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 사당 건축물로 추정되는 ‘관월당’이 일본으로 반출된 지 약 100년 만에 국내로 돌아왔다. 관월당은 일본의 유명 사찰 고토쿠인(高德院·고덕원)에서 기도처로 활용돼 왔다. [사진 국가유산청]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조선시대 사당 건축물 ‘관월당’이 일본으로 반출된 지 약 100년 만에 약 5000점의 부재(部材, 구조물의 주요 재료)로 나뉘어 국내로 돌아왔다. 맞배 기와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약 54㎡)의 이 단층(높이 5.1m) 목조건물은 일본 가마쿠라의 유명 사찰인 고토쿠인(高德院·고덕원)에서 국보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 뒤쪽에 가려져 있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반환 문제를 놓고 굴곡을 겪다 한·일 수교 60주년을 맞은 올해 결실을 맺었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24일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공개회를 열고 전날 고토쿠인의 사토 다카오(佐藤孝雄·62) 주지와의 약정을 통해 관월당 부재를 정식으로 양도받았다고 밝혔다. 1924년 조선식산은행이 일본의 기업가 스기노 기세이(杉野喜精·1870~1939, 훗날 야마이치증권 초대 사장)에게 건물을 증여한 지 101년 만이다. 당시 식산은행은 이 건물을 빚 담보물로 갖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6월 해체작업이 시작된 모습. [사진 국가유산청]
스기노는 이를 도쿄 메구로(目黑) 자택으로 가져갔다가 신병 치료차 방문한 고토쿠인에 기증했다(1934~36년 추정). 고토쿠인은 이를 기도처로 활용했다. 관월당은 1990년대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에 의해 존재가 알려지면서 반환 논의가 일었고, 2010년 반환 직전까지 갔지만 한·일 관계 교착, 코로나19 등으로 미뤄졌다. 지난해 6월 관련 협약이 체결되면서 극비리에 해체작업이 시작됐다. 그해 11월 기와·석재를 시작으로 지난 5월 목재까지 순차적으로 국내에 반입된 총 4982점의 부재들은 현재 경기도 파주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해외로 반출된 건축유산이 건물 통째로 돌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높이 11.3m에 달하는 일본 국보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 관월당은 이 불상 뒤쪽에 가려져 있었다. [중앙포토]
이 과정에서 사토 주지는 건물을 해체하고 부재를 옮기는 비용까지 자비 부담하는 등 사실상 ‘조건 없는 기증’을 했다. 이날 언론간담회에 참석한 사토 주지는 “2002년 주지 취임 때부터 한국에서 온 문화유산이니 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게이오대 민족학고고학 교수이기도 한 그는 “문화유산의 가치는 역사적 맥락을 뗄 수 없고, 고인을 기리는 건물이니 가까운(의미에 맞는) 곳으로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기증 배경을 말했다. 나아가 한·일 간 문화유산 연구와 학생 교류를 위한 별도 기금을 1억 엔(약 10억원)가량 마련해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에 기부하겠다고도 했다.
고토쿠인 사찰 사토 다카오 주지. [사진 국가유산청]
어렵사리 돌아오긴 했지만 ‘관월당 미스터리’는 계속된다. 일단 일본에서 불려온 이름인 관월당이 애초 명칭이 아니고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한동안 학계에선 경복궁 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날 간담회에서 이경아(건축학) 서울대 교수는 “북궐도형·동궐도 등 문헌으로 볼 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대군(大君)급 왕실 사당으로 추정했다.
화려한 단청도 주목할 요소다. 손현숙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전문위원은 “1834년 중건된 창덕궁 통명전과 유사하면서도 19세기 후반 왕실 단청의 특징까지 갖고 있다”면서 “단청 양식 연구를 위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봤다.
관월당을 언제 어디에 복원할지는 논란이 될 전망이다. 이경아 교수가 지목한 원 소재지 후보는 송현동 부지와 통의동 일대 창의궁 터, 월성위궁 터 등 3곳이다. 이 가운데 송현동 부지는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본가 터로, 당시 ‘채무왕’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순종의 장인 윤택영이 관월당 건물을 담보로 잡혔을 거란 추정이 가능하다. 국가유산청 박형빈 국외유산협력과장은 “원 소재지 확인이 안 될 경우 귀환 유산으로서 임시로 이건(건축물을 옮김)하는 것도 고려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