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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에 지역화폐 결제 관련 스티커가 부착돼 있다. 권도현 기자


[주간경향]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모아놓은 돈을 다 까먹었어요. 인건비를 못 댈 정도였으니까요. 코로나19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장사 시작한 지 10년 넘었는데, 이렇게 안 된 적은 처음입니다.” 인천에서 치킨 가게를 운영하는 강성모씨는 최근 자영업자가 체감하는 경기 불황에 대해 이처럼 토로했다.

강씨의 한숨은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관련 통계도 이러한 현실을 뒷받침한다. 전국 각지의 자영업자 폐업률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일시적 불황이 아닌 구조적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도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내 주요 시중은행의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은 0.67%에 달하며 자영업자의 자금 조달 환경이 한계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방증한다.

■벼랑 끝 민생경제, 정부의 해법은 ‘지역화폐’

정부는 벼랑 끝에 몰린 민생경제의 돌파구로 지역화폐를 전면에 내세웠다. 정부는 6월 19일 국무회의에서 전 국민에게 15만원+α의 민생회복지원금을 차등 지급하고, 해당 금액을 지역화폐, 신용·체크카드, 선불카드 중에 개인이 선택한 방식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의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심의했다.

지원금은 어떤 방식으로 지급되든 소상공인 가맹점에서만 쓸 수 있는 지역화폐와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사용처에 제한을 둘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지급된 재난지원금처럼 유흥업 등 일부 업종과 대형마트에서의 사용을 제한해 재정이 골목 상권으로 흘러가도록 하겠다는 의도이다. 소비진작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사용기간도 4개월 정도로 제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2차 추경의 또 다른 핵심은 6000억원 규모의 지역화폐 발행 지원 예산이다. 지역화폐는 발행 시 발생하는 재정 부담을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일정 비율로 매칭해 분담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해당 예산은 지역화폐를 5~1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할 때 발생하는 할인 차액을 보전하거나 운영 시스템 유지비나 가맹점 결제망 구축 등 기술적 인프라 지원에도 활용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대폭 삭감됐던 해당 예산은 이번 추경에서 증액되며 사실상 복원됐다. 지역화폐 할인율도 초대 15%까지 늘렸다.

■“어항 속 물고기처럼 돈을 가둬야”

정부의 정책에 소상공인들은 침체한 골목 상권에 단비가 될 수 있다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국신용데이터(KCD)가 6월 8일 소상공인 19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5%가 새 정부의 지역화폐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고 응답했다. 지주현 인천소상공인연합회 사무처장은 “지역화폐는 어항에 갇힌 물고기가 밖으로 나갈 수 없듯, 지역 내에서 돈이 순환하는 구조를 만든다.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돌며 선순환의 흐름을 만든다”라며 “생활 수준이 밑바닥인 다수의 소상공인들 생활이 어느 정도라도 회복되기 위해서는 지역화폐 정책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기대가 단순한 희망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충남 부여군은 정부의 지원을 기반으로 지역 여건에 맞춘 정교한 지역화폐 설계를 통해 재사용률이 높은 성공 사례를 만들어낸 대표적 지자체다. 부여군민 10명 중 9명이 부여의 지역화폐인 ‘굿뜨래페이’를 사용할 만큼 정착도가 높다. 인구는 6만명이 채 안 되지만, 가입자는 7만5000명을 넘어섰고, 외지인의 사용 비중도 높아지며 ‘경제적 관계인구’도 확장되고 있다.

부여군의 성공 비결은 ‘돈의 순환’을 유도하는 설계에 있다. 할인율은 타 지자체와 같은 10%지만, 환전 대신 가맹점 간 재사용 시 3%의 추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구조로 설계돼 돈이 지역 내에서 반복적으로 순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 조폐공사나 코나아이 등 지역화폐를 운영하는 외부시스템을 쓰지 않고 독립적인 시스템도 만들었다. 서인석 부여군청 팀장은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순환형 블록체인 방식으로 시스템을 설계했다”라며 “지역화폐가 나오기 이전보다 가맹점들 매출이 20~30% 늘었고, 발행한 지역화폐 30% 정도는 재순환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서 팀장은 “지역에는 ‘돈맥경화’라는 말이 있다. 지역소멸 문제도 결국 소비 주체들이 없어지고 돈이 안 돌기 때문에 생긴다”라며 “지역 내에서 소상공인 중심으로 돈이 계속 순환할수록 경기는 활성화된다”라고 덧붙였다. 농업이 중심인 부여는 농민수당도 지역화폐로 제공한다. 농민들이 지역화폐로 소상공인 가맹점에서 소비를 이어가면서 경제가 순환되고 공동체 내부의 결속도 더욱 강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례적인 ‘국가 주도 모델’의 명암

그러나 부여군의 성공 사례가 곧바로 전국적 성공의 공식이 되지는 않는다. 한국형 지역화폐, 즉 ‘지역사랑상품권’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독특한 길을 걸어왔다. 스위스 WIR은행 등 해외의 성공적인 지역화폐는 대부분 시민사회나 지역공동체 등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민간 주도 공동체 기반’ 모델이다. 이들은 철학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성장했다.

