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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대표 변신한 배우 박정민
1년간 출판업에 전념하고 있는 배우 박정민. 지난달 서울국제도서전에서의 인기는 “시행착오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사진 우상희 작가]
“언젠가는 나도 각도 큰 변화구를 던져볼 수 있을 거다. 여러분도 적절히 변화구도 섞어가면서 살아가시길 바란다.”
2016년, 배우 박정민의 산문집 『쓸 만한 인간』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당시 셰익스피어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로 발탁된 그를 만났었다. 그해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로 뜬 신인이었는데, 왠지 ‘반짝스타’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변화구’에 대해 묻자 “상상도 못했던 로미오가 된 것도 그렇고, 앞으로 인생에서 다른 예상치 못한 일들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걸 기대하니까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고 답했었다.
9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정말 변화구를 던진 상태였다. 지난해만 해도 ‘전, 란’ ‘하얼빈’ 등 굵직한 작품에서 연기력을 과시하더니 갑자기 출판사 대표로 공격적인 영업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인 아버지를 위해 오디오북으로 먼저 낸 김금희 작가의 소설 『첫 여름, 완주』는 베스트셀러(교보문고 7월 첫 주 전체 5위)가 됐고, 5년 전 차린 출판사 ‘무제’는 지난달 서울국제도서전의 최고 화제였다. 그가 직접 책을 팔고 굿즈를 포장하는 한 칸 짜리 부스에는 긴 대기줄이 생겼다.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책을 1권도 읽지 않는 시대에 배우의 선한 영향력 아닐까. 정작 본인은 “시행착오”라고 말문을 열었다.
“3월에 부스 신청을 해서 이런 상황을 고려 못했거든요. 옆 부스에 피해인 듯해 마지막 이틀은 빠져 있었는데, 다음에 나간다면 좀 더 신중해야겠죠. 제 본업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현상일 뿐, 좀 더 어엿해지려면 제가 빠져도 볼거리가 있는 출판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좋은 책을 기획해야 하는 일만 남은 거죠.”
출판사 대표로 변신한 배우 박정민. [사진 우상희 작가]
식구가 두 명인 작은 출판사가 올해 계약한 책만 12권. 아침 7시 출근, 밤 12시 퇴근하는 전업 출판인의 삶이 5개월째다. 2019년부터 2년여 동네책방을 운영했을 정도로 책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취미일 뿐”이라던 그가 배우를 휴업하면서까지 책을 만드는 이유는 뭘까. “지난 연말 여러 작품이 주르르 공개됐는데, 이런저런 배역을 온전히 이해 못한 채 교묘하게 속이고 넘어간 장면들이 보였어요. 그런 느낌이 싫어서 잠시 제동을 걸고 책에 몰입해 보기로 했죠. 출판사를 시작할 땐 취미였지만, 어느 순간 작가들은 취미가 아닌데 내가 취미면 배임이란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직원도 5~6명 더 뽑아서 회사 안에서 책을 만들 수 있게 하려는 게 당장의 목표예요. 이 과정이 배우로서도 도움 될 것 같아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생각하며 책을 훨씬 내밀하게 읽게 됐거든요. 다음 시나리오를 받아봤을 때 인물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 있을지 저도 상상이 안 갑니다.”
산문집을 낸 지 9년, 집필 욕심이 날 법도 하다. 『쓸 만한 인간』이 그의 인지도 상승과 함께 점점 많이 팔렸지만, 웬일인지 지난달 절판시켰다. “매체 연재 때문에 마감에 쫓겨 쓴 주제 넘은 글들인데, 어렸을 때 치기 어린 생각들이 박제 돼 있는 게 부끄러워서요. 저는 이미 거기서 벗어났는데, 책이 점점 많이 팔리면서 저의 현재 생각인 것처럼 따라오기도 하고. 그걸 뒤집어엎는 뭔가를 써야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몇 년 걸릴 것 같아요.”
영화 ‘변산’의 래퍼 학수처럼 문학소년이었을 것 같지만, 스무살 무렵 우연히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기 전에는 제대로 독서를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독서율이 바닥인 요즘 사회도 그저 당연하게 여긴다. “원래 사람들은 바쁘거나 노는 게 더 좋아서 책을 안 읽잖아요. 그러니까 책 읽기 캠페인 같은 걸 하겠죠. 책을 만드는 건, 뭘 좀 재밌게 만들어보고 싶은데 제가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만드는 데) 돈이 덜 들잖아요. 영화는 혼자 만들 수 없으니까요. 책으로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더 써서, 예술적이고 고급스런 물성을 갖게 하려는 게 지향점이에요.”
출판사 대표로 변신한 배우 박정민. [사진 우상희 작가]
그를 만나러 간 날, 그의 사무실 코앞에서 한참 헤맸다. 대문에 ‘무제’라는 글자가 거의 안 보이게 써 있어서다. ‘이름이 없거나 주목 받지 못하는 존재들에 귀 기울이겠다’는 출판 철학 때문일까. “제가 원래 사회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은 아닌데, 첫 책 『살리는 일』을 낼 때 명분이 필요했어요. 어차피 대형 출판사처럼 할 순 없고, (캣맘인)박소영 작가가 살고 있는 삶과 지키고 있는 존재들이 우리와 맥이 통하겠다 싶었죠. 지금은 조선족 소설가가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소설을 써 달라고 하니 자기 동포들 인터뷰를 쓰고 싶다는데, 그게 더 우리와 어울리겠더군요.”
2주 전 나온 무제의 네 번째 책 『사나운 독립』은 80년대생 세 여성의 치열한 자아찾기에 관한 독립출판물을 발굴해 정식으로 출간한 것. 자신의 개인적 상처를 투영한 작업이기도 하다. “저도 자라면서 엄마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있는데, 한 번도 진지하게 부딪치지 못했거든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상담을 받으러 다니고, 때로 엄마 탓을 해요. 자아가 형성될 때의 감정을 직면하고 있는 이 책을 보면 난 참 용기가 없었구나 싶은데, 저 같은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이 처방전이 될 수도 있겠죠.”
출판사 대표로 변신한 배우 박정민. [사진 우상희 작가]
대표 상품 『첫 여름, 완주』는 특별한 오디오북이다. 작가에게 맞춤형 소설을 주문하고 혼자서 녹음과 편집을 일곱 달에 걸쳐 한 땀 한 땀 작업했다. 일반적인 낭독을 넘어 라디오 드라마처럼 유명 배우들이 역할을 나눠 맡고, OST에 뮤직비디오까지 냈다. 이미 네 번째 오디오북 시리즈까지 작가를 정했다니, 아버지를 위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박정민표 오디오북’이 장르가 된 셈이다. “아버지는 별말씀 없으셨어요. 재밌다 정도
베스트셀러라고 엄청난 드라마는 아니다. 주인공 ‘열매’가 선배에게 떼인 돈을 받으러 찾아간 완주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아주 조금 성숙해서 일상으로 복귀하는, 조금은 심심한 이야기다. “열매한테 본인의 삶으로 잘 돌아왔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외부적인 요인들 때문에 잠시 벗어났던 자기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결말이 너무 좋아요. 대단히 성장한 건 아니지만, 그저 평범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만큼 행복하고 희망적인 게 없잖아요. 그게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겠죠.”
변화구를 던진 올해를 잘 완주하고 배우로서의 삶으로 복귀하겠다는, 박정민의 다짐으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