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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산불 100일
[上 - 잔인한 재난의 상처]
의성·영덕·안동 여전히 멈춘 생계
농사도 어업도 복구는 기약 없어
갈등·불신에 마을 공동체도 해체
주민들 “이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서울경제] ※통계 작성 이래 최대 피해를 입힌 경북 산불이 29일로 발생 100일을 맞았다. 불타버린 집과 생활 터전 복구까지 적게는 수년에서 많게는 수십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여 이재민들의 고통이 여전하다. 서울경제신문은 경북 산불 발생 100일을 맞아 피해 복구 상황과 재난 대응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진단하는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지난 24일 의성군 점곡면 사촌1리에서 박기(69) 이장이 불타 철거된 자신의 집터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의성=황동건 기자

지난 24일 의성군 점곡면 사촌1리 한 사과농장이 잡초만 무성한 채 방치돼 있다. 의성=황동건 기자

지난 25일 영덕 노물리 마을회관 벽면에 산불로 그을린 흔적이 남겨져 있다. 영덕=황동건 기자

지난 25일 안동 찜닭골목이 한산하다. 안동=황동건 기자



24일 경북 의성군 사촌리 사과밭은 철대가 덩그러니 꼽힌 채 잡초만 무성했다. 둘레를 따라 자생적으로 자라난 나무에 파란 열매가 두어개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이 마을 주 수입원인 사과가 지금쯤이면 영글기 시작해야 하지만 농사는 완전히 포기 상태였다. 박기(69) 의성군 점곡면 사촌1리 이장은 “앞으로 3개월이면 사과를 따야 할 시기인데 산불로 창고까지 타면서 상자며 바구니가 수천 수만 개씩 날아갔다”며 “실질적으로는 삶이 그냥 다 무너져버린 셈”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국가와 지자체가 지원해준다는 농기계 구매는 액수가 턱없이 적은 데다 까다로운 절차에 공무원과 실랑이만 하다 단념했다. 그는 “지금 나무를 심어도 곧바로 사과가 열릴 리 없는데 2년 뒤에 일시 상환하라니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고 토로했다. 마을을 감싼 산줄기를 둘러봐도 타다 남은 나무가 삐죽삐죽 남아 있었을 뿐 송이버섯 밭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영남 일대를 덮친 ‘괴물 산불’로부터 벗어난 지 100일이 지났지만 지역 주민들의 생계는 여전히 잿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29일 국회입법조사처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등에 따르면 3월 21일부터 10일간 8개 시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사망자 31명을 포함해 187명의 인명 피해가 생겼다. 살아남은 이들도 터전을 송두리째 잃었다. 1만 7158대의 농기계가 소실됐고 재산 피해 규모는 1조 818억 원이었다. 피해 면적은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87년 이후 최대치인 약 10만 4000㏊였다. 소실된 주택과 시설물들에서 발생한 재난 폐기물만 해도 154만 톤에 이른다.

실제 농사 외에도 각종 생업이 정지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산지가 중심이었던 기존의 산불과 달리 민가와 조업 기반이 직접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촌이면서도 유례없는 산불 피해를 입은 영덕 노물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마을에서 배가 전소된 12명 중 외상으로라도 장비를 구한 이는 단 두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임시 주택에서 보상금만 소진하며 지내는 형편이다. 김재현(64) 영덕 노물리 이장은 “이런 식으로 조업을 못하면 보상금으로 받은 8000만원은 하루아침에 다 먹고 없어진다고 봐야 한다”면서 “배를 마련하려면 수억 원이 드는데 이 시골에서 그런 돈을 어떻게 구하겠냐”고 반문했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영덕 명물 산책로 ‘블루 로드’는 100일 째 입장이 정지됐다. 중장비가 들락거리며 불탄 주택들을 철거하는 통에 옆마을 해수욕장도 외부 발걸음이 끊겼다. 해안을 따라 자리잡아 생선회와 대게를 파는 식당가는 파리만 날렸다. 이제서야 회복세를 보이는 안동 관광상권도 두 달 넘게 침체를 겪어야 했다. 안동 택시기사 박 모(62) 씨는 “산불이 나고 한동안 시내에 연기가 가득 차 나다니지도 못할 정도였다”면서 “적어도 두 달 동안은 수입이 뚝 끊겼었다”고 말했다. 안동 찜닭골목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이 모(42) 씨는 “그나마 최근 들어 주말에는 관광객들이 좀 오기 시작한다”면서 “불이 하회마을에까지 번졌으면 지역 경제가 절단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거와 생계가 타고 남은 자리에는 갈등과 불신만 쌓였다. 끈끈했던 주민들의 관계는 보상금을 둘러싼 경계심이 갈라 놓았다. 영덕 주민 김 모(55) 씨는 “이전까지 화목했던 주민들이 보상금 때문에 서로 속내를 말하지 않게 됐다”면서 “결국 ‘니는 얼마 받았노’ 하고 경계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폐허가 된 집을 버리고 자식 집에 얹혀살거나 체육관과 모텔 등지를 전전하는 통에 해체된 마을도 상당수다. 이장들은 곳곳에서 주민 불만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한 마을에선 주민들 사이에 “지자체가 수차례 얘기해도 폐기물을 치워주지 않는다”며 “보상 문제를 제기하자 치졸하게 복수하는 것 아니냐”는 행정 불신마저 퍼지는 분위기다.

산불 피해가 점차 잊혀지면서 고립감을 느끼는 이들이 ‘이제는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지역별로 약 500명이 모여 꾸려진 경북산불피해주민대책위원회는 다음 달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집회를 앞두고 있다. 박 이장은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의무가 있지 않냐”며 “이제라도 제발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여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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