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52>  베트남 입시 전쟁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베트남판 '수능'인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사흘 앞둔 지난달 23일, 베트남 최초의 대학인 하노이 문묘에서 학부모들이 자녀의 시험 합격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학생들이 손때 묻은 노트를 꼭 쥔 채 교문으로 들어선다.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몇몇은 엄마 아빠를 꼭 끌어안은 뒤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정문 앞에서는 후배들이 ‘침착하게, 자신있게’ ‘반드시 이긴다’라는 글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에 나선다.

한국 수학능력시험일 모습이 아니다. 베트남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 고사장 풍경이다.
새 학기가 9월에 시작하는 베트남은 매년 6월 말~7월 초 한국의 수능과 유사한 고교 졸업 시험
을 치른다.

베트남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 첫날인 지난달 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세 여학생이 밝은 표정으로 수험장을 나서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이 시험 성적으로 졸업 여부뿐 아니라 대학 지원 자격까지 결정
된다. 올해 응시생은 116만 명. 1일차에는 문학(오전)·수학(오후), 2일차에는 자연과학 또는 사회과학(오전)·외국어(오후) 등 총 네 과목을 치른다.

재수하면 졸업 시험 외에 별도의 대입 시험을 다시 봐야 한다. 내년에 또 다른 시험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날 전력을 다해야 한다. 지난달 26, 27일 이틀간 진행된 고교 졸업시험 현장에서 한국 못지않은 베트남의 교육열을 들여다봤다.

지난달 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 아버지가 전국 고교 졸업 시험을 치르는 딸이 고사장에 입실하기 전 물품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부모·선후배 응원 나서



오전 6시 베트남 하노이 시내 판딘풍 고교. 시험 시작까지 한 시간 반이나 남았지만 수험생을 태운 오토바이가 정문 앞에 속속 도착했다.

“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최선을 다하면 돼.” 한 아버지가 12학년(고3)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긴장해 얼어붙은 아이를 대신해 수험표를 챙겼는지 재차 확인하는 것도 아빠의 몫이다.

10학년 11학년 후배, 졸업한 선배들도 자원봉사자를 의미하는 파란 유니폼을 맞춰 입고 일찌감치 학교에 도착했다. 이들이 간식과 함께 ‘너는 할 수 있어’ ‘네가 자랑스러워’라는 메모를 전해주자 수험생들은 긴장 속에서도 옅은 미소를 보였다.

지난달 26일 베트남 하노이 판딘풍 고교 앞에서 선·후배 자원봉사자들이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 수험생에게 응원 메시지를 붙인 간식을 나눠주고 있다. '모든 노력은 반드시 보답받는다' '꿈은 이루어진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대학생 부이티란홍(20)은 “2년 전 수험생일 때 너무 우울했는데 선배들로부터 응원 받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며 “그 마음을 알기에 후배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행여 경적 소리에 학생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시험장 인근 도로에서는 교통 경찰이 부지런히 차량 흐름을 정리했다.

부모는 자녀가 고사장에 들어간 뒤에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섭씨 37도 무더위 속에서도 연신 부채질해가며 망부석처럼 학교 앞을 지켰다. 학부모 또티란(43)은 “아들이 혼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 중요한 날 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며 “끝나고 나왔을 때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가 안심할 것 같아 일을 하루 쉬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베트남 하노이 판딘풍 고교 앞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 첫날 두 과목을 마치고 나온 수험생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오후 3시 30분, 시험 종료 종이 울리자 학생들이 삼삼오오 교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내내 앞을 지키고 있던 자원봉사자들과 학부모, 시험장 인근을 순찰 중이던 공안까지 박수를 보냈다.
초등 5년, 중등 4년, 고등 3년간 배운 것을 이틀 사이 모두 쏟아낸 학생들을 향한 찬사이자 격려
였다.

수험생 응우옌민응옥(18)이 “엄마! 문학 그냥 먹방했어”라며 안기자 엄마는 그제야 안심한 듯 활짝 웃었다. ‘먹는 방송’을 의미하는 한국 신조어인 먹방(Mukbang)이 베트남에서는 뜻이 바뀌어 ‘빠르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다’, ‘게임에서 압승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시험을 잘 봤다는 얘기다.

응옥은 “시험을 관통하는 주제가 ‘고향과 조국’이었는데, 교과서에 나온 내용은 아니었지만 평소 관련 책을 많이 읽고 고민했던 부분이라 크게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 실력을 다 보여주지 못해 아쉬운 듯 눈물을 훔치는 학생도 더러 눈에 띄었다.

