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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호연



내가 여름을 체감하는 것은 참외나 수박을 먹을 때보다 집에 들어와 씻는 것을 더 이상 미루지 않을 때다. 다른 계절에는 공동주택에서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마지노선(밤 11시)에 이르러 꾸역꾸역 씻을 준비를 하는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도 씻는다. 평소 무관심하던 샤워기 헤드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보통 이 즈음이다.

우리 집 샤워기 헤드는 손잡이 부분에서 물이 샌다. 수도에서 물이 샐 경우, 나사 부분에 테프론 테이프를 감거나 결합 부위의 고무 패킹을 갈아주면 대체로 해결이 된다. 그런데 우리 집 샤워기 헤드는 같은 방식으로 고칠 수 없다. 호스 연결 부위가 아니라 본체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언젠가 샤워기 필터를 갈면서 너무 세게 잠근 결과다. 필터 샤워기는 다른 샤워기에 비해 내구성이 약하고, 필터 교체 때문에 자주 여닫으면서 플라스틱 소재의 나사가 빠르게 마모된다.

물은 어떻게든 길을 찾아낸다. 테프론 테이프를 감고, 글루건으로 풀을 녹여 연결 부위에 덕지덕지 발라도, 바늘구멍만 한 틈을 비집고 나와 물줄기를 이룬다. 샤워하는 동안에는 원치 않는 방향으로 새는 물을 못마땅히 바라보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 굳은 풀 위에 다시 풀을 쏠 때마다 샤워기 헤드는 점점 본모습을 잃어간다. 어떤 수리는 못생기고 너저분하다. 궁상맞음을 넘어 처절하다. 왜 이렇게까지 할까? 수리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다들 비슷한 증세를 겪는다. 수리 경험이 쌓일수록 ‘못생김’을 견디는 능력도 함께 발달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흉해도 자기 손으로 고친 것이면 귀여워 보이는 마법이 작용한다. 수리하는 동안 물건과 나 사이에는 크고 작은 서사가 쌓이고, 그런 물건은 아무리 낡아도 쉽게 버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워기 헤드와 헤어질 결심을 한 것은, 새는 물줄기가 귀여운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인구 중 40%는 물 부족을 겪고 있다. 우연히 ‘물 좋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잠들기 전 샤워가 당연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에 가끔은 부채감이 든다. 흘린 땀을 빠르게 씻지 않으면 염증이 생기는 민감한 피부도, 어쩌면 그렇게 길들여진 것일까? 전 세계에 수돗물을 음용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마실 수 있는 물로 몸을 씻으면서, 유행에 휩쓸려 필터 샤워기를 샀던 과거를 반성한다. 다음 샤워기는 튼튼한 스테인리스 제품을 고를 생각이다. 아울러 평균 10분이었던 샤워 시간도 대폭 줄여보려고 한다. 2020년 기준 한국은 가정에서 매일 1인당 192ℓ가량의 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위인 일본(237ℓ)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가운데 2위를 차지했다. 독일(120ℓ), 덴마크(113ℓ)와 비교하면 1인당 1.6배나 많은 물을 쓰는 것이다. 하루에 고작 물 1ℓ 마시기를 목표로 하면서, 192ℓ나 생활하수로 사용하고 있다니. 그 압도적인 수치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샤워기 헤드를 분리하면서, 더는 수리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대신 떠나보내기 전에 기록하려고 사진을 찍었다. 이 못생기고 너저분한 수리의 흔적은 아무래도 너무 귀엽기 때문이다.


▲모호연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 일상 속 자원순환의 방법을 연구하며, 우산수리팀 ‘호우호우’에서 우산을 고친다. 책 <반려물건> <반려공구>를 썼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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