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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16일 새벽 0시.
유영철이 도주했다는 변고(變故)에 기동수사대(광역수사대 전신, 이하 ‘기수대’)는 발칵 뒤집어졌다. 얼마나 정신머리가 나갔으면 피의자의 간질병 연기에 수갑을 풀어주느냐, 자수서 하나 챙기러 간다고 둘이나 조사실을 비운 이유가 뭐냐, 사무실에 남은 형사들은 하나같이 얼빠져 잠이나 잔 거냐…. 강대원 대장의 호통에 형사1계 사무실은 차게 식어 있었다.

당시 강대원 대장의 계급은 경정이다. 경찰의 꽃이자 고위간부로 인정되는 총경 승진을 당연히 바라고 있다. 거기다 기동수사대 대장은 큰 사고만 안 치면 계급 승진이 보장된 자리다. 승진을 위해 여기저기 줄을 잡으러 다니는 동기들에 비하면 일은 고돼도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 그런데 자칫하면 경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에 이름을 남기게 될 판국이었다. 불과 대여섯 시간 전만 해도 연쇄살인 용의자 검거로 자축포를 터뜨렸는데 이제는 천당과 지옥 수준으로 처지가 뒤바뀌었다. 어떻게든 유영철을 잡아들여 사태 확전만큼은 막아야 했다.

" 강대원 대장은 서울청에 비상 요청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일단 유영철을 신문하면서 받아낸 연쇄살인 혐의에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유영철은 단순 절도 혐의자에 불과한데, 그런 사유로 서울청에 수배 요청을 한다는 것에 상당한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자기 무능을 서울 일선서의 형사들에게 공표하는 거기도 하고.(당시 기수대 형사의 회고) "
결국 강대원 대장은 자력으로 유영철을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가용 인원은 약 80명(형사1계~5계)이며, 이 중에서 행정 업무의 내근직과 타 사건에 배정된 경력(警力)은 제외했다. 이 인원으로 마포 일대는 물론, 유영철이 최초 검거된 신촌오거리, 거기다 외지로 도주할 가능성을 고려해 서울의 주요 시외버스터미널과 전철역까지 모두 커버해야 한다.

2인 40개 조를 구성해도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기수대는 유영철의 은신처조차 특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경찰은 사후 “주민등록상 주소지 등재가 안 돼 있던 시절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이에 앞서 17시간이 넘는 마라톤 신문 끝에도 유영철의 기본 신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결국 강대원 대장은 서울 어느 지역에 수사력을 집중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 채 형사들을 거리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날 새벽은 상온 25도에 육박했고 비까지 내려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신촌의 유흥가를 훑던 형사들은 행인들을 불시 검문하다 지쳐서는 이내 거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전국 프랜차이즈 술집과 노래방이 널려 있는 혼잡한 큰길이다. 목덜미와 팔뚝으로는 줄줄 땀이 흘러내렸다. 손에 쥔 유영철의 수배 전단도 비에 젖어 ‘절도 용의자’라는 글씨의 잉크가 번져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형사1계의 실책으로 빚어진 철야 근무로, 남을 위해 이 시간까지 발로 뛰는 것에 진력이 난 터다. 도처에 빠른 템포의 리믹스 가요가 흐르는 가운데 한 형사가 “저기 모자 쓴 놈 잡아볼까요?”라고 묻자 이내 다른 형사는 “저거 호객꾼이잖아. 그냥 냅둬”라고 답했다.

시외버스터미널과 전철역을 맡은 형사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막차가 끊긴 지 두 시간이 지났다. 새벽 첫차를 타러 나온 유영철이 있다면 그때 잡는 게 최선이라지만 지금부터 굳이 주변을 탐문할 필요가 없다는 무기력만 퍼졌다. 차 안에서 잠복 중인 형사들은 눈을 붙이거나 담배를 태웠다. 원칙대로라면 담뱃불이 새어 나가지 않게 흡연은 삼가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구역에 유영철이 나타날 거라 믿지 않았다.

반면에 유영철을 놓친 형사1계 박명선 경위의 반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새벽 3시30분, 행적을 추적한 끝에 유영철 모친을 찾아갔지만 그때는 이미 유영철이 오피스텔로 모친과 누이를 불러 방 안을 싹 치우고 잠적한 지 3시간이 지난 뒤였다. 범행에 사용된 망치와 가위, 톱 그리고 사체를 담았던 봉투까지 모두 인근 쓰레기 더미에다 버렸다. 그러고는 모친과 누이에게 16만원을 받은 뒤 불쑥 떠났다. 그래서 형사가 나타나 “유영철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모친은 아들의 집 주소를 대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2004년 7월 16일 새벽 3시30분경, 형사1계는 유영철의 오피스텔을 찾았지만 범행 도구는 이미 폐기된 뒤였다. 중앙포토
유영철의 집은 마포 노고산동의 주택가, 오르막길 중간의 건물 2층에 있었다. 박명선 경위의 반원들이 굳게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곳은 연쇄살인 현장이 아닌 그저 정돈된 집으로만 보였다.

나중에 감식반원들이 혈흔 감식에 사용되는 루미놀(luminol) 시약을 뿌리자 곳곳에 핏자국이 푸른 형광으로 발광하던 것을 한 형사는 기억했다.

" 아직도 눈에 선명한 것은 화장실 하수구다. 물이 흘러 내려가는 하수구 홈을 따라서 루미놀 시약이 시퍼렇게 빛났다. 죽은 피해자의 절규 같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당시 형사들에게 중요한 건 유영철이 그 자리에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집 안 물품을 아무리 훑어봐도 그가 어디로 내뺐는지를 짐작할 만한 단서는 없었다. 어렴풋한 희망을 품었던 형사1계는 낭패감에 빠진 채 문을 닫고 나왔다. 어느덧 새벽 5시. 어둑어둑하던 주위도 벌써 밝아졌다. 다른 수색조에서의 검거 소식은 없었다.

한편 이날 조간에 유영철의 도주 사실은 실리지 않았다. 사안이 유출되면 경찰청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서울경찰청장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기수대의 직속 상사인 서울청 수사부장부터 줄줄이 옷을 벗는 사태는 불가피하다. 그래서였을까. 평소 같으면 기자들과 형·동생 하는 내부 빨대들도 이번만큼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일지.

기동수사대가 급조한 유영철 수배 전단(좌측)과 김상중 형사가 수색을 위해 새로 인쇄한 사진. 중앙포토
그때 한 형사의 뇌리에 유영철의 변태 같은 성욕이 떠올랐다.
전날 기수대 조사실에 갇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터.

“우린 영등포로 간다”

왜 하필 영등포 사창가였을까. 형사는 그중에서도 '날계란' 들고 있는 놈은 싹 다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는데. 경찰서를 탈출한 유영철의 충격 행적,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6250
〈강력계 24시〉 유영철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형사 물먹인 유영철 폭주했다…사창가서 삼킨 ‘땅콩 10알’ 정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8501

형사 12명 있는데 걸어나갔다…한손 수갑 찬 유영철 도주극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4469

〈탐정의 모든 것〉 이런 이야기도 있어요
교사 찾아가 “일진 다 끌고 와”…탐정 푼 엄마의 ‘학폭 복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4165

어느날 차에 샤넬백 숨긴 아내…요양원 원장과 밀회 대가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247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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