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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945년 12월 1일 〔4시 기상〕
개고 춥다. 밤에 눈 오다.

김구(金九) 주석 이하 임시정부 요인(要人)의 입국을 보도한 신문을 얻어볼 수 있었다.

오세창(吳世昌) 씨는 그의 서울신문 사장 취임사에 “다만 숙원의 해방을 눈감기 전에 본 것만이 복에 겹고 운운.” 하시었고,

김구 선생은 기자단의 질문에 대답하시어 “혼이 들어왔는지 육체까지 가지고 들어왔는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하시었고,

이시영(李始榮) 선생은 워낙 노령에 행보도 임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신문기자가 약을 잡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약이라니, 나는 그저 고국에 돌아온 것이 무엇보다도 약이오.”라고 하시었다 한다.

홍명희(洪命憙) 선생은 혁명투사를 맞이하는 말씀에 “이생에서는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하리라고 나도 단념하고 그분들도 단념한 존경하는 선배라든지 친한 친구라든지를 저생이 아니요, 이생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꿈같습니다.” 하시었다.

[해설: 임정 요인들은 11월 23일에 제1진, 12월 2일에 제2진이 귀국했다. 23일 오후 4시경 김구 등 15인의 제1진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할 때 아무런 환영 행사도 없었고, 오후 6시에 그 도착을 알리는 하지 사령관의 성명이 나오자 인파가 경교장(당시 이름은 죽첨장)에 몰렸으나 이승만 외에는 접견이 일체 금지되었다.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음을 강조한 미군정 당국은 임정의 영향력을 꺼린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2월 2일 〔5시 기상. 개다〕

간밤엔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누가 대문을 두들기기에 나가보니 이순형(李純衡) 씨와 고옥남(高玉南) 씨가 찾아왔다. 서울 차가 다섯 시간이나 연착해서 열 시에 닿았다. 두 분 다 귀한 손님들이다. 전진(戰塵) 속에서 서로 헤어지고 피차에 구구한 목숨을 부지하기에 골몰해서 소식도 기연미연(其然未然)한 중에 여러 해를 지냈다. 이제 평화 회복되고 조국의 광복이 이루어지려는 이때 옛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나니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저 방에선 밤새 도란도란하는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다. 오래 막혔던 흉금을 헤치면 이야기의 실마리 끝이 없으리라. 가끔 기봉이가 한몫 끼어서 좋아하는 소리도 들린다. [해설: 이순형은 필자의 막내 자형이고 고옥남은 이남덕과 함께 이화여전에서 경성제대로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한 동문이다.]



1945년 12월 3일 〔6시 기상. 구름 끼다〕

유재홍(柳在烘) 씨의 복명에 의하면 내가 연합회 본부 지도과 참사가 되었으니 얼른 부임하라는 기별이 자꾸 지부[해설: 봉양금융조합이 속해 있던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충북지부를 말함]로 오나 전신전화가 통치 않기 때문에 연락을 하지 못했으니 곧 상경하라는 의미의 말과 또 지부장 사무취급으로 신임되었다는 조병순(趙炳純) 씨의 편지가 왔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금명일 중으로 서울 가서 취임을 거절하기로 했다. 이건 내가 도도해서 참사에의 승진을 미타(未妥)하게 여겨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리고 또 반드시 안일(安逸)의 길을 취해서만도 아니다. 나의 나아갈 길은 따로이 있고 그 길을 똑바로 가기 위해선 지도과 참사가 부적임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당분간 이 조합에 그냥 눌러있으면 좋겠다.


낮에 학교에서 후원회에 나와달라는 기별이 있어서 나갔더니 학교에 과동(過冬)할 준비가 없고 또 선생들의 급료도 지불되지 않으므로 아동 한 사람마다 장작값 20원과 선생 양식 한 말씩을 모으겠다 하기에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면민 전체를 통해서 호세(戶稅) 등급에 좇아서 교육비를 풀어서 충용(充用)하라고 제안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의무교육의 정신으로 보아서 학부형에게만 과대한 부담을 시키는 것이 불가하고, 또 그중에는 사실 그러한 부담을 할 만한 실력이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그러면 그 결과 교육에서의 탈락자가 많이 생길 것이니, 교육을 진흥 보급시켜야겠다는 본지에도 어긋나고 또 갹금(醵金)도 소정의 액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결국은 전곡(錢穀)을 낸다 아니 낸다 하는 문제로 교육에 이상한 파란이 생길 것이니 통혀 자미없는 노릇이다.


그러지 않아도 해방 후 교육의 내용이 시시하다는 불평이 학부형 측에 많고 또 그 생각이 옳든 그르든 간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댔자 기껏해야 언문자나 배우는 것뿐이니 그럴 바엔 차라리 집에서 반절을 깨쳐줌만 같지 못하다 하는 판에 힘에 겨운 부담까지 하라면 앞으로 날씨는 추워오고 통학하기도 힘드는 계절이고 하니 모두들 집에서 주저물러앉아 버리거나 마을의 서당에 보내거나 할 것이니, 이건 신국가 건설도상에 있어서 교육의 중대 문제가 아니냐.

지방 공의(公醫) 조규찬(曺圭燦) 씨가 청풍으로 간다기 청해다가 저녁을 함께하였다.

다섯 시 차로 이순형 씨 떠나다.



1945년 12월 4일 〔6시 기상. 개다〕

두 시 차로 서울 향발.

