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번호판·북한강 유기 치밀한 증거 인멸 시도
112 신고 취소, 사칭 문자까지… 범행 적극 은폐
"우발 주장하지만 반성 없어" 1심 무기징역 선고
112 신고 취소, 사칭 문자까지… 범행 적극 은폐
"우발 주장하지만 반성 없어" 1심 무기징역 선고
수갑, 범죄, 범인. 게티이미지뱅크
지난해 11월 2일 오후 2시 46분쯤 강원 화천군 화천읍 화천대교 하류 300m 지점 북한강에 의문의 형체가 떠올랐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확인해보니 시신 일부로 드러났다.
경찰은 즉시 강 주변으로 수중 수색을 확대했고, 이튿날 오후까지 신고 지점에서 약 600m 떨어진 붕어섬 선착장 인근 강바닥에서 비닐 자루 8개를 추가로 발견했다. 자루 안에는 조각난 나머지 신체 부위들이 들어 있었다. 발견된 시신 조각들은 크게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시신의 훼손 정도와 정교한 은폐 수법을 본 경찰은 단순 실종이 아닌 계획적 살인임을 직감했다. 곧바로 지문과 유전자(DNA) 분석을 통해 피해자 신원을 특정했다. 이어 피해자 휴대폰 통화 기록과 폐쇄회로(CC)TV 영상, 가족·주변인 탐문 조사에 착수하며 수사에 속도를 냈다. 경찰은 시신이 발견된 지 약 28시간 26분 만인 11월 3일 오후 7시 12분쯤 서울 강남구 일원역 지하도에서 용의자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붙잡힌 인물은 중령 진급을 앞두고 있던 육군 장교 양광준(39).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체포됐고, 곧바로 자신의 혐의를 시인했다. 작년 말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화천군 북한강 토막 살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폭로 협박에 살해
20일 한국일보가 확인한 양씨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사건이 벌어진 날은 피해자 시신이 발견되기 8일 전인 지난해 10월 25일이었다. 오후 3시쯤 양씨와 피해자 A씨는 경기 과천시 한 부대 주차장에 세워진 양씨의 차량 안에 함께 있었다. 양씨는 과천 국군사이버작전사령부 소속 중령 진급 예정자였고, A씨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임기제 군무원이었다. 양씨는 두 아이를 둔 유부남이었고 A씨는 미혼인 상태였는데 두 사람은 그해 초부터 만남을 이어온 내연 관계였다.
양씨와 A씨는 작년 6월부터 사이가 틀어졌다. A씨가 반복적으로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하면서 말다툼이 잦아졌고, 갈등도 깊어졌다. 사건 당일에도 두 사람은 출근길에 카풀을 하며 언쟁을 벌였다. 이에 양씨는 더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살해를 결심했다. 양씨는 사흘 뒤면 서울 송파구 산하 부대로 전출을 갈 예정이라 이날이 마지막 출근이었다. A씨 역시 같은 달 말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근무 중 잠시 시간을 내 차량에 머물던 양씨와 A씨는 음악을 틀어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A씨가 다시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압박감을 느낀 양씨는 조수석에 앉은 A씨에게 입을 맞춰 주의를 돌린 뒤 뒷좌석 바닥에 미리 준비해 둔 노트북 도난 방지용 고정줄을 이용해 A씨를 질식시켰다.
범행 후 양씨는 부대 내 사무실과 자재실 등을 돌아다니며 시신을 훼손할 도구와 대형 비닐봉투 등을 챙겼다. 이후 오후 7시 17분쯤 부대에서 약 250m 떨어진 공사장으로 A씨 시신이 있는 차량을 옮겨 주차한 뒤, 시신을 인근 공터로 끌고 가 미리 준비해 둔 도구를 이용해 자정 넘는 시간까지 혈흔이나 흔적이 남지 않도록 훼손했다.
