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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모의 미락(美樂)클
파리 오케스트라와 만난 임윤찬의 손끝
엄숙함 벗어던진 메켈레의 ‘다이얼 지휘’
감동적인 공연, 모두 누릴 기회 늘어나길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가 이끄는 파리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임윤찬(오른쪽)의 지난해 미국 보스턴 협연 장면. 이들은 지난 6월1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협연했다. © 로버트 토레스(Robert Torres)

지난 저녁, 클라우스 메켈레가 지휘하는 임윤찬과 파리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관람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선보였어요. 저는 임윤찬의 오른편 볼 땀구멍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수도 없이 공연장에 다녔지만, 2500명의 관객이 온 힘을 다해 임윤찬의 머리카락 끝과 손가락에 시선을 집중하는 이런 몰입도 높은 공연은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습니다. 한달 전, 임윤찬의 뉴욕 카네기홀 공연에서 경험한 관객의 함성과 열기가 함께 떠올랐어요.

파리 오케스트라는 단원과 사무국의 까다로운 입김 때문에, 내로라하는 지휘자들도 못 버티고 떠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이날 무대 위 메켈레와 파리 오케스트라는 ‘신혼의 단꿈’에 젖은 행복한 커플 같았어요. 메켈레는 평소의 엄숙함을 벗어던지고, 무릎을 굽혀 스쾃 하듯 지휘하는 모습이 마치 프랑스 발레를 보는 듯했죠. 특히 메켈레와 파리 오케스트라는 볼륨 조절에 있어 합이 잘 맞았는데, 마치 볼륨 다이얼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소리가 커지고, 왼쪽으로 돌리면 작아지듯, 작은 손짓만으로도 오케스트라의 음량이 자유자재로 조절됐습니다. 그의 ‘다이얼 지휘’에 단원들은 웃으며 화답하곤 했는데, 여타 엄숙한 독일 관현악단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었습니다.

그의 다이얼 지휘는 임윤찬과도 절묘하게 어우러졌는데, 메켈레와 임윤찬, 파리 오케스트라의 즐거운 놀이 한마당을 보는 듯했습니다.

임윤찬의 연주는 실연(라이브)에서 가장 빛을 발합니다. 그의 라이브 연주가 100이라면, 음반으로는 70, 유튜브 동영상으로는 60 정도만 전해지는 것 같아요. 격차가 크죠. 그만큼 그의 실연에는 특별한 마력이 있습니다. 결국 그의 연주를 본 관객은 계속해서 실연을 보려 할 것이고, 그가 무대에 오를수록 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피케팅의 피케팅이 계속될 거예요.

또 하나의 기현상. 임윤찬은 음악평론가를 머쓱하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공연 후기는 첫 문장만으로도 평론가의 글인지, 애호가의 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윤찬의 연주를 직접 본 청중 후기는 굉장한 필력이 특징입니다. 자고로 평론은 문학적인 맛이 더해져야 하는 법. 애호가들이 남긴 임윤찬의 공연 후기는 그간 내가 못 보던 표현과 비유가 넘쳐납니다. 그러니까 그의 연주는 평소 일기도 잘 쓰지 않는 우리의 작문 실력까지 끌어올립니다.

임윤찬의 관객은 프로그램을 음대생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비교 음반을 들어보고 관련 책을 읽을 뿐 아니라, 관련 강연을 들으러 다닙니다.

이번 공연을 위해 저도 프리뷰 강연을 했었어요.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4번은 15년에 걸친 수정 작업 끝에, 세 종류의 악보가 나와 있습니다. 곡 설명에는 몇 개의 마디가 최종적으로 잘려 나가고, 연주 시간이 원곡보다 4분이 짧아졌노라 쓰여 있어요. 저는 세가지 악보를 들여다보며, 라흐마니노프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고수해온 자신만의 스타일이 시대적으로 낡았음을 인정하고 불안해했어요. 미국에서 번성한 재즈는 유럽을 강타했고, 파리의 뮤직홀에서는 래그타임이 대유행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지만, 스위스의 별장을 너무나 좋아해 그는 주로 그곳에 머물렀고, 연주할 때만 해외로 이동했습니다. 대신 딸을 만나기 위해 파리에 자주 방문해, 파리와 유럽의 트렌드를 잘 알고 있었죠.

러시아계 미국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위키미디어 코먼스

4번 협주곡에 대한 열망은 이미 1917년 혁명 전 러시아에서부터 있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막상 곡을 써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25년 뉴욕에서 열린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초연 때 객석에 앉아 있던 그는 열광하는 청중들 사이에서 자신의 음악이 재즈의 칼에 맞을 단두대 앞에 있음을 실감했어요. 그에게는 자신의 음악에 재즈의 요소를 적절히 섞는 일이 숙제였습니다. 전통과 혁신의 타협. 물러남과 도전의 시간. 그런데 1926년에 발표한 4번 협주곡은 미국 필라델피아 초연뿐 아니라 유럽 무대에서도 호되게 얻어맞습니다.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라흐마니노프의 과욕이 부른 참사였죠. 그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연주가 아무리 좋았던들, 관객은 그토록 길고 산만한 곡을 견디질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곡을 축소하는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어요.

수정된 악보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마디를 잘라냈을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역할을 편집해 오케스트라에 내주며, 피아니스트의 과시적인 제스처를 약하게 하는 동시에 곡을 간결하게 만들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가도 문장을 줄이고 고치는 것이 고통이거늘, 작곡가도 마찬가지예요. 그의 고뇌는 이렇듯 원곡과 개정판의 비교에서 더욱 다가옵니다. 임윤찬은 이번 공연에서 1941년 최종판을 연주했지만, 그도 분명 원곡을 공부했던 것 같아요. 임윤찬의 연주에서 나는 라흐마니노프의 크나큰 고통과 좌절을 전해 받았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에서 한 여사님이 다가오더니, 제게 임윤찬이 그려진 손수건을 주셨습니다. 그 손수건에는 먹으로 쓴 붓글씨가 눈에 띄었어요. “Only For Yunchan Lim with Everyone”(온리 포 윤찬 림 위드 에브리원). 마치 배너 같기도 했습니다. 그 글귀 중 “with Everyone”에서 그의 음악을 소유하기보다, 모두와 나누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의 연주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분들, 예술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누군가는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올봄, 임윤찬은 고양시에서 3일간 ‘많이 열려 있는’ 공연을 한 바 있어요. 모두가 나누는 예술, “with Everyone”이 더 많이, 더 자주 실현되길 바라봅니다.


안인모 피아니스트

같이 들을 클래식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 전악장 –라흐마니노프 연주 (1941년 초연)

https://youtu.be/LZBYpRhSews?si=QY7ZEVE2gzbEfckC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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