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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직장인이 금융사 상담 창구에서 퇴직연금 유형별 차이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강은구 한국경제신문 기자


1981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확정기여형(DC형) 중 하나인 401K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시장의 장기적인 성장과 더불어 백만장자 연금 퇴직자들을 많이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DC형은 매년 연간 임금총액의 12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고용주가 DC계좌에 넣어주는 반면 미국의 401K는 방식이 다르다. 근로자가 자신의 월급에서 일정 금액을 매달 저축하면 이 돈에 매칭하는 식으로 근로자의 DC계좌에 넣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회사마다 1대 1 또는 50% 매칭처럼 다를 수 있어 회사의 복리후생 혜택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됐다. 연봉만큼이나 근로자의 미래를 다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DC형처럼 미국의 401K도 퇴직연금사용자인 고용주가 퇴직연금사업자인 금융사를 정하고 직원들은 자신의 계좌를 관리한다. 비슷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아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퇴직연금제도 내에서의 퇴직연금사용자, 즉 고용주의 ‘수탁자책임(Fiduciary Duty)의 정도’가 있다.

미국에서 401K를 채택하고 있는 고용주는 아주 포괄적인 수탁자책임을 가지고 있다. 고용주는 퇴직연금사업자인 금융사를 골라야 한다. 보통 하나를 고른다. 한국에서는 여러 사업자를 골라 직원들이 선택하게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국의 DC형은 퇴직연금사업자인 금융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퇴직연금에서 투자 가능한 상품은 모두 투자할 수 있게 해준다. 어떤 금융사를 퇴직연금사업자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퇴직연금가입자들의 상품 선택의 범위가 정해진다. 하지만 미국의 고용주들은 직원이 DC에서 투자할 상품의 풀을 골라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ERISA(Employee Retirement Income Security Act)라는 법을 따라야 한다. 비용, 수익률을 고려하고 고위험, 투기성 자산은 제한하고 유동성 또한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퇴직연금개편제안에 들어있던 벤쳐투자 등의 투자가 허용되 있는 401(k) 플랜은 거의 없다.

미국에서는 회사가 금융상품 풀을 잘못 선정했다든가 하는 이유로 직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재판을 오랫동안 진행하고 하는 일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법에 따라 기업의 수탁자책임은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뿐만 아니라 이들이 퇴직연금을 잘 저축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무 역시 폭넓게 포함돼 있다. 한국의 퇴직연금법에서도 고용주의 수탁자의무는 정의돼 있다. 하지만 아주 일반적 충실의무를 규정하고 있어 한국에서는 퇴직연금 관련 소송을 보기가 힘들다.

퇴직연금법에서 고용주에게 의무로 하고 있는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도 고용주는 퇴직연금 사업자 또는 그에 준하는 전문성을 가진 기관에 넘길 수 있다. 1년에 한 번 하는 퇴직연금제도에 대한 설명을 담은 퇴직연금교육은 퇴직연금사업자에게 맡겨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메일을 한번 보내는 것으로 법에서 요구한 요건을 충분히 충족한다. 가입자의 숫자가 많은 회사는 금융사가 세미나의 형식으로 오프라인으로 교육을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직원들에게 일대일 상담을 제공하기도 한다.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좋은 교육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지만 고용주가 직원들에게 주는 교육과 같을 수는 없다. 결국은 상품판매라는 이해상충이 될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사업자들에게는 참 억울한 상황일 수 있는데 가입자들은 많은 경우 유용한 교육을 받은 후에도 상품판매에 대한 강한 기억만을 남긴다.

‘수탁자의 책임’을 기꺼이 지고 직원들에게 퇴직연금은 꾸준히 쌓고 원리보장형이 아닌 실적배당형으로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고 교육하는 대한민국의 기업은 없다. 오히려 ‘직원들에게 괜히 투자하라고 했다가 책임지라는 이야기 듣기 싫다’는 이유로 교육도 대부분 퇴직연금사업자에게 무료로 떠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DC 이야기를 했지만 원리금보장형에 DC보다 훨씬 더 많이 투자하고 있는 확정급여형(DB)도 한번 돌아볼 만하다. 실적배당형에 운용을 하도록 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기업 내 프로세스를 만들도록 하고 있지만 DB 담당자가 원리금보장형에서 벗어나 실적배당형으로 운용하는 결정을 하게 만드는 길은 너무나 멀다. DC보다도 멀다고 보인다. ‘실적배당형에 했다가 책임지기 싫다’는 것이 이유다.

DC보다 역사가 훨씬 긴 미국의 DB는 미리 정해진 규칙을 정확히 따를 때 담당자에게 잘못을 떠넘길 수 없는 면책조항이 있고 담당직원을 포함한 이에 대한 모든 이해관계자의 정확한 이해는 투자를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규칙을 지킬 때는 강력한 면책조항의 적용을 받도록 해야 한다.

임금체불을 막기 위해 만든 게 ‘퇴직연금’이다. 임금체불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퇴직연금이 연금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도록 하기 위해 저축과 투자를 막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부터 고쳐야 할 것이다. 벤처투자를 할 수 없어서 연금이 역할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기금이 있어도 DC형 가입자를 억지로 가입시킬 수는 없다.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지 않는다면 다음에 또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영주 닐슨 한국퇴직연금데이터 대표 겸 성균관대 SKK GSB 교수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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