치밀했던 은폐 시도
훼손된 시신이 발견된 강원 화천군 북한강에서 경찰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유튜브 YTN 채널 캡처
이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산 건 범행 후 양씨가 치밀하게 흔적을 감추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A씨 사망 사실을 감추기 위한 조작에 나섰다. 먼저 A씨 사무실에 들어가 물건을 챙긴 뒤, A씨의 출입증을 직접 태그해 퇴근 기록을 위조했다. 또 A씨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를 '잠수'로 바꾸고,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가 해제하는 작업을 반복하며 생활 반응이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A씨 어머니에게는 "당분간 집에 못 간다"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 관악구에 거주하던 A씨 어머니는 이튿날 오전 8시 40분쯤 딸의 행방을 걱정해 112에 미귀가 신고를 했다. 이후 양씨는 경찰까지 속이려 했다. 경찰이 A씨의 휴대폰으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고 보이스톡을 걸어도 받지 않던 양씨는 낮 12시 40분쯤 관악경찰서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A씨인 척 여자 목소리를 흉내 냈고 A씨 개인정보까지 말했다. 또 이어 112에 직접 전화해 "고속도로라 연락이 어렵다. 신고를 취소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시신 유기 과정에서는 가짜 번호판까지 동원했다. 같은 날 오전 10시 29분쯤 양씨는 미리 준비한 A4 용지 두 장을 이어붙여 자동차 번호판 크기로 만든 뒤 검은색 매직펜으로 가짜 번호를 적어 넣었다. 이후 접착테이프를 이용해 이를 차량 전면 번호판 위에 덧붙였다. 그는 과천시를 출발해 서울 서초구·강남구, 경기 구리시, 가평군, 강원 춘천시, 화천군 등을 지났다. 시신과 범행 도구를 8개의 봉투에 나눠 담은 뒤 북한강에 유기했다. 물에 뜨지 않도록 봉투엔 돌을 넣었다. 화천은 그가 10여 년 군 생활을 해 익숙한 장소였다.
범행 이틀 뒤인 10월 27일 양씨는 A씨 결근이 의심받을까 봐 피해자 휴대폰으로 부대 측에 '휴가 처리해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의 촘촘한 수사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잔혹성·도주 우려"… 구속·신상정보 공개
함께 근무하던 여성 군무원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강원 화천군 북한강에 유기한 혐의를 받는 전직 육군 장교 양광준(39)이 지난해 11월 4일 강원경찰청으로 이송되고 있다. 춘천=뉴스1
양씨는 체포 이틀 만인 지난해 11월 5일 구속됐고 이틀 뒤 강원경찰청은 신상정보 공개 심의위원회를 열어 양씨의 이름, 사진, 나이 등을 공개하기로 의결했다. 수사기관·법조계 전문가 등 7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는 △잔인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볼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고 △국민의 알 권리 △범죄 예방 등 공익적 요건을 충족한다고 판단했다.
양씨는 다음 날 신상정보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본안 소송을 제기했지만, 춘천지법은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 발생의 우려가 없고,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 발생 예방을 위한 긴급한 필요가 없다"며 기각했다. 같은 달 13일, 강원경찰청은 양씨의 머그샷 3장을 온라인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양씨는 머그샷 공개 하루 전인 11월 12일 살인·시체손괴·시체유기 혐의로 검찰에 넘겨졌고 같은 달 28일 자동차관리법위반(가짜 번호판 부착) 혐의까지 더해져 구속기소됐다.
재판부 계획범행 인정
춘천지방법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춘천지법 형사2부(부장 김성래)는 올해 3월 20일, 양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양씨 측은 범행이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피해자의 주의를 분산시킨 틈을 노려 살해한 점 △사무실로 돌아가 피해자가 퇴근한 것처럼 위장한 점 △피해자 휴대폰을 조작해 생활반응을 가장한 점 등을 근거로 계획범행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살인죄는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는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로 (피고인의) 범행 동기, 방법 및 내용 등을 보면 죄책이 매우 중하여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더욱이 피해자를 살해한 뒤 생활반응을 가장하고 모친에게 사칭 메시지를 보내는 등 범행 후 정황도 매우 좋지 않고 시체 손괴와 은닉 과정 역시 잔혹해 피해자의 인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찾아볼 수 없다"고 질타했다.
이어 "피고인은 잘못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죄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느낀 심적 부담과 괴로움을 토로하며 범행이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피고인이 범행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지 의문이 들고,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참회하고 피해자와 유족에게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중형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현재 양씨의 항소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이 사건 이후 양씨는 군 당국으로부터 '파면' 징계처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