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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자료사진



아저씨,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택시 운전사가 급히, 거칠게 운전석 창문을 내렸습니다. 수동식 창문 개폐 손잡이를 마구 돌리더군요. 운전석 밖으로 거의 상반신을 내놓다시피 하고는 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옆에는 최신식 미제 캐딜락 세단이 미끄러지듯 굴러가고 있었죠. 운전사는 화가 나서 그랬는지, 소리를 질러서 그랬는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지난 2011년 7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란은 말 그대로 '반미(反美)'의 나라. 털털거리는 고물 택시를 모는 운전사 아저씨가 최신형 캐딜락 운전자에게 "이란 사람이 왜 미국 차를 타고 다니냐"고 꾸짖는 분위기였습니다. 왜 큰소리를 쳤느냐고 물었습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이 택시 기사 아저씨.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꼬레아(Korea, 한국 사람이죠)?"
"네(Yes)."

"꼬레아, 굿(Korea, Good)!"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더군요.

"자빤, 굿(Japan, Good)!"
역시 엄지 척!

"쟈마니, 굿(Germany, Good)!"
한국, 일본, 독일이 다 좋은 나라라는 뜻.

그러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메리까(America, 미국은)?"

"아메리까, 베리 베리 베리 베리 굿(America, very very very very Good)!"

'헉!'

미국이 최고라는 뜻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이란 사람이 왜 미국 차를 타고 다니냐"고 꾸짖은 게 아니었습니다. "야, 너 좋은 미제 차 탄다. 부럽다, 부러워." 이런 말을 한 거였죠. 놀라웠습니다.

종교 경찰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백주 대낮에, 그것도 대로에서 큰 소리로 미국 차 타는 사람이 부럽다고 떠들다니요. 이란은 세계 최고의 '반미(反美) 국가'가 아니던가? 이 아저씨, 이러다 경을 치는 거 아닌가?



아, 이스파한‥그리고 용의주도한 이란 정부

지난 2012년은 한국과 이란이 외교 관계를 맺은 지 5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란 정부는 한국·이란 수교 50주년을 한 해 앞둔 2011년, 사전 프로그램(Pilot Program)을 기획했습니다. 몇몇 언론사의 한국 기자들을 이란으로 공식 초청했습니다. 한국 기자들이 어떤 기사를 쓰는지, 정권에 해가 되진 않을지 사전 점검을 해 보려는 의도 같았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답게 노련하고 용의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 닷새 동안 이란 문화부가 지정한 안내인과 함께 이란 이곳저곳을 방문했습니다. 테헤란의 그랜드 모살라 모스크 (Grand Mosalla Mosque)와 국립 테헤란대학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이란 사람들의 주장) 이스파한의 이맘광장,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것 같은 느낌의 커다란 바자르(전통 시장), 금요일 사원(마스제데 자메 Masjed-e Jame), 350년이 넘었다는 카주 돌다리,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묘소, 국립 이란애니메이션센터 등을 다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는 이스파한입니다. 사파비 왕조의 후기 수도였으며, 이란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입니다. 우리로 치면 경주 같은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구는 200만 명이라고 하는데,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낭만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이스파한의 이맘광장이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광장의 크기와 아름다움도 압도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제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축제에 나와서 신나게 뛰노는 어린이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예쁘고 자유로웠습니다. 부모들은 차림은 도회적이고 세련됐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축제에 아이들을 데려왔겠지만, '반미 구호'를 외치고, 성조기를 불태우던 이란 시위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옛 페르시아의 숨결' 이스파한의 여름 밤
https://imnews.imbc.com/replay/2011/nwdesk/article/2901833_30473.html



소제목

<히잡이 싫다‥'립스틱 지하드'와 신정(神政) 정치>

세련되기로는 사실 수도 테헤란 사람들이 한 수 위였습니다. 테헤란 여성들은 특히 그랬습니다. 지난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슬람 성직자와 시민들이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 뒤 여성의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 착용이 의무화됐습니다. 윗옷도 엉덩이를 가리도록 길게 입어야 합니다. 이른바 '복장 불량'으로 종교 경찰(Hijab Police)에 단속되면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하죠.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희잡을 정수리 정도까지만 '걸치고', 앞머리는 선글라스(sunglasses)로 가리는 편법을 쓰기도 합니다. 시골로 가면 얼굴만 내놓는 차도르나 눈만 노출하는 니캅을 쓴 여성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테헤란은 정말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이건 체제에 대한 문화적·일상적 반항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안 쓴다" "전통이다"‥이란 '히잡' 논쟁
https://imnews.imbc.com/replay/2011/nwdesk/article/2897849_30473.html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입니다. 투표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하지만 성직자가 사실상 최고 결정권을 지닌 '신정(神政) 정치' 체제입니다. 하지만 신정 정치에 대한 싫증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란의 신정 정치에 대한 염증은 이른바 '개혁·실용·온건파' 대통령 선출로 분출됐습니다.

1989년 온건·개혁파의 '거두'라는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를 시작으로, 1997년 선출된 모하마드 하타미 역시 개혁주의자로 분류됩니다. 지난 2005년에는 비록 강경 보수파이지만 최초의 '비성직자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4년 임기의 대통령을 연임했습니다. 2013년 뒤를 이은 하산 로하니 역시 재선에 성공했죠. 2021년 뽑힌 에브라힘 라이시를 빼고는 서방과 관계 개선을 주요 노선으로 하는 대통령들이 계속 이란 국민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선출된 마수드 페제시키안도 미국과 협상을 통한 경제 제재 철폐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심지어 '히잡 강제 착용 반대와 단속 완화'도 약속했습니다.

