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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11일 오전 경기도 양평 단월면 자택에서 이선재씨가 국방부 전사망민원조사단의 조사를 받던 중 생각에 잠겨 있다. 이씨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 '고(故) 이강종 이병'은 이른바 '강태무 월북 사건'에 휘말려 실종, 사망 처리됐다. 강정현 기자
1949년 5월 5일 강원 춘천지구에 주둔하던 육군 8연대 2대대 5·6·8중대에 38선 이북 고지 탈환 명령이 떨어졌다. 지시를 내린 인물은 대대장 강태무 소령. 그는 “연대 작전명령”이라며 “정면 공격이 아닌 38선을 월경해 후면으로 고지를 협공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날 오전 5시 공격이 개시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북한군은 기습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집중사격으로 대응했다. 더 이상한 건 맞서 싸워야 할 강 소령이 부대원들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창군 이래 초유의 군 집단 월북으로 기록된 이른바 ‘강태무 월북 사건’의 서막이다.

여기엔 ‘이강종 이병’도 있었다. 열 아홉살이던 48년 12월 31일 입대해 군 복무 4개월을 갓 넘긴 그의 생전 기록은 이날 이후 남아있는 게 없다. 돌도 안 된 아들을 남긴 채, 만 스무살 생일을 앞두고 이 이병은 사라졌다.



이 이병 흔적 찾기 나선 軍 “유족 민원이라면 모든 의문스러운 죽음 조사”
정병준의 저서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2006년, 돌베개)에 실린 '강태무·표무원 월북 사건'의 실제 부대원들 모습.
영문도 모르고 고지를 향한 이 이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국가가 처음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군 내 유일한 사망사고 재조사 기관인 국방부 조사본부 전사망민원조사단(민조단)이 정식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순직 또는 전사 판정을 받지 못하고 군복 차림으로 ‘일반 사망’ 판정 판단을 받은 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게 민조단의 임무다. 멀게는 창군 직후, 가깝게는 수 일 전까지 의문스러운 죽음이라는 유족의 민원이 들어오면 모두 조사 대상이다.

민조단이 이 이병의 자취를 살펴보게 된 것도 지난달 2일 아들 이선재(77)씨가 민조단을 찾았기 때문이다. 해당 건은 1998년 민조단 전신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이 구성된 뒤 강태무 사건 관련 첫 민원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더 있다가는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 면목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이제야 ‘마지막이다’ 하는 심정으로 이곳의 문을 두드렸어요”

지난 11일 경기 양평의 자택에서 만난 이씨는 76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며 민원을 접수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날 민조단 조사관 고병현 해군원사 등이 구체적인 진술을 확보하기 위해 직접 자택을 찾아 이씨를 만났다.

이씨는 “아버지가 북한군과 전투 중에 실종됐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전사’ 판정을 받을 수 있도록 재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강태무의 월북 계획에 휘말린 뒤 사라진 이 이병의 병적 자료에는 탈영해 병적부에서 삭제됐다는 ‘탈삭’ 기록이 낙인처럼 찍혀있다.

이씨가 아버지는 탈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근거는 고인이 된 어머니가 아버지의 전우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그는 “(아버지가) 대대장에게 이끌려 강제 월북하다 북한군과 교전에서 행방불명됐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아버지의 결백을 주장했다.



“아버지는 탈영하지 않았습니다”
2005년 김정일로부터 팔순 생일상을 받은 월북자 강태무씨. 조선중앙TV·연합뉴스
전언의 전언이었지만 민조단이 조사에 착수하기로 한 건 진술의 신빙성이 상당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씨가 말한 아버지의 전우는 ‘허00’로 병적자료 상 실존 인물이었다. 이 이병과 허씨는 같은 날 입대했다. 이 이병의 군번은 1804176, 허씨의 군번은 1804159. 군번 앞 번호가 ‘180’으로 동일하다는 건 동향을 뜻한다. 허씨가 이 이병과 마찬가지로 강원 홍천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가까웠던 전우에 대해 듣고 가족에게 전한 이야기는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고 민조단은 판단한 셈이다.