베트남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 첫날인 지난달 26일 하노이에서 한 수험생이 고사장을 빠져나오며 눈물짓고 있다. 시험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역력하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허리띠 졸라매 사교육 투입



베트남 입시 풍경이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는,
두 나라 모두 높은 성적이 좋은 대학과 고임금 직장으로 직결될 것이라는 인식
이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분위기를 유교 문화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베트남은 1075년부터 800년 넘게 과거 제도가 이어졌다. 시험 합격이 곧 ‘입신양명’이자 ‘출세 지름길’이라는 사고방식이 지금까지도 교육관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자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고 싶다’는 부모 세대의 열망까지 더해지면서, 입시에 쏟는 열의와 기대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베트남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 첫날인 지난달 26일 하노이의 한 고사장 앞에서 수험생 학부모들이 자녀가 시험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그만큼 부모의 헌신은 각별하다. 교육을 위해 집과 땅을 팔고, 수차례 이사를 다니는 ‘맹모’들의 사연은 베트남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월 1,000만 동(약 52만 원)을 버는 평범한 직장인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월급의 절반 이상을 자녀 사교육비에 쏟아붓는 모습도 흔하다.

그렇게 쌓아 올린 학생의 12년 노력과 부모의 희생을 평가받는 고교 졸업 시험은 가정에 일생일대 행사 중 하나로 여겨진다.
베트남 국영방송 VTV는 “고교 졸업 시험은 온 가족의 시험”이라며 “학생에게 중요한 이정표일 뿐 아니라 수백만 명의 학부모에게도 특별한 날”이라고 설명
했다.

지난달 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 첫날 시험을 마친 아들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어머니와 함께 귀가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과거 인재 산실서 합격 기원



이 같은 절실함은 하노이 중심가 ‘문묘국자감’에서도 읽힌다. 문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이자 1076년 설립된 베트남 최초의 대학(국자감)이 있던 곳이다. 한국에서 학부모들이 수능을 앞두고 유명 사찰이나 교회, 성당을 찾듯,
베트남 부모들은 과거 인재의 산실이던 이곳을 찾아 합격을 빈다.


시험을 사흘 앞둔 지난달 23일, 문묘에는 학생과 학부모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과자, 과일, 꽃, 현금 같은 제물을 올리고 대입을 기원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지난달 23일 베트남 하노이 문묘에서 전국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앞둔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좋은 성적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있다. 제단에는 꽃과 과일, 과자 등 이들이 준비한 제물이 잔뜩 놓여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부적과 소원문도 빠지지 않는다.
‘등과(登科·과거 급제)’, ‘총명(聰明)’ 등 학업 관련 문구가 적힌 부적은 빠르게 동났다.
하노이에서 35㎞ 떨어진 박닌성에서 왔다는 수험생 황잉(18)은 “제단에 올릴 소원문을 쓰는 데만 30분 넘게 걸렸다”며 “공대에 합격해 기술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 졸업시험을 잘 봐서 꿈에 한 발 다가가고 싶다 빌었다”고 말했다.

‘학업 성취’, ‘성공’, ‘합격’, ‘길상(吉祥)’ 등의 문구가 담긴 서예 두루마리를 얻으려는 줄도 건물 밖까지 길게 이어졌다. 합격을 향한 간절함이 염원의 공간을 묵직하게 채웠다.

쇼피, 라자다 등 유명 전자상거래 플랫폼에서도 이맘때면 ‘공부 부적’ ‘행운 부적’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실제 효험을 기대한다기보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읽힌다.

베트남판 '수능'인 전국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사흘 앞둔 지난달 23일, 하노이 문묘에 수험생의 좋은 성적을 기원하는 부적이 판매되고 있다. 부적에는 재능, 합격, 지혜 등을 의미하는 단어가 적혀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시험을 앞두고는 일상조차 조심스러워진다. 한국에서 ‘미끄러질까봐’ 미역국을 꺼리듯, 베트남에서는 바나나를 먹지 않는다. 껍질이 미끄러워 탈락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이다. 달걀은 동그란 모양이 ‘0점’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기피한다. 시험 전 머리를 감거나 자르는 것도 금기로 여겨진다. 머릿속 지식이 씻겨 나간다는 믿음 탓이다.

한국에서 ‘찰싹 붙는’ 엿을 주고받듯, 베트남에서는 ‘팥’이 선호된다. 팥(더우)이 ‘합격하다’는 단어와 발음이 같아, 시험을 앞두고 팥죽 등을 먹는 풍습도 있다.

