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책에 빠졌다
알코올성 간경화 진단, 아빠의 마지막 순간
회복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살고 싶다"
가족 설득에 결국 서명… "여전히 죄책감"
알코올성 간경화 진단, 아빠의 마지막 순간
회복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살고 싶다"
가족 설득에 결국 서명… "여전히 죄책감"
편집자주
'존엄하게 죽고 싶다'는 우리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연명의료결정제가 올해로 시행 7년, 법 제정 기준으로는 내년이면 10년이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 300만 돌파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 사이 이별의 풍경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국 의료 현장에서 확인하고 파악한 실상과 한계, 대안을 5회에 걸쳐 보도한다.5월 20일 고미애씨가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추모의집에서 아빠의 납골함을 바라보고 있다. 박고은·이수연·박채원 PD
실은 죄책감이었다. 쉽게 놓아줄 수 없었던 이유였다.
고미애(43)씨는 2021년 6월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울음과 한숨, 그리고 한탄이 뒤섞인 곳. 경기 일산의 한 병원 중환자 대기실, 그곳에서 미애씨는 한 장의 종이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들 왜 포기해? 아직 숨 쉬고 있잖아!" 미애씨 고성이 대기실 구석구석을 헤집어놨다. "선택해야지. 어려운 건 알지만." 냉랭한 눈빛으로 오빠는 대꾸했다. "저건 아버님이 살아 계신 게 아니잖아. 편하게 놓아드리자. 응?" 낮고 굵은 남편의 목소리가 그날 유독 느렸다.
종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찬찬히 또박또박 읽어봤다.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에 대한 친권자 및 환자가족 의사 확인서'. 가족들 사인이 있었고, 그 밑으로 빈칸이 보였다. 미애씨 몫으로 남겨 둔 서명란. 잠시 눈을 감았다. 기계의 힘을 빌렸다지만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건 맞잖아.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가 없잖아. "아빠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미움받던 아빠...도박과 술
2017년 결혼식날 고미애씨가 아빠의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하고 있다. 고씨 제공
미애씨도, 오빠도, 가족도 그가 문제였다는 것을 다 안다. 아빠는 중개업, 택시, 일용직을 전전하며 하루살이 삶을 살았다. 곁에는 가족이 아닌 도박, 여자 그리고 술이 있었다. 지친 엄마가 이혼을 요구했지만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엄마가 서울로 떠난 뒤론 전국을 혼자 떠돌아다녔다. 미애씨와 오빠는 일산에 사는 할머니가 길에서 나물을 팔아 모은 돈으로 키웠다. 종종 아빠를 봤지만, 기억은 거의 없었다. 잔뜩 술에 취한 채 아이스크림을 사줬던 날밖에.
시간이 흘러, 결혼을 앞둔 미애씨가 연락을 했다. "밥이나 한번 먹어요." 2016년 여름이었다. 그래도 결혼 전에는 얼굴을 비추고 싶었다. 예비 신랑과 불고기 집에서 만난 아빠는 삐쩍 말라 있었다. 장묘 사업을 한다는 그는 고기 한 점을 삼킬 때마다 소주를 가득 채운 맥주잔을 들이켰다. 술을 따를 때, 잔을 들 때, 손은 벌벌 떨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흘린 사람은 아빠뿐이었다.
살고 싶다던 아빠
5월 20일 고미애씨가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추모의집에서 아빠의 납골함 앞에서 손을 모으고 있다. 박고은·이수연·박채원 PD
"고미애님 맞으시죠? 여기 병원인데요. 아버님께서 쓰러지셨어요."
결혼 후 얼마 안 된 2019년 봄, 아빠는 '알코올성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 매일 소주 4~5병을 마셨다고 한다. 그나마 병은 초기라 술을 끊으면 됐지만,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미애씨가 나섰다.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려준 사람, 그래도 '가족이니까'. 그 마음뿐이었다. 매일 하남에서 일산 병원까지 데려다 줬고 약을 먹으라 닦달했다. 술 끊으란 잔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치료를 위해 수도권 병원을 수소문해 다녔다. 그래도 그는 술을 버리지 않았다.