고 조사관은 “지방자치단체에 협조를 구해 제적등본 등을 떼어 보겠다”며 “고인이 된 허씨의 자녀 등 유족에게도 진술을 들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민조단은 이씨의 민원 접수 뒤 육군본부로 향해 사료를 파헤쳤다. 1970년 발간된 육군발전사에는 사건이 비교적 상세히 담겨있었다. 48년 여수·순천 사건 관련자인 강 소령과 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이 숙군(肅軍, 군 내 좌익 동조자 색출) 정국 하에 월북을 기도하면서 억울한 희생자들이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두 지휘관의 고지 탈환 계획이 기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가짜 작전’에 속았다고 깨달은 부대원 상당수가 투항을 거부하며 북한군과 교전했다고 사료는 서술했다. 2대대 8중대의 경우 중대장 김인식 중위의 결사적인 탈출 작전으로 전사 4명, 익사 3명 등 희생자 7명을 내고 전원 귀대했고, 5·6중대에서도 5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월북 주모자 기획에 수백 명 北으로

국방부 전사망민원조사단 고병현 조사관(오른쪽)이 11일 오전 경기도 양평 단월면 이선재씨의 자택에서 민원을 청취하고 아버지의 행적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사건의 파장은 컸다. 8연대장 김형일 중령은 같은 날 오전 6시 잔류 병력으로 북한군에 화기 공격을 퍼부었고, 여단 참모들은 총공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확전을 우려한 군 수뇌부가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후 지휘책임을 물어 당시 육군 총참모장(참모총장) 이응준 소장이 물러나고 채병덕 소장이 2대 총참모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6·25 전쟁 발발 전 38선 인근 평범한 국지전을 가장한 당시 사건으로 수백 명이 남쪽을 떠났다. 당시 미흡한 행정처리 탓에 정확한 인원 집계조차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만 사건 직후 신문기사를 보면 700~800명의 병력이 강태무의 기획에 동원됐고, 귀대한 인원은 3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최소 300~400여명은 월북했거나 전사 혹은 실종됐을 것으로 보인다.

해당 사건에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월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그동안 빛바랜 역사 중 하나로 방치된 이유 중 하나라는 시각이 군 안팎에서는 적지 않다. 국가 차원의 재조사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사실상 국가기관으로서는 민조단이 처음으로 사건의 진실을 일부나마 찾아 나선 셈이다.

특히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명령을 따라 38선을 넘은 병사들에 대한 관심은 인원 파악조차 어려울 만큼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태무가 북한에서 승진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팔순 생일상까지 받아먹으며 천수를 누린 것과 비교하면 이들은 ‘무명씨’나 다름없는 존재들로 소외되고 무시된 셈이다. 북한 관영 매체 조선중앙통신은 2007년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조선인민군 중장 강태무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해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그의 나이 82세였다.



현대사 한편 소외됐던 병사들 명예…뒤늦게라도 찾는다

11일 오전 경기도 양평 단월면 이선재씨가 자택에서 국방부 전사망민원조사단 고병현 조사관과 함께 아버지의 행적에 관한 병적기록부를 보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이 이병에 대한 재조사는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뜻하지 않게 사건에 휘말린 병사들의 명예 회복에 국가가 뒤늦게라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씨는 조사관을 만난 자리에서 연신 감사를 표했다. 1990년대 초부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군은 물론 청와대와 국회도 수없이 오갔다는 이씨는 “이제는 아버지에게 도리를 한 것 같다”며 “결과가 어찌 됐든 차분히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번번이 외면받던 외침이 어떤 식으로든 응답받는 것 자체가 이씨에겐 더없이 소중했던 셈이다.

민조단은 이씨에게 남은 재조사 일정을 마친 뒤 성실히 결과를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에 재심사를 요청할 것을 당부했다. 해당 위원회는 민조단의 재조사 결과를 토대로 최종 순직 또는 전사 판정을 내린다. 민조단 관계자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피할 수 없었던 가족의 비극에 아픔을 함께 느낀다”며 “우리의 활동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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