지난달 23일 베트남 하노이 문묘에서 전국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앞둔 수험생 황잉(왼쪽 두 번째)이 제를 올리고 있다. 손에는 기도용 향과 자신의 바람을 담은 소원문을 들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부정행위·과열경쟁 ‘그늘’



그러나 성공과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 그늘도 깊다. 부정행위가 대표적이다. 베트남 남부 람동성 공안은 지난달 27일 학생 N(18)을 ‘기밀 정보 고의 공개 및 문서 도용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초소형 카메라와 무선이어폰을 이용해 시험지를 학교 밖에 있던 후배 B에게 찍어 보냈다. 이후 B는 챗GPT로 문제를 푼 뒤 다시 이를 불러주다 적발됐다.

하노이에서도 시험 문제를 촬영해 인공지능(AI) 앱을 통해 답을 얻으려던 응시자들이 붙잡혔다.
시험 첫날인 26일에만 전국에서 10명 넘는 학생이 부정행위로 공안 조사
를 받았다.

26일 베트남 람동성 람하구에서 고교 졸업 시험을 치른 수험생 N군(왼쪽 두 번째)이 첨단 장비를 이용한 부정행위로 공안 조사를 받고 있다. 뚜오이쩨 캡처


대입 스캔들도 입시 철마다 반복된다. 특히 2018년에는 명문대 신입생 108명이 시험 성적을 조작해 입학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당시 학부모들은 자녀를 명문 국립경제대, 하노이 의대 등에 보내기 위해 졸업시험 점수를 올려주는 대가로 관계자들에게 수억 동(수천만 원)을 건넸다가 구속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방 인민위원회 고위 관계자도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공정해야 할 입시 제도가 특권층의 세습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
이 거셌다.

지난달 23일 오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 어린이가 영어 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방학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학원을 찾는 학생이 적지 않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입시를 둘러싼 과열 경쟁은 교육의 출발선마저 앞당기며 조기 사교육 시장에 불을 붙인다. 한국에서 기저귀도 떼지 못한 아이를 영어유치원(유아 대상 영어학원)에 보내는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네다섯 살부터 영미권 강사가 있는 학원에 보내 영어에 ‘올인’시키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현지 매체 VN익스프레스는 지난달 19일 “베트남 어린이들이 영어 능력에 너무 집중하면서 모국어를 잊고 있다”며 “이러한 추세 속에 문화적 정체성과 언어 보존을 둘러싼 논쟁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왜 아이들이 영어에 능숙하면 자랑스러워하면서, 모국어는 소홀히 하느냐는 지적
도 있다”고 전했다.

한국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51484 ‘31.8조 원’ 이재명 정부 첫 추경안 국회 본회의 통과…국민의힘 불참 new 랭크뉴스 2025.07.05
51483 김민석 총리 국회 데뷔 “추경안 통과 감사···민생 회복 전력” new 랭크뉴스 2025.07.05
51482 ‘31.8조’ 이재명 정부 첫 추경안 본회의 통과… 野 본회의·표결 불참 new 랭크뉴스 2025.07.05
51481 특검 수사로 윤곽 드러나는 ‘그날 밤 국무회의’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80 2차 추경으로 AI 분야 1천800억원 투자…"AI 대전환 지원"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9 '31.8조' 이재명 정부 첫 추경안 국회 통과…국힘 표결 불참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8 [속보] 이재명정부 첫 추경안 의결… 이달 중 ‘민생 쿠폰’ 지급할 듯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7 ‘31.8조’ 이재명 정부 첫 추경안 본회의 통과… 野 본회의·표결 불참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6 국회, 31조 8000억원 추경안 의결…전국민에 15~55만원 지급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5 [속보] ‘31.8조 원’ 이재명 정부 첫 추경안 국회 본회의 통과…국민의힘 불참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4 미 상호관세 유예 종료 ‘임박’...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다시 방미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3 국회서 1.3조 늘어난 추경…"소비쿠폰, 이달 1차 지급 완료"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2 중국 'EU 강대강 대치' 시작하나… 브랜디에 반덤핑 보복 관세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1 '31.8조 추경' 野 보이콧 속 단독 처리... 검찰 특활비 복원에 민주당 반발 촌극도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70 소비쿠폰 1.9조 더 증액…與, 31.8조 '수퍼추경' 본회의 단독처리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69 [속보] '31.8조' 이재명 정부 첫 추경안 국회 통과…국힘 표결 불참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68 소비쿠폰 증액, 최대 55만원까지 준다…이달 안에 지급 추진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67 [속보]민생회복 소비쿠폰, 비수도권·인구감소지역 3만원씩 늘었다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66 "축의금 없다고 뒷담? VS 어색해도 내야"…친구 누나 결혼식, 당신의 선택은? new 랭크뉴스 2025.07.04
51465 [속보]전국민 15만~55만원 지급···추경안 국회 본회의 통과 new 랭크뉴스 2025.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