3달에 한 번이던 간성혼수(간 기능 장애로 인한 뇌 기능 및 인지능력 저하)가 2~3주에 한 번으로 잦아졌다. 배액관으로 하루 종일 빼내도 복수는 안 빠졌다. 2021년 3월, 의사 입 밖으로 차가운 말이 나왔다. "간이식밖에 답 없어요. 그러게 왜 이리 술을 많이 마셨어요."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다.
"손녀딸 교복은 내가 꼭 사줄 거야." "손녀딸 대학 등록금은 내가 내줄 거야." 병원에 입원할 때면 딸에게 전화해 "살고 싶다"고 울먹였다. 가족에게 사위에게 간이식을 부탁했다. "염치없다"면서도, 그만큼 살고 싶어했다. 외로웠던 아빠
고미애씨의 아빠가 젊은 시절 낚시를 즐기고 있다. 고씨 제공
아마 봄이었겠다. 요양병원에 있던 그에게 그날은 한 달 만의 외출이었다. 메밀국수가 먹고 싶다고 했다. 미애씨는 돈가스를 시켰다. "같은 메뉴를 같이 앉아 먹는 게 싫었다"고 기억했다.
"안 먹니?"
"아빠나 먹어."
창 밖으로 벚꽃이 흩날렸다. 멍하니 꽃비를 지켜봤다.
"봄이 온 줄도 몰랐다. 꽃이 핀 줄도 몰랐어."
결혼식 때 우는 아빠를 보면서 "왜 그러지" 했던 그 마음 같았다. 괜한 짜증이 밀려왔다.
"원래 다들 계절 바뀌는 거 모르고 사는 거야. 빨리 먹기나 해."
선택을 해야 한다
5월 20일 고미애씨가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추모의집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고은·이수연·박채원 PD
오빠가 멍한 표정의 미애씨를 깨웠다. 그리고 서명을 재촉했다.
"무슨 소용이야? 장치만 하고 누워있는 건데. 이게 살아 있는 거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뒤 의사는 임종기로 판단했다.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체외생명유지술 △수혈 △혈압 상승제 등등. 연명의료를 계속할 것인지 물어왔다. 이걸 그만 받게 하려면, 가족이 모두 동의해야 한다고 했다.
오빠는 서명에 거침이 없었다. 나머지 가족도 "연명의료 이제 필요 없다"고 입을 모았다. 미애씨는 머뭇거렸다. '만약 죽으면 누구 옆에 묻지 말고 강이나 바람에 흘려 보내라'고 했던 아빠 말이 문득 떠올랐다.
머리가 지끈했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의 경계선을 다른 사람이 이렇게 그어버려도 되는 걸까. 평소에 "살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그의 뜻을 애써 모른 채 묻어둬도 되는 걸까. 연명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정말 회생의 가능성이 '0'인 걸까. 손이 떨려왔다. 고민의 무게를 혼자만 짊어지고 있는 것만 같아 원망이 들었다. 미애씨는 애써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여전히 잠을 설친다
5월 20일 고미애씨가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추모의집에서 아빠의 납골함을 매만지고 있다. 박고은·이수연·박채원 PD
'또 수술 장면이네' TV를 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병원 장면이 나올 때면 그날의 고통이 심장에 콱 박힌다. 누가 조금만 아프다는 소리에도 가슴이 조여온다.
"봐봐. 아까 아버지가 편안해 보였어?"
4년 전 그날. 중환자실 밖 복도에서 남편이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고서야 펜을 들 수 있었고, 서명란을 채울 수 있었다. 퉁퉁 부은 아빠는 누가 봐도 매 순간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50분을 달려온 병원, 미애씨는 중환자실에서 아빠를 겨우 10분 볼 수 있었다. 나오자마자 재촉하던 "선택을 하셔야 한다"는 말. 애증이 이성을 뒤흔들었고, 질문은 쏟아졌지만 답은 쉽사리 얻지 못했다. 그럴수록 마음은 불안해졌지만, 주치의는 보이지 않았고, 간호사의 설명은 늘 서늘했다. "결정하고 알려주세요." 앞 뒤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남는 건 그게 전부였다. 정말 외로운 건 아빠가 아니라 미애씨였는지 모른다.
