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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너 DC형이야, DB형이야?”

대다수 직장인은 내가 가입한 퇴직연금 유형조차 모른다. 2030세대는 퇴직연금에 큰 관심이 없고 4050대가 되어야 비로소 은퇴 후 계산기를 두드리는 게 현실이다. 국민연금 월 수령액은 꿰고 있지만 퇴직연금은 여전히 ‘깜깜이’다. 그사이 우리는 노후 자산의 3분의 1을 방치해 왔다.

퇴직연금 수익률은 최근 5년 평균 2.8%. 코스피 상승률은커녕 저축은행 이자보다도 낮다. 2005년 제도 도입 이후 20년, 퇴직연금 운용 구조는 여전히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다. 수익률 개선을 위해 도입된 디폴트옵션 제도는 복잡한 절차와 낮은 실행률로 실효성이 떨어졌고 직접 운용하려 해도 높은 진입장벽에 가로막힌다. 결국 ‘수익률은 전문가만 낼 수 있는 제도’로 고착된 상태다.

10년째 표류 중인 ‘기금형 제도’ 도입 논의가 올 하반기부터 다시 본격화된다. 지난 1월 고용노동부가 밝힌 이 계획은 퇴직연금을 국민연금처럼 집합 기금 형태로 통합 운용해 수익률과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기금형’이 수익률 개선의 정답일까. 전문가들은 운용 구조를 바꾸기만 할 뿐 실질 수익률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본전치기 개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년 만에 찾아온 개혁의 골든타임, 핵심은 다시 수익률이다.
예금보다 못한 수익률 통계청이 작년 12월 발표한 ‘2024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은퇴 후 가구주들의 월 최소 생활비는 2인 기준 240만원, 적정 생활비는 월 336만원으로 집계됐다. 5년 전보다 각각 40만원, 45만원가량 늘었다. 은퇴 후 감당해야 하는 생활비 부담이 매년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준비되지 않은 노후다. 지난해 가구주가 은퇴한 가구의 절반 이상인 57.0%가 “생활비가 부족하거나 매우 부족하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3층 연금(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구조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실제 은퇴자들이 기대는 건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이다. 국민연금 외에 의존할 수 있는 개인저축이나 개인연금은 고작 5.4%에 불과했다.

은퇴 가구 생활비의 약 60%는 국민연금과 각종 복지혜택에서 충당됐다. 국민연금은 ‘최소한의 생계’를 채워줄 뿐 이마저도 은퇴 직후부터 수령 시작까지의 ‘소득 공백기’는 고려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직장인은 평균 55세에 퇴직하지만 국민연금은 65세부터 받는다. 약 10년간의 공백이 발생하는데 이 시기 퇴직연금은 공백을 메워줄 거의 유일한 징검다리다.

그러나 지금의 퇴직연금은 그 역할을 감당하기엔 한참 부족하다. 많은 이들은 퇴직연금이 ‘어디에 얼마쯤 쌓여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려운 용어와 복잡한 제도, ‘DB형인지 DC형인지’ 모르는 개인의 무관심은 퇴직연금을 방치하게 만들었고 그 대가는 낮은 수익률로 돌아왔다.

지난해 퇴직연금 연간 수익률은 4.77%. 최근 1~2년은 시장 반등에 힘입어 성과가 좋았지만 퇴직연금은 장기 운용을 전제로 한 자산이라는 점에서 평균수익률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2024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의 전체 10년 평균수익률은 2.31%, 5년 평균수익률은 2.86%다. 같은 기간 정기예금 금리가 3%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예금보다도 못한 운용 성과다.

이렇게 방치된 돈이 개개인으로만 수천만원, 많게는 수억원이 훌쩍 넘는다. 시중은행의 한 퇴직연금 담당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퇴직연금 1억원보다 주식 잔고 1000만원에 더 많은 신경을 씁니다. 주식 수익률을 위해 365일을 투자하면서 퇴직연금에는 단 하루도 관심을 두지 않아요. 1억원짜리 퇴직연금을 조금만 더 잘 굴려도 상당한 누적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데요.”
무늬만 디폴트옵션 2%대의 저조한 수익률. 원인은 시스템에 있다. 지나치게 높은 원리금보장 상품 비중과 자산배분의 부재다.

