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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강조한 '기라키라 이름'에 갑론을박
"너무 튀는 이름 싫어, 아이 생각해야"
호적에 한자 이름 읽는 방법 등록 의무화
"이름은 내 권리, 국가가 왜 막냐" 반발도
이름 시각물. 게티이미지뱅크


"네 이름은 뭐라고 불러야 하니?"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이노우에 료스케(가명)는 지난 4월 학부모가 돼서야 '이름'이 일본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 올해 첫째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학급 명부를 받아보면서다. 일본 학교들은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하면 학부모들에게 학급 명부를 보낸다. 자녀와 친구가 될 아이가 누군지 미리 알게 하려는 배려다. 그런데 이노우에는 지난달 아들의 참관수업에 간 뒤 크게 당황했다. 아들이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물었더니 예상하지 못한 답만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노우에는 "명부를 보며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이름들이 나와 놀랐다"며 "자녀 세대의 이름은 기성세대와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에선 이름을 기존 방식과 전혀 다르게 읽는 '기라키라 이름'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기라키라는 한국어로 '반짝반짝'이라는 뜻으로, 톡톡 튀는 개성 있는 이름이라는 의미다. 문제는 익숙하지 않은 너무 튀는 이름을 쓴다는 점이다.

일본은 대체로 한자 이름을 쓰는데, 읽는 방법이 매우 다양해 상대의 이름을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 같은 한자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다. 잘 안 쓰는 이름이었지만 유명인 덕분에 인기 있는 이름이 되는 사례도 있다.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1960~1964년 재임) 전 총리의 '하야토'는 그가 총리가 되기 전까지 잘 쓰지 않는 이름이었다. '勇人'(용인)은 보통 '유토', '유진'으로 불렀는데, 하야토 총리가 취임하면서 널리 쓰이게 됐다. 이제는 유토보다 하야토로 쓰는 사람이 더 많다.

한자만 보고 상대의 이름을 잘못 부를 수도 있기에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상대의 이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일본 문화다. 헷갈리지 않게 명함에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적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사회 통념상 '이 한자는 대체로 이렇게 읽는다'라는 기준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한자 이름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장기 불황에 '개성 존중' 문화 확산, 작명에 영향

일본 초등학생들이 코로나19 사태 때인 2020년 6월 1일 도쿄 한 초등학교 교실에 일정 거리를 둔 채 앉아 있다. 도쿄=지지·AFP 연합뉴스


그러나 기라키라 이름이 확산하면서 일본인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있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며 갑론을박도 격해지고 있다. 기라키라 이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름이 특이하다는 이유로 받게 될 불편한 시선을 아이가 혼자 감당할 수 있겠냐"고 우려한다.

기라키라 이름이 본격적으로 퍼져나간 건 1990년대부터다. 일본은 1950~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치며 풍요로운 시대를 보냈다. 1980년대에는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을 넘어설 때도 있을 만큼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1990년대 버블(거품) 경제가 꺼지며 경기는 침체됐고, 이후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기를 보내게 됐다. 2020년대에 들어선 지 중반을 맞은 지금도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말할 만큼 불황의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장기 불황은 일본인들의 가치관을 바꾼 계기가 됐다. 밝은 미래를 꿈꾸기 어려운 팍팍한 삶에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해졌고, 나다운 모습으로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다. 집단 내 규칙과 통일성을 중시해 온 과거와 달리 '개성'이 중요한 가치관으로 떠오른 것이다.

미야타 히로아키 게이오기주쿠대 교수는 NHK방송에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사람들이 유행을 좇아 비슷한 라이프 스타일을 즐겼지만, (장기 불황기에는) 나만의 차별화된 패션과 음악을 즐기려는 사람이 늘었다"며 "이런 사회 풍토가 작명에도 영향을 준 것"이라고 말했다. 남들과 같은 보편적인 이름이 아닌 반짝반짝 빛나는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부모가 늘면서 기라키라 이름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기성세대는 꿈꾸지 못한 개성 있는 삶을 살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다.

1990년대 '아쿠마 소동' 사회 문제된 이름 논란

인형탈을 쓴 연기자들이 지난달 6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에서 피카츄 퍼레이드 공연을 펼치고 있다. 뉴시스


그러나 사회 통념을 벗어나는 튀는 이름이 늘자 '이대로 둬도 괜찮겠냐'는 비판 여론도 커지기 시작했다. 시대를 휩쓴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캐릭터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사람이 늘어서다.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인 '피카츄'나,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 따온 '나우시카'를 실제 이름으로 쓰는 사람도 등장했다.

