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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그러다 갑자기(gradually and then suddenly)’라는 말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26년 발표한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The Sun Also Rises)’에서 마이크 캠밸이 파산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개인은 물론 기업이나 국가도 어느 날 갑자기 멸망한 경우는 없다. 온갖 문제들이 쌓이며 곪다가 멸망에 이르렀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1997년 외환위기도 그랬다. 당시 기업들은 부채 위에 성을 쌓았다. 겉은 화려했지만 사상누각이었다. 30대 기업집단의 부채비율은 1997년 말 518%에 달했다. 총자산에서 자기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16.2%에 불과했다.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대우, 쌍용, 동아, 진로 등 30대 기업중 11개 그룹이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외환위기가 닥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발생했다. 그해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는 표면화됐다. 하지만 미국 부동산 버블과 서브프라임모기지 확대, 금융회사들의 부채담보부증권(CDO) 남발로 위기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끓어 오르고 있었다.

국가나 정권도 마찬가지다.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제국이나 조선왕조, 소비에트연방은 말할 것도 없다. 2024년 12월 반세기 만에 갑작스럽게 붕괴한 시리아의 알아사드 체제도 13년간 지속된 내전의 결과였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에 속수무책일 정도로 허약해진 것도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다. 일방통행식 통치에 따른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계엄이라는 이벤트를 거쳐 갑작스러운 파국을 맞았다.

비단 멸망할 때만이 아니다. 흥할 때도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는 통용된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인이 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갑툭튀’는 없다. 연예인이고 운동선수고 기업이고 수많은 실패를 거친 뒤에 유명세를 탄다. 그 과정을 모르는 대중에겐 갑툭튀로 비칠 뿐이다.

K푸드 돌풍을 이끄는 삼양라면의 불닭볶음면은 13년 전인 2012년에 출시됐다. 서서히 인기몰이를 하다가 히트작으로 우뚝 섰다. AI(인공지능) 시대 최강자인 엔비디아가 세계 최초로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개발한 것은 1999년이었다. 테슬라도 2008년 로드스터라는 전기차를 처음 내놓은 뒤 실패를 반복하면서 ‘테슬라 모멘트(Tesla Moment)’를 만들어냈다. 2016년 이세돌을 이겨 세계를 놀라게 한 알파고가 탄생하기까지는 역전파 알고리즘(1986년)이나 IBM의 딥블루(1997년)가 있었다.

중국의 기술력이 미국과 맞짱 뜰 정도로 발전한 요인으로 지목되는 ‘중국제조 2025’는 2015년에,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한 ‘천인계획’은 2008년에 이미 시작됐다. 기술 발전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축적이라는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옥수수가 서서히 익어가다가 갑자기 팝콘으로 터지듯이 말이다.

우리 경제를 두고 우려가 많다. 올 성장률이 0%대로 전망된다니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은 갑자기 조성된 게 아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말을 빌리면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신성장동력을 키우지도 않은 채 기존 산업에 의존한 결과”다.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서서히 저성장체제에 진입했다는 의미다.

지금이라도 경제체질을 바꾸기 시작하면 저성장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대로 지금 상황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위기가 확 닥칠지도 모른다. 지금이 기로다.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책임도 그만큼 막중하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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