'내가 뭘 몰라서 잘못한 건 아니었을까.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해야 할까.' 애당초 답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말을 꼭 들어보고 싶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아빠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빠는 연명의료를 중단한 그날, 숨을 거뒀다.
미애씨 곁에 윤리위원회가 있었다면...'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의료 중단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의료기관에 반드시 '의료기관 윤리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있다. 위원회의 역할 중에는 '환자와 환자 가족에 대한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 관련 상담'과 '의료인에 대한 의료윤리교육'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본보가 전국 병원 종사자 및 환자 보호자 50여 명 심층 인터뷰와 현장 실태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이런 교육과 상담이 제대로 이뤄지는 병원은 일부 극소수 대형병원으로 한정돼 있었다.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의학 지식과 법제도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고, 심지어 자신이 내린 결정이 환자의 생사를 갈랐다는 오해 속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었다. ■ '유예된 죽음' 특별취재팀팀장= 김혜영 기자(엑설런스랩)
취재= 손영하 · 이서현 기자(엑설런스랩), 백혜진 · 정혜원 인턴기자
사진= 정다빈 · 강예진 기자
영상= 박고은 · 이수연 · 박채원 PD, 김태린 작가
인터랙티브= 박인혜 기획자, 남유진 개발자, 이정화 디자이너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 ① 갈피를 잃었다
- • 심장이 멈춘 남편은, 계속 숨을 쉬었다...연명의료 죽음의 풍경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902070004504) - • "안 받겠다" 해도 결국 절반은 연명의료 받다 숨진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714550003896) - • '연명의료 거부' 300만 시대... 70대 여성 31%가 쓴 이 문서는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2318510004794) - • "나는 오늘 아빠의 죽음을 결정했다" [인터랙티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2911550002745)
- • 심장이 멈춘 남편은, 계속 숨을 쉬었다...연명의료 죽음의 풍경 [유예된 죽음]
- ② 마음이 흩어졌다
- • "연명의료 싫다" "끝까지 받겠다"...내 결정을 가족이, 의사가 막아섰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0913350000358) - • 소외된 외국인과 무연고자...이들은 연명의료를 끝까지 받아야 했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222360004659) - • "임종 판단 못해" 그 의사가 벌벌 떤 이유... 식물인간은 대책도 없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2323540003696) - • "죽음 너무 괴로워 조력사 논의까지.. 대리인이 결정할 수 있어야"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922180002265) - • '김 할머니' 떠난 지 15년 "죽음은 여전히 공장화... 가정돌봄 절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921090000993)
- • "연명의료 싫다" "끝까지 받겠다"...내 결정을 가족이, 의사가 막아섰다 [유예된 죽음]
- ③ 빈틈에서 헤맸다
- • '심정지 1시간' 아빠, 간호사 자매는 연명의료를 선택했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610220003322) - • 연명의료 중단 결정, 그 후 대책이 없다...방치될까 두려운 환자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2423060002777) - • "편히 가려고 왔는데"...60일마다 '병원 찾아 삼만리' 떠나는 까닭은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2510290001551)
- • '심정지 1시간' 아빠, 간호사 자매는 연명의료를 선택했다 [유예된 죽음]
- ④ 자책에 빠졌다
- • 늘 취해 있던 아빠의 죽음에 서명했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807530002739) - • 2분 고민하고 아빠는 지옥의 2주를 보냈다 [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809330004025) - • "시한폭탄 안은 기분" "비정규직 1명이 전체를"...공용윤리위 들여다봤더니[유예된 죽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2511250000896)
- • 늘 취해 있던 아빠의 죽음에 서명했다 [유예된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