'光宙'(광주)는 보통 '미쓰히로', '미쓰오키'로 읽는다. 그런데 기라키라 이름으로 쓰고자 '광'과 '주' 각 한자의 읽는 방법을 조합해 피카츄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나우시카(今鹿)의 앞글자 '이제 금'(今)은 보통 '이마', '이마이'로 읽는다. 이 글자를 일본어가 아닌 영어 '나우(Now·지금)'를 붙여 나우시카가 됐다. '도쓰', '데코'로 읽는 볼록한 철(凸)은 '데토리'로 바꿔 쓰는 사람도 나왔다. 게임 테트리스의 블록 모양과 닮았다는 이유로 테트리스와 발음이 비슷한 데토리로 부른 것이다. 그동안 '나나토', '나오토'로 읽었던 '七音'(칠음)은 '도레미'가 됐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독특한 이름 붙이기는 이전에도 큰 논란거리였다. 1993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아쿠마 소동'으로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함부로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아쿠마 소동은 1993년 도쿄 아키시마시에 사는 한 남성이 장남의 이름을 '아쿠마'로 지어 출생신고서를 내 논란이 된 사건이다. 아쿠마는 일본어로 악마를 뜻한다. 시청은 아쿠마라는 이름이 사회 통념상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출생신고서를 반려했다. 그러자 이 남성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며 시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큰 관심이 쏟아지자 재판 과정은 언론에 자주 보도됐다. 법원은 아이가 아쿠마라는 이름 때문에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며 "부모가 아이 이름을 지을 작명 권리가 남용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부모는 이에 "아이가 이름으로 크게 주목받게 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자극을 줄 것"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사회적 관심에 부담이 컸던 탓인지 부모는 이듬해 소송을 취하했다.

"한자 이름, 이 발음 맞나요?" 확인에 분주한 지자체

일본 법무성이 홈페이지에서 한자 이름 발음 등록이 의무화된 호적 예시를 알리고 있다. 지난 5월 26일부터 개정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한자 이름 발음 등록이 의무화됐다. 일본 법무성 홈페이지 캡처


정부는 아쿠마 소동이 재현될 것을 우려해 기라키라 이름에 대한 규제에 나섰다. 호적에 이름을 읽는 방법도 같이 등록하는 '개정 호적법'이 지난 5월 26일부터 시행됐다. 개정법 시행 전까지는 호적에 한자 이름만 등록하면 됐다. 정부는 읽는 방법까지 등록을 의무화한 건 행정 디지털화의 일환으로 이름 검색을 쉽게 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호적에 등록하기 전 한 번 더 고민하게 해 기라키라 이름을 줄이려는 의도도 담겼다.

출생신고서 제출 시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이름은 쓸 수 없다'는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이름만 쓰라는 규제로, 피카츄, 데토리, 아쿠마 등을 이름으로 쓸 수 없게 막은 것이다. 법무성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이름에 대해 △읽는 방법이 한자의 의미와 연관성이 없는 경우 △한자 뜻과 반대의 의미를 담은 이름 △차별적이거나 혐오감을 주는 이름 등을 기준으로 정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지난달 20일부터 주민들에게 이름 읽는 방법이 맞는지 확인하라는 내용의 엽서를 발송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는 상담 창구를 만들어 민원 대응에 나섰다. 엽서에 적힌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다를 경우 내년 5월까지 지자체에 신고해야 한다. 이 기간을 놓치면 행정상으로는 지자체가 엽서에 적어 보낸 이름으로 등록된다.

"부모·자녀 간 애정의 증표, 문제로만 볼 건 아냐"

일본 도쿄 신주쿠 구청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5월 26일부터 시행된 개정 호적법 주의사항을 알리고 있다. 신주쿠 구청 홈페이지 캡처


여론은 대체로 정부 규제에 찬성한다. 호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2023년 6월 법률 서비스 업체 변호사닷컴이 1,04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2.2%가 "기라키라 이름 규제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규제를 반다한다"는 의견은 6.7%에 그쳤다.

그러나 정부가 이름 짓는 방법까지 규정하는 건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국가가 원하는 이름을 지을 자유와 권리를 뺏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서다. 일각에선 지자체가 법무성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기라키라 이름 등록을 반려할 경우 소송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름 전문가인 고바야시 야스마사 교토분쿄대 교수는 NHK에 "기라키라 이름에는 자녀를 생각하는 부모의 애정이 담겨 있기에 자녀가 싫어한다고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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