 느려졌다. 진단명을 마주하고 처방전을 받아 들 용기가 없어 병원에 가지 않을 뿐이다. 쓰는 직업에 읽는 장애는 치명적이니까.

지지난주 토요일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독자 10명이 모여 섭식장애에 관해 얘기했다. 한겨레가 지난 3월6일 발행한 주간 뉴스레터 휘클리 ‘난 키빼몸 99, 넌?’ 독자 반응이 뜨거웠는데, 후속 강연인 ‘휘클리 심화반’을 연 것이다. 섭식장애는 먹는 행동에 어려움이 있는 정신질환이다. 섭식장애로는 체중 증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극단적으로 음식을 거부하는 신경성 거식증(식욕부진증), 짧은 시간에 넘치도록 먹고 토하는 신경성 폭식증이 흔히 알려져 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10살 미만 아이에게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회피적·제한적 음식 섭취 장애(외모 강박과는 상관없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상태)와 건강 음식 집착증까지 스펙트럼은 넓다.

참가 신청 열기는 뜨겁지 않았다. 대학 기말고사가 끝난 토요일 오후, 참가비 2만원을 내고, 서울 공덕동 언덕길에 올라, 신문사 3층까지 또 올라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아니나 다를까 여러 악조건을 뚫고 온 참가자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덥고 습한 날 강연에 흠뻑 빠져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잘 뜨지 않았다. 이날 연사는 20년 넘게 섭식장애를 온몸으로 겪고 ‘삼키기 연습’을 쓴 박지니 작가다. 그는 지난 3년간 홀로 국내에서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강연 예정 시간보다 30분 초과했는데 그는 강연을 쉽게 끝내지 못했다. 사회자 권지담 기자도 ‘작가님 시간 다 됐습니다’라는 쪽지 건네는 시간을 자꾸 늦추며 강연을 즐겼다.

‘왜 나의 일상은 이 모양일까?’ 걱정하는 사람에게 진단명은 그 자체로 힘이 될 수 있다. 기후 위기를 고발하며 등교 거부 시위를 했던 그레타 툰베리도 10대 초반 섭식장애를 겪었다. 그의 엄마 말레나 에른만은 딸의 진단명을 확인하고 이렇게 썼다. ‘왜 자신의 일상은 다른 사람들의 일상처럼 순조롭지 않은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이 가진 어떤 장애를 특정 용어로 표현해줄 수단이 필요한 사람도 더 많아지고 있다. 그 수단은 바로 진단명 혹은 병명이다. 그런 점에서 병명은 유익하다. 삶을 구하기 때문이다.’(책 ‘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

꼭 그렇지만은 않다. 회피적·제한적 음식 섭취 장애를 11년째 못 고치고 있다는 15살 청소년은 온라인으로 휘클리 심화반 강연을 듣다가 질문했다. “극복 방법이 궁금하네요. 4살부터 증상이 시작돼서 대학병원, 여러 센터, 로컬 병원 등등 이곳저곳 다 가보았지만 교수님, 의사 선생님 등등 다 포기하셨어요.” 진단명은 알지만 치료는 난망한 상황. 열정 넘치는 박지니 작가도 희망찬 대답을 해주진 못했다. 국내에서 섭식장애를 전문적으로 치료받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전문 입원치료 시설은 한곳도 없다.

“섭식장애도 두렵지만, 치료해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더 두려워요.” 강연이 끝난 뒤 상담 시간에 한 참가자가 뒤늦게 고민을 털어놨다. 섭식장애를 겪고 있는 지금도 문제지만, 섭식장애를 겪기 전처럼 살찌는 게 더 공포스럽단 얘기였다. 국내에선 치료받기도 어려운데 이들은 치료 이후의 삶까지 미리 두려워할 만큼 고통이 깊다.

고통을 연구하는 자,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자, 그리고 기자가 모인 자리였다. 기자들은 울컥하다가 진지해졌다가 그 자리의 효용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잘 몰랐던 고민을 듣고 그 마음을 헤아리다가 결국은 우리 스스로를 진단한 것이다. ‘우린 얼마나 예민한가, 얼마나 열려 있나, 그리고 얼마나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나.’ 이런 자기 진단이야말로 그날 그 자리의 쓸모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아직 우린 진단명을 찾지 못했다. 스스로 돌아보고 돌보는 시간이 필요한데, 앞만 보며 달려가고 있으므로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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