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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영의 시선]
자본주의 욕망 끄기를 실천하는 노점상들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합니다.

한 노점상이 길바닥에 여러 종류의 채소를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근 연구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역 근처의 한 거리에서 과일을 샀다. 주로 나이 지긋하신 여성 노인들이 채소와 과일을 비롯해 이런저런 먹거리를 파시곤 하는데, 이날은 유독 제철 과일인 복숭아와 자두가 싱싱해 보였다.

대형마트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어떤 관계의 미학



그들은 함지에 담긴 과일을 손님이 원하는 만큼 바로바로 봉지에 담아서 팔고 계셨다. 몇 개를 덤으로 더 담아주시는 넉넉한 마음 씀씀이에 나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계좌 이체도 가능하지만 때마침 현금이 있어 모처럼 지폐로 계산하다 보니, 대형마트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어떤 관계의 미학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아파트 현관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니 그 안에 설치된 모니터 아래의 한 줄 뉴스에서 '지난해 한반도 이산화탄소 농도, 관측 사상 최고치 또 경신'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또 모니터의 윗부분에선 각종 광고가 초 단위로 숨가쁘게 송출되고 있었다.

그 광고들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자니 이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조차도 광고의 집요한 공격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슬픈 자각이 나를 찾아왔다. '소비 사회'를 향한 우리 사회의 무한 질주에 머리가 아뜩했다.

여성 노인들이 거리에서 판매하는 먹거리
는 대부분 근거리에서 생산되며 감자, 가지, 오이, 파, 버섯 등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할 때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먹거리의
이동 거리가 비교적 짧으니 탄소배출량도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산 오렌지와 필리핀산 바나나 등을 비롯해 계절과 무관하게 우리가 일상에서 소비하는 먹거리들은 이동 거리가 아주 멀어 탄소배출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 다양한 상품이 전 지구적으로 오고가는 '지구화된 소비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 '자본주의의 적'이 돼보는 것은 어떨까?

2023년 6월 13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앞에서 노점상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제36차 6·13 정신계승 전국노점상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노점말살 조례 제정 중단을 촉구하며 들고 온 채소와 과일을 바닥에 던지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얼마 전 읽은 정지아 작가의 '자본주의의 적'(2021)이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 건 이런 맥락에서다. 작가는 자본주의를 욕망과 연결 짓는다. 작가에게 자본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동력으로 삼아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확대 재생산 속에 괴물처럼 팽창"하며 "조금 더 편리하게 살기 위해, 단적으로 더 큰 냉장고와 더 빠른 자동차와 기능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새 휴대폰을 갖기 위해 사람들이 무한경쟁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체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적은 '자본주의의 동력 그 자체인 욕망을 부정하는 자들'로, "보다 근원적으로 욕망 그 자체가 부재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전원을 오프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는 것이다.

'욕망의 부재를 통한 자본주의의 전원 끄기'라는 작가의 혜안에 무릎을 치며, 나는 거리에서 제철 과일을 팔던 여성 노인들이야말로 탄소 중립의 조용한 실천자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탄소배출 증가와 그에 따른 기후 위기에 직면해 '욕망의 극대화'가 아닌 '욕망의 극소화나 부재'로 방향을 돌리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현재, 어쩌면 그들은 지역에서 생산한 소량의 식재료를 지역에서 직접 판매함으로써 지구화된 소비 사회에 작은 균열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탄소배출의 주범이 산업 생산에 들어가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오늘부터 생산과 소비의 메커니즘을 돌아보며 일상에서 자본주의의 적이 돼보는 것은 어떨까?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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