2024년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가운데 무려 83%가 원리금보장 상품에 묶여 있다. 특히 DB형(확정급여형)의 경우 이 비율은 93%에 달한다. 퇴직연금 제도가 시행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자산 운용은 예금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이라고 상황이 나은 것도 아니다. 최근 5년간 실적배당형 수익률은 연 4.77%, 10년 평균은 3.44%로 집계됐다. 시장 수익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자산배분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식·채권·현금 등의 비중 조절 없이 단기 테마나 특정 자산에 쏠리는 구조에서는 리스크가 닥칠 때 방어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현행 퇴직연금은 가입자가 스스로 운용 방식을 선택하고, 상품을 고르고, 변경까지 해야 하는 ‘책임 운용 구조’다. 하지만 바쁜 직장인이 금융시장을 분석하고 상품을 비교해가며 리밸런싱까지 신경 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결과 많은 가입자들이 퇴직연금을 원리금보장상품에 ‘방치’하거나 관심을 갖더라도 단기 테마주·후행매매에 의존해 손실을 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부도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다. 투자가 어려운 가입자를 위해 퇴직연금사업자가 직접 구성한 포트폴리오에 적립금을 자동 운용할 수 있도록 ‘디폴트옵션 제도’를 2023년 7월 도입했다. 이는 개인이 운용 책임을 지는 DC형(확정기여형)과 IRP(개인형 퇴직연금)에 적용된다.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전에 설정한 투자 방식에 따라 자금을 자동으로 굴리는 구조다. 또 가입자가 다른 퇴직연금사업자에게 상품을 그대로 옮길 수 있도록 돕는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도 2024년부터 시행했다. 더 나은 운용사나 수수료 조건을 찾는 가입자들에게 실질적인 선택지를 넓혀주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제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크다. 우선 한국의 디폴트옵션 제도는 이름만 ‘자동’일 뿐 실제로는 가입자(노동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해야만 실행되는 구조다. 퇴직연금제도가 잘 발달한 미국, 호주 등 선진국의 경우 사용자(회사)가 설정한 투자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디폴트옵션을 제시한다.

선택지도 다르다. 디폴트옵션에 실적배당형 상품만을 포함시킨 선진국과 달리 한국식 제도는 원리금보장형 상품까지 포함돼 있다. OECD 국가 중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형을 포함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결국 직접 포트폴리오를 선택해야 하는 가입자는 원금 손실이 날 수 있다는 불안에 원리금보장형을 택할 확률이 높다. 실제 2024년 말 기준 디폴트옵션 가입자의 85%가 연 3%대 초저위험 상품에 머물고 있다. 사실상 정기예금 수준의 수익률이다. 저위험 상품은 연 7.2%, 중위험은 11.8%, 고위험은 16.8%의 수익률을 기록했지만 이 상품을 선택한 가입자는 전체의 15%에 불과했다.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디폴트옵션은 복잡한 선택 구조와 잘못된 상품 설계로 인해 본래 취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다. 이름만 디폴트일 뿐 실상은 ‘반쪽짜리 제도’에 그친 셈이다.
골든타임은 지금퇴직연금 제도를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는 논의는 10년 넘게 이어졌지만 정권교체와 탄핵 등 정치적 격변 속에서 번번이 동력을 잃었다. 그사이 퇴직연금 적립금은 400조원을 돌파하며 ‘덩치 큰 국민 자산’으로 성장했다.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며 더는 시간을 미룰 수 없다는 현실도 제도 개편을 재촉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노인빈곤율 38.2%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인 13.9%에 비해 3배가량 높다. 65세 이상 월평균 연금 소득은 약 80만원 수준으로 1인 가구 최저 생계비(134만원)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구조적 개혁이 불가피한 가운데 상황을 바꿀 결정적 카드도 등장했다. 주무부처는 물론 정치권과 새 정부 내에서도 퇴직연금의 개편안이 나오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제도 개편의 ‘골든타임’이라는 목소리가 다시 커지는 배경이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지난 3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을 위한 전문가 자문단을 공식 출범하고 각계 의견을 수렴 중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이란 개별 가입자가 직접 운용하는 기존 구조 대신 국민연금처럼 일괄 운용하는 기금형으로 전환해 수익률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여당에서도 안도걸 의원을 중심으로 기금형 퇴직연금 관련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새 정부도 퇴직연금을 수술대에 올릴 가능성이 크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퇴직연금 수익률이 물가상승률도 못 따라간다”며 개편의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은 “모두의 존엄한 노후를 위해 세대 간 형평성과 연대를 실현하며 지속가능한 연금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제도 개편이 곧 실질 수익률의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반쪽짜리’ 디폴트옵션처럼 현재 논의 중인 기금형 제도가 ‘만능 해법’이 될 수 있느냐는 의문과 함께 새로운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동규 금융감독원 연금감독실장은 “퇴직연금의 기금화가 정답이라는 결론은 섣부르다”며 “현재 제도가 어떤 문제점으로 낮은 수익률을 보이는지에 대해 먼저 살피고 개선 방안을 도출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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