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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회차 공개: 박강수의 허언록]
신채호와 ‘역사를 잊은 민족’ 상(上)
2013년 5월18일 방영된 문화방송(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330회. 화면 갈무리

박강수의 허언록은?

곡해, 도용, 날조, 과장, 오역 등 비틀린 말의 사정을 추적하는 에세이입니다. 보통 ‘잘못 알려진 명언’을 검증하지만, 개중에는 ‘잘못 알려졌다고 잘못 알려진’ 이중 왜곡이나 도무지 기원을 찾을 수 없는 미제 사건도 적지 않습니다. 오해를 바로잡겠다는 마음보다는 오해의 경위를 들여다보는 일이 재밌어서 쓴다고, 박강수 한겨레 여론미디어부 기자는 말합니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박강수의 허언록(https://www.hani.co.kr/arti/SERIES/3312?h=s)을 구독해 흥미진진한 탐험에 동행해보세요.
문화방송(MBC) 티브이(TV)쇼 ‘무한도전’(2005∼2018)은 ‘유니버스’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방영 초기 슬랩스틱과 콩트 위주의 마이너한 코미디쇼인 줄로만 알았던 이 예능 프로그램은 회차를 거듭하며 소재와 표현의 스케일을 한계까지 밀어붙였고, 부단한 실험의 결과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코드로 자리매김했다. 달리 말해, ‘밈(meme)의 화수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방송 장면을 컷 단위로 해체하여 각자의 폴더에 수납해 두었던 팬들은 무한도전 종영 이후 세상이 시끄러워질 때마다 하나씩 꺼내 온갖 뉴스에 가져다 붙이기 시작했다. 종영된 프로그램의 유산을 추억하는 의식이자 작중 세계관을 제작진이 기획한 울타리 밖으로 확장하는 놀이였으니, 그 덕택에 무한도전은 마치 미래를 내다보고 계시(啓示)하기라도 한 듯, 컬트적인 예언서의 위상을 누리게 된다. 어떤 뉴스를 가져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한 장면을 기어코 발굴해내며 사람들은 말한다. ‘무도 유니버스에는 없는 게 없다.’ 세계는 무한도전이 점지한 대로 굴러가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무도 유니버스’는 없는 게 없는 수준을 초월하여 없던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그렇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이면 어딘가에서 조우하기 마련인 이 문장은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의 어록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언제 어디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단재가 남긴 대표적인 역사서 ‘독사신론’과 ‘조선상고사’에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각각 87번, 37번 등장하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글귀는 나오지 않는다. 신채호의 다른 저작도 마찬가지다.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최영)과 같은 영웅 전기, 각종 소설과 수필, 수십 편의 신문 사설 등등,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단재의 왕성한 집필력 뿐이다.

영미권에서는 ‘과거를 잊은 국가에 미래는 없다’는 닮은꼴 문장을 윈스턴 처칠의 것으로 인용하곤 하는데, 이쪽도 기록을 따져보면 사실무근이라고 한다. 그 밖에 생소한 이름들, 스페인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맥컬러프(과거를 잊은 국가는 기억을 잃은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이집트의 정치인 무함마드 후세인 헤이칼(과거가 없는 자는 미래도 없다) 등이 유사한 문장을 남겼다는 주장이 있지만 어느 한 사람을 원조라고 손들어 주긴 어렵다. 출처도 불분명하거니와 누가 누굴 베꼈다는 식의 유통 경로를 확정할 근거도 마뜩잖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5공화국 1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채문식 같은 인물도 후보군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는 1983년 9월20일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역사의 교훈을 배울 줄 아는 민족이라야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 법”이라고, 신채호는 물론 누구도 인용하지 않은 채 자신의 언어로 발화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대단히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고, 역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본 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문구를 고안하거나, 저작권 고민 없이 변용할 수 있는 글귀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말은 누가 뭐래도 신채호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 이야기의 핵심은 말이 만들어진 과정이 아니라 신채호의 것으로 와전된 경위에서 수습할 수 있을 듯하다.