차중에서 뜻밖에 김홍기(金弘基) 군을 만났다. 성대(城大)에서 지원병 통에 서로 헤어진 지 만 2년 만이다. 그동안 공장으로 피해 다니면서 무한한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

밤 열 시에 서울 내리었으나 마땅한 여관도 없고 해서 김 군을 따라 효자동까지 걸어가서 그 매씨(妹氏)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1945년 12월 5일 〔5시 기상〕

간밤에는 눈이 풀풀 날리더니 오늘은 개었다.

아침에 나오는 길에 진명여교(進明女校)에 들러서 김득중(金得中) 씨를 찾았더니 교통사고로 누워 있다기 광화문통으로 나와서 그의 사택(私宅)을 방문하였다. 그동안 옥(獄)에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부상 때문에 그런지 2년 만에 만난 그의 얼굴은 몹시 여위고 창백하다. 본시 건강치 못한 그인지라 다정스런 미소의 그늘에도 쓸쓸함이 깃들인 것 같다. 하늘은 양심적인 이 동무에게 건강을 아끼지 말기를. [해설: 김득중은 필자의 경성제대 학우로, 좌익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2월 중의 해설에는 〈역사앞에서〉 2009년 개정판에 실린 정병준의 해설을 많이 참고로 하는데, 따로 표시하지 않는다.]

혜화정으로 이철(李哲) 군을 찾았더니 요사이는 인민공화국에 가서 일 본다고 부재. 그는 기어이 갈 길을 가고야 마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불 아니 땐 그의 방처럼 세상이 한결 추워지는 것만 같이 여겨진다.


병중의 김 씨도 좌익과 연락을 갖는 것 같고, 이렇듯 모든 정직한 동무들이 지향하는 그 길은 과연 오늘날의 조선을 바로잡는 최선의 길일까. 일반 민심의 동향과 아울러 생각할 때 동포들끼리 서로 분열 항쟁함에나 이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부에서는 일부러 그러기를 바라는 소아병(小兒病)의 무리가 많음으로 보아 더욱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오후에 연합회에 갔더니 늦게 왔다고 모두들 걱정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비록 그사이에 연락이 잘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출근한 지 보름이 넘는다는 말을 듣고는 하도 미안해서 차마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상용(河祥鏞) 씨를 통해서 신(新) 회장에게서 사령을 받았다. 구(舊) 회장 이하 일인(日人) 간부 환시 하에서 다시 미인(米人)의 사령을 받게 되니 얼굴에 모닥불을 퍼붓는 것 같다. 저놈들이 옛날은 우리들에게 와서 머리를 굽신거리더니 이제는 또 미인의 앞에 같은 태도로 나갈 것이다 하고 일인들이 속으로 비웃을 걸 생각하니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자꾸만 후회스럽다.

저녁에는 유흥상(柳興相) 씨가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전차를 얻어 탈 수 없어서 몹시 고생하였다. 안전지대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전차를 기다리노라니 이 시민이 이 불편한 전차로 해서 능률이 저하될 것은 차치하고라도 날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이 전차로 해서 날로 신경질이 더해질 걸 생각하니 여간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1945년 12월 6일 〔3시 기상. 개다〕

오늘 처음으로 과장 자리에 앉아서 일을 보았다. 이 변란통을 이용해서 좀 더 좋은 자리를 하나 얻어둘 양으로 분주(奔走)하는 여러 사람의 틈에 나도 한몫 끼이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참사 김주인(金周仁) 군은 짐 가지러 시골 가서 아직 오지 않았고 서기가 두 분. 한 분은 나이 많은 분으로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은 이인 것 같고 한 분은 제주도 출신이라는 젊고 팽팽한 이다. 저번 직원들의 스트라이크도 이분이 중심이었고, 그 후도 출근은 하나 태업(怠業) 중이라고 여러 방면으로부터 특별히 주의하라는 경고가 많다. 그럴수록 나는 이 청년을 살려서 써보았으면 하는 의욕이 움직인다. 기회 보아서 정리해버리라는 동료의 고마운 충고에도 그저 웃고 말았다.

군정청에서 각 조합으로 발송하라는 예규(例規)도 그냥 쌓아두고 모두들 할 일이 없다고 하므로 그걸 끄집어내어서 분류 정리를 시작하니 두 사람도 기쁘게 협력해준다. 먼지를 덮어쓰고 발송준비를 하고 있노라니 이 군이 들여다보고 연합회에는 과장 겸 소사를 한 사람 두었구만 하고 익살을 피운다. 나는 그저 사람 좋게 웃고 말았다. [해설: “이 군”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데, 이재형(李載瀅)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방황하고 빗나가려는 젊은 사무원들을 그놈들 하고 대립적으로 나가지 말고 그들과 손잡고 나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염원이다. 파업, 태업 하는 건 물론 좋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알지 못할 고민이 있으리라. 그들이 설혹 잘못된 길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역시 조선의 중견 청년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을 잘 이끌어나가서 훌륭한 앞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가 아닐까.

오후엔 서울신보사를 찾아갔더니 억지로 붙들려서 진고개 남궁장(南宮莊)으로 가서 만찬 대접을 받았다.
나와서 박 선생님과 철(哲) 군을 만날 양으로 혜화정 가는 전차를 타려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그만두기로 하고 신당정 서정렬(徐廷烈) 씨 댁에 가서 하룻밤 묵었다.
[해설: 철학자 박종홍(朴鍾鴻)은 필자의 대구고보 은사였고 아내의 이화여전 은사였다.]

하도 춥기에 거리에서 홍차 한 잔을 마셨더니 값이 5원, 써 이즈음 물가의 일반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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