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오랫동안 미국을 이란 공격에 끌어들이려 했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숙원이 드디어 이뤄지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결국 이란의 핵 시설을 직접 폭격한 것이다. 이번 사태의 유일한 승자는 네타냐후 총리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체스 게임의 달인을 뜻하는 ‘그랜드 마스터’란 별명을 가진 네타냐후 총리는 어떻게 이란 핵 협상의 판을 깨고 자칭 ‘딜 메이커’ 트럼프 대통령을 구워삶아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을까.
인내심이 없고 본능에 의존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네타냐후 총리는 특수부대 출신 특유의 인내와 끈기로 훈련돼 있다고 폴리티코 유로판은 분석한 바 있다. 네타냐후 총리의 보좌관이었던 나다브 슈트라우클러는 “네타냐후에게 가자지구와 헤즈볼라는 이란과의 대규모 대결을 위한 디딤돌이었다”고 폴리티코에 말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가자 전쟁 바로 첫 주에 레바논을 치고 싶어했지만, 충동을 억누르고 끈질긴 전략 하에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세계 평화의 조정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네타냐후 총리를 경계해 왔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 측근에게 “네타냐후가 나를 중동의 또 다른 전쟁에 끌어들이려 한다”며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지난 2월 백악관을 방문한 네타냐후가 취임 선물로 레바논 ‘삐삐 테러’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황금색 호출기를 선물했을 때는 불쾌감까지 토로했다는 후문이 있다.
지난 21월 백악관을 방문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취임 선물로 준 황금 호출기. 이스라엘 공보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네타냐후가 정성스레 직접 프리젠테이션한 이란 공격 계획을 일축하고, 4월 9일 또다시 백악관을 찾은 네타냐후가 벙커버스터 지원을 요청했을 때도 이를 거절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2일 미국은 이란과 핵 협상을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협상이 이란을 방심하게 만들려는 기만전술이었다는 분석을 내놓지만 그건 넌센스”라면서 “트럼프는 (그때만 해도) 정말 협상에 진지했다”고 지적했다.
분위기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5월13일 중동 순방 중이었던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는 핵 공격 위협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 이란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였다. 당시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로이터통신이 인용한 두 미국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그 무렵 미국은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과, 이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때부터 미 국방부는 이스라엘이 실제 이란 공격에 나설 경우를 대비해 비상 계획 수립에 돌입했고, 우크라이나에 배치됐거나 배치될 예정이었던 수천개의 무기가 중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012년 유엔 총회에서 이란의 핵무장 위험을 경고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6월8일 존 랫클리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부터 “미국이 지원하든 하지 않든, 이스라엘이 ‘단독 공격’에 나설 것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9일 네타냐후 총리와 직접 통화했다. 이때 네타냐후 총리는 단호하게 “우리의 임무는 실행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전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을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사적인 불신과는 별개로, 미국이 결국 이스라엘을 저버리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아무런 약속도 해주지 않았지만, 통화를 끊고 난 후 “아무래도 우리가 도와줘야 할 것 같다”고 측근들에게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날은 트럼프 대통령이 애초 이란과의 협상 데드라인으로 정했던 60일이 되기 딱 하루 전이었다. 사실 버락 오바마 전 정권에서도 몇 년에 걸쳐 진행된 핵 협상을 60일만에 끝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만, 끈기가 없는 트럼프 대통령은 외교적 교착 상태를 인내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 후에도 “나는 비비(네타냐후 총리의 애칭)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계속 의문을 제기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실제 지난 12일 이스라엘의 공격이 단행된 후 미국의 첫 반응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으로부터 나왔다.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언급이 빠져 있는 등 이스라엘의 군사작전과 거리를 두려는 듯한 뉘앙스였다.
지난 13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란 군 고위 인사 표적 암살 등 정밀 공격이 성공하자, 트럼프 대통령의 어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폭스뉴스는 다음 날 아침부터 이스라엘의 군사적 천재성에 찬사를 보내는 보도를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자기 공을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에 더 많이 이면 개입을 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는 ‘승자’를 좋아하고, 늘 ‘승자’의 편에 서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이 공습을 멈추면 미국과의 핵 협상 테이블에 복귀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이스라엘에 공습 중단을 촉구할 생각이 없다고 일축했다. “누군가 이기고 있다면, 지고 있을 때보다 그렇게 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국의 B-2 스텔스 폭격기. 지하 80~100미터 깊이에 묻힌 이란의 포르도 핵시설을 폭파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벙커버스터를 실어나를 수 있는 유일한 전투기이다. 로이터연합뉴스
결국 네타냐후 총리의 유도에 넘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게 된 트럼프 대통령은 21일 이란 핵 시설 세 곳을 직접 폭격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취임 후 불과 5개월여 만에 자신이 ‘전쟁광’이라며 그토록 경멸해 온 정치인들의 전철을 밟고 ‘중동의 수렁’으로 또다시 끌려들어 가게 된 것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즉시 트럼프 대통령의 “담대한 결단”에 찬사를 보냈고, 트럼프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네타냐후 총리에게 축하와 감사를 전한다”고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