특히 지난 2009년 반정부 시위에 나섰던 16세 소녀가 친정권 민병대의 총격에 숨진 사건을 계기로 터진, 이란 여성들의 시위는 '립스틱 지하드(성전·聖戰, 성스러운 전쟁)'라고 불리며 서방 언론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이란 반정부 시위, 거센 女風
https://imnews.imbc.com/replay/2009/nwdesk/article/2375532_30553.html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를 비롯한 성직자 정권은 강력한 '반미(反美)' 노선을 추구하지만 이란 민중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습니다. 1989년 이후 30년 넘게 소위 '개혁·실용·온건파'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이란 국민들의 투표 행태에서 이러한 민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2011년 이란 방문 당시에도 나이 든 세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코카콜라와 청바지에 환장한다."고 혀를 찼습니다. 이란 청년 세대는 미국과 미국 문화에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은 듯했습니다. 이란은 지난 2010년대 초반, 이미 전체 인구의 60% 이상이 이슬람 혁명 뒤인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 나라였습니다(2013년 외교부 자료). 현재 9,200만이 넘는 인구의 절대다수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에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성(聖)과 속(俗)의 전쟁‥이란 vs 미국·이스라엘

지난달 30일 주한 이란대사관이 주최한 기자 간담회에 다녀왔습니다. 사이드 쿠제치 이란 대사가 미국과 이스라엘이 자국을 공격하며 시작된 '12일 전쟁'에 대한 이란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습니다. 쿠제치 대사는 "압박과 무력에는 굴복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습에 숨진 희생자들의 사진을 걸어놓고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을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지난달 30일 사이드 쿠제치 주한 이란대사가 주한 이란대사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이스라엘의 공습 때 희생된 어린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지난달 이스라엘의 이란 핵 시설 공습이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가입도 하지 않은 비공식 핵보유국' 이스라엘이 '핵확산 금지조약(NPT)에 가입한 공식적 핵 미보유국' 이란을 공격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이란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심지어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1996년부터 "이란이 곧 핵무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30년 동안 주장해 왔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나라 정보 총책임자인 개버드 국가정보국(DNI) 국장의 "이란의 핵무기 개발 징후가 없다."는 주장까지 무시하고, 네타냐후의 주장에 따라 이란 핵 시설을 공습했습니다.


네타냐후? 하메네이? '악의 축'은 누구인가
https://imnews.imbc.com/replay/2025/nwdesk/article/6728812_36799.html

16세기, 거의 1,000년 만에 이란을 이민족 지배에서 해방한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고 성직자를 관료·군대와 함께 3대 권력 집단으로 육성했습니다. 지난 1925년 이후 50년 남짓 이어진 팔라비 왕조의 근대화·서구화·세속화를 끝내는 데 앞장선 이슬람 성직자 집단은 500년 이상 이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한 뿌리 깊은 권력입니다. 세속화(世俗·Seculization)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란의 성직 권력(Sacred Power)의 공고함이 만만치 않다는 뜻입니다.

이란 국민들이 성직자 정권의 신정 정치에 싫증을 내는 건 분명한 사실 같습니다. 미국과 서방의 경제 제재에 따른 경제난과 생활고도 한계에 이른 듯합니다.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과 네타냐후 총리의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의 정권 교체(Regime Change)를 거론하는 건 기분 나쁜 일이고, 거기에 찬성할 수도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싫어도 남이 내 아버지를 때리는 건 참을 수 없는 일 아닐까요.

어쩌면 이란과 미국·이스라엘의 대립은 엘리아데가 말한 성(聖)과 속(俗)(The Sacred and the Profane)의 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아데는 물론 인간 세상의 성스러움과 속된 것이 서로 물과 기름처럼 나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신정 정치' 국가 이란과 세계 최강 자본주의 국가 미국, 그리고 미국의 후원을 받는 이스라엘의 대립은 가히 '성(聖)과 속(俗)'의 싸움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성(聖)과 성(聖)의 대결'인 '십자군전쟁·30년 전쟁(1618~1648년)'과 달리, 아무리 압도적 무력을 가져도 성(聖)과 속(俗)의 대결에서 세속 권력이 종교 권력을 이기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은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쓴맛을 톡톡히 본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01년 대대적인 공격으로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탈레반은 20년 뒤 아프가니스탄의 권력을 다시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미국이 인구 3천5백만 명, 국토 면적 65만㎢인 아프가니스탄에 쏟아부은 전쟁 비용이 무려 '1,100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란은 인구가 9,200만 명, 국토 넓이는 165만㎢에 이릅니다. 게다가 중동에서 가장 수준 높은 교육과 과학·기술 수준을 보유한 나라입니다. 또 '페르시아제국'의 후예라는 자부심도 이란 전투력의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듯이 이란을 점령할 가능성은 낮지만 '신정 국가'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박에 쉽게 무릎을 꿇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동 정세가 짧은 기간 안에 안정되기는 힘들다는 뜻입니다.

한국은 원유의 70% 이상, 액화천연가스(LNG)의 3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원유의 68%는 이란 앞 바다인 호르무즈해협을 지나야 합니다. 게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살육전, 이란·이스라엘 12일 전쟁, 인도·파키스탄 분쟁까지. 전쟁의 불길한 그림자가 동유럽에서 중동을 거쳐 남아시아까지 점점 동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이란과 미국·이스라엘의 '성(聖)· 속(俗) 전쟁'이 괴멸적 상황에 이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벙커 버스터로 이란 핵 시설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믿는 미국 강경파의 판단이 한반도에는 미치지 않기를 더욱 간절히 희망합니다.




《뉴스인사이트팀 전영우 논설위원》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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