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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근대산업시설(군함도 등) 문제를 놓고 국제 무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표 대결을 벌였으나, 한국이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해 군함도 문제를 정식 의제로 채택하지 못했다. 일본이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약속과 달리 강제징용 등 역사를 충분히 알리지 않는 가운데 이를 제대로 논의하기 위한 기회를 얻지 못한 데다 과거사 갈등이 다시 불붙을 여지도 남긴 셈이다.
2022년 7월 1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일명 '군함도') 인근 해상의 유람선에서 보이는 군함도. 연합뉴스

7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열린 47차 세계유산위 회의에서 군함도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자는 한국의 요구를 일본이 끝까지 수용하지 않으면서 결국 표결이 이뤄졌다. 정부는 일본이 2015년 7월 세계유산 등재 이후 조선인 강제 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full history)를 알리겠다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지 않고 있다는 점을 정식 의제화를 통해 부각하려 했다.

하지만 표결 결과 '군함도 문제를 정식 의제에서 빼고 가자'는 일본의 수정안에 대해 과반에 해당하는 7개 위원국이 찬성했다. 반대표는 3개국, 기권은 8개국, 무효표는 3개국이었다. 이날 표결에는 한·일을 포함한 위원국 21개국이 참여했고, 비밀 투표로 진행됐다.

당초 군함도 문제는 사전에 잠정 의제로만 포함됐다. 이에 한국은 군함도 관련 ‘해석 전략 이행에 대한 검토’를 올해 회의에서도 정식 의제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식 의제로 채택되려면 21개 위원국의 컨센서스(표결 없는 만장일치)가 필요했지만, 일본이 반대하고 나서며 사실상 상황을 표결로 몰아갔다.

이날 회의에서 하위영 외교부 유네스코협력 TF 팀장은 “세계유산위가 요구한 ‘전체 역사를 보여주라’는 결정을 일본이 따르지 않고 있다”며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 자료는 많은 조선인 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노역한 역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한 사소한 누락(minor omission)이 아니다”라면서다.

이에 일본 측 대표는 “일본은 후속 조치를 성실히 이행(faithfully implementing)하고 있다”며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취지로 반박했다. 2023년 유네스코 결정이 군함도 문제를 자동으로 정식 의제로 다루도록 하는 ‘보존 상태 보고서’(SOC)가 아니라, 단순한 ‘후속조치 현황 보고서’(업데이트 보고서)만 제출하도록 요구한 점을 강조하면서다. 일본은 또 “세계유산위 밖에서 한·일 양자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7일 오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47차 회의. 유네스코 홈페이지 생중계 캡처

특히 한국에 제안한 수정안에 일본이 다시 수정안을 내는 등 양 측은 끝까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의제 설정을 놓고 유네스코에서 표결까지 가는 건 사상 처음이라 그리스 등 다른 나라 대표단이 정회를 요구하며 끝까지 컨센서스를 촉구하기도 했다. 결국 일본이 낸 더 최근의 수정안이 표결에 부쳐졌고,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일본의 행위가 정당하다기보다는 유네스코의 특성상 문제를 한·일 양국 간 대화와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일본 측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군함도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 10년이 지나도록 일본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군함도가 있는 나가사키가 아닌 도쿄에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설치하고, 노역의 강제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등 관련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세계유산위가 앞서 2018·2021·2023년 세 차례에 걸쳐 결정문을 채택하고, "강한 유감"(2021년 결정)까지 표명하며 약속 이행을 촉구한 이유다.

표 대결에서 패배하며 군함도의 실상과 일본의 약속 불이행 등을 조명할 국제적 기회를 잃은 건 뼈아프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특히 전례 없는 표결 강행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히려 한국이 무리수를 둔 것처럼 보일 우려마저 있다. 정부 내에서도 당초 확실한 승산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표결을 수용하자는 기류가 지배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재명 정부 들어 첫 '외교 한·일전'에서 우군 확보를 위한 치밀한 사전 작업 등 정부의 외교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특히 이 대통령이 한·일 관계 개선에 의지를 보이는 중에도 표결까지 간 것이라 여파가 주목된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표 대결로 윽박지르는 듯 한 일본의 태도에 여론이 부정적으로 반응할 우려도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7일(현지시간) 캐나다 앨버타주 캐내내스키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장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지난달 17일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와 첫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문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차이를 넘어서서 한국과 일본이 여러 면에서 서로 협력하고, 서로에게 도움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한다"도 말했다. 양국 간 미래지향적 협력이 과거사 문제로 가로막히지 않도록 관리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군함도 등 문제가 매년 ‘캘린더성 악재’처럼 되풀이되는 데다 표 대결에서도 패배하면서 양국 관계에서 과거사 문제가 다시 돌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본의 약속 불이행으로 유네스코는 매번 과거사 갈등이 다시 폭발하는 무대가 됐다.

일본이 세계유산을 등재한 뒤 약속을 깨는 사례가 갈수록 쌓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은 지난해 7월 또다른 강제징용 현장인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 한국의 찬성 표를 얻었지만, 이후 마련한 전시 시설에서 강제성을 인정하는 표현을 빼거나 추도사 없는 '맹탕' 추도식을 여는 등 약속 파기를 반복하고 있다. 올해도 추도식을 둘러싼 양국 간 갈등이 예상된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표결 직후 "사전 협의 과정에선 많은 위원국들이 (군함도) 이행 상황을 위원회 차원에서 점검해야 한다는 한국의 원칙에 공감을 표했다"면서도 "결과적으로 의제 채택에 필요한 표가 확보되지 못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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