2013년 7월28일 한국과 일본의 동아시안컵 3차전 경기가 열린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 붉은악마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문화방송 뉴스 영상 갈무리

관련하여 흥미로운 가설이 있다. ‘독군’(Dog君)이라는 이름의 한 블로거에 따르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신채호와 연결지은 최초의 사례는 다름 아닌 MBC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다. 무한도전은 2013년 5월11일(329회)과 18일(330회), 2주에 걸쳐 한국사 특집 방송을 했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역사 강사로부터 한국사 선행 학습을 받은 뒤 아이돌 게스트를 모셔놓고 직접 국사 강의를 하는 형식의 공익적이고 계몽적인 기획이었다. 제작진은 당시 방송분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를 ‘단재 신채호’라는 이름표와 함께 각 회차당 한 번씩, 도합 두 차례 자막으로 내보냈다. 이 자막 이전까진 저 말을 신채호의 것으로 소개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 블로거 독군의 주장이다.

간단한 검색 실험만으로도 이 가설은 상당 부분 검증된다. 문제의 무한도전 329회가 방영된 2013년 5월11일 앞뒤로 기간을 나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신채호’를 검색하면 네이버뉴스 기준 무한도전 방영 이전의 관련 보도는 단 2건(2004 2012)뿐이다. 그마저도 본문에서 ‘신채호’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각각 달리 언급되고 있을 뿐, 둘을 엮어 신채호의 명언이라고 소개하는 내용은 없다.

반면 무한도전 한국사 특집 직후 쏟아진 수백편의 리뷰 기사는 해당 문장을 한결같이 신채호의 말로 인용하였고, 이는 곧 한국인의 상식으로 굳어졌다. 무한도전 한국사 특집 방송 앞뒤로 열린 두 번의 남자축구 한·일전―2010년 10월12일 친선전과 2013년 7월28일 동아시안컵―은 그 변화상을 일별할 수 있는 표본이다. 두 경기 모두 한국 응원단은 스타디움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적힌 대형 걸개를 걸어 일본을 도발하였는데, 2010년 경기를 다룬 기사에서는 이 문구에 크게 주목하지도 않을뿐더러 신채호라는 이름도 나오지 않지만 2013년에는 당당하게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이라고 수식하는 기사가 한가득이다.

제작진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자막을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무한도전이 작자 미상의 격언에 단재의 이름을 달아 전 국민의 머리에 각인시키는 분기점 노릇을 했다는 정황은 분명해 보인다. ‘무도 유니버스’가 우리의 우주에 간섭하여 현실을 비틀어버린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로부터 3년여 뒤인 2016년 12월31일, 무한도전 제작진이 다시 한 번 한국사 특집 방송(513회 ‘위대한 유산’편)을 내보내면서 이번에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자막을 ‘처칠의 말’로 인용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신채호를 철회하고 처칠로 정정한 셈인데, 앞서 살펴봤듯 처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 역시 없다.

2016년 12월31일 방영된 ’무한도전’ 513회의 한 장면. 방송 화면 갈무리

이 모든 소동은 실제 하지도 않은 말을 단재의 어록으로 호도한다는 점에서 간단명료한 사실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속은 것이 아니고 국가적인 규모의 집단적 오해가 발생한 데는 다층적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표층만 보면 레퍼런스 검토에 소홀했던 무한도전 제작진과 검증 없이 받아쓰기 바빴던 기자들의 책임이지만, 심층에서는 ‘아 과연 신채호 선생이 했을 법한 말이다’라는 사람들의 무의식적이고 매끄러운 수용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사학자 이전에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가 한국사에 대해 말하면서 ‘민족’을 역사의 주어 자리에 놓는 일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을 털어놓자면, 그 역시 단재를 반만 아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박강수의 허언록

‘잘못 알려진 명언’의 말 못 한 사정을 아래 링크에서 읽어보세요.

▶‘정치에 무관심한 자는 결국 가장 무능하고 저질인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말의 맥락은?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02132.html?h=s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장소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진짜 단테가 이렇게 말했다고요?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99743.html?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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