반면 한국의 지역화폐는 정부와 지자체가 재정을 투입해 할인 혜택(보조금)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단기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어낸 ‘정부 주도, 보조금 기반’ 모델이다. 이 방식은 짧은 시간 동안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의 대중화를 이뤄냈지만, 동시에 정책의 지속 여부가 전적으로 정부 예산과 정치적 의지에 좌우되는 구조적 취약성을 낳았다. 사용자들은 공동체 철학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10% 할인받는 게 합리적인 경제 행위이기에 참여한다. 이처럼 자율적인 참여보다는 경제적인 인센티브만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은 보조금이라는 외부 동력이 끊기는 순간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장은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몰이 되거나 정책이 중단되면 먼지처럼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반면 재정이 많이 투입되면 그만큼 경기 진작 효과는 높아지는 것이 장점이다. 양날의 칼”이라고 말했다.

지역화폐는 ‘이재명표 정책’이라는 꼬리표 속에서 정치적 부침을 겪으며 정권에 따라 예산과 정책 방향이 크게 출렁였다. 문재인 정부 당시에 지역화폐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긴 했으나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 간 온도 차가 있었다. 당시 홍남기 경제부총리 재임 시절, 기획재정부는 지역화폐를 지자체 고유 사무로 보고 국비 지원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국비지원 예산이 2022년 7000억원에서 2024년 3000억원까지 대폭 삭감됐고, 2025년 예산안에는 아예 전액 삭감을 추진했다. 단체장의 소속 정당에 따라 광역과 기초 자치단체 간 갈등도 불거졌다. 광역단체장이 다른 정당 소속의 기초단체장이 있는 지역에 대해 지역화폐 예산 지원을 꺼리거나, 지역화폐 사업의 지속 여부를 두고 양 단체장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책 자체의 효용성이나 개선 방안에 대한 합리적 토론보다는 정치 공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인 지난 5월 3일 강원도 태백의 산나물 축제장에서 붕어빵을 사며 지역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적 부침과 재원 조달

정책이 정권에 따라 좌우되는 상황이 반복되자, 여당 내에서는 정부에 보다 강한 이행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50%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성남시장 시절부터 자신의 대표 정책이었던 지역화폐에 다시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행정적으로 속도를 내는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아예 국비 지원을 의무화하는 법안까지 발의하며 안정적인 재원 확보에 나섰다.

박정현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9월 윤석열 정부가 지역화폐 예산을 대폭 축소하자 지역화폐의 국비 지원을 의무화하고 5년 단위 활성화 계획 수립 및 연 1회 실태조사 의무화를 골자로 한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당론으로 채택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나 지난해 10월 윤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자동 폐기됐다. 박 의원 외 민주당 의원 169명은 지난 1월 다시 핵심 조항을 담은 개정안을 공동발의했다. 정권에 따라 지역화폐 정책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할 때 법제화를 통해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기도 하지만, 이러한 입법 시도는 오히려 지방자치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기본적인 복지는 전국이 동일하게 하고, 그 외는 지자체 사정에 맞춰 자율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며 “지방정부의 복지 확대에 대해 중앙정부가 매칭을 의무화하는 방식은 이례적이다. 지방자치의 자율성 측면에서 바람직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지역화폐 정책을 안정적으로 시행·확대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재명 정부의 지역화폐 정책은 민생회복지원금을 시작으로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기본사회’ 구상의 핵심 실행 수단으로도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사단법인 기본사회 강남훈 이사장은 “이번에 지급되는 민생회복지원금뿐 아니라 향후 추진될 햇빛·바람연금이나 농어촌 기본소득 등도 상당 부분 지역화폐를 통해 지급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의 재원 마련 방안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조귀동 정치컨설팅 민 전략실장은 “세수 기반은 악화되고 재정 수요는 커지는 상황에서 감세 기조를 유지하면서 재정정책을 공격적으로 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감세와 재정지출 확장을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이재명 정부 정책 패키지의 모순이자 제약”이라고 말했다.

■‘제로섬 게임’이냐, ‘골목상권 특효약’이냐

정치적 논쟁과 별개로 지역화폐의 실질적인 경제적 효과를 둘러싼 논쟁 역시 여전히 첨예하다. 2020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조세연)과 경기연구원이 내놓은 상반된 보고서는 지역화폐 정책의 효과를 둘러싼 대표적인 논쟁 지점이다.

조세연은 ‘지역화폐 도입이 지역경제에 미친 영향’ 보고서에서 지역화폐를 ‘제로섬 게임’이라 규정한다. 모든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지역화폐를 발행할 경우 특정 지역의 소비를 늘리는 것은 결국 인접 지역의 소비를 빼앗아온 결과일 뿐, 국가 전체의 총소비는 늘리지 못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조세연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보조금과 행정 비용은 고스란히 사회적 손실로 남는다고 비판했다. 조귀동 전략실장은 “지역 단위에서 시행할 경우 소비 진작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전국적인 경기 부양책으로 확대할 경우 효과에 대한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자체별 발행은 지역 내 자금 유출을 막는 방식이지만 전국 단위로 시행하면 지역 간 상쇄 효과가 발생해 실질적인 부양 효과는 미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경기연구원은 지역화폐가 소상공인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준다고 반박했다. 경기연구원은 2021년 ‘경기도 지역화폐의 소상공인 활성화 효과 분석’ 보고서를 통해 “가전·주방·가구 업종을 제외한 모든 업종에서 유의한 양의 상관관계가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양준호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역화폐는 소상공인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매우 유효한 전략”이라며 “인천시의 경우 지역화폐 사용 이후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세수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지역화폐인 ‘인천e음’이 활성화됐을 당시, 한 해 동안 분기별 지방세 세수가 약 70억원 증가한 사실을 계량 분석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지역화폐가 단순한 소비 촉진이나 할인 혜택을 넘어, 공동체 회복의 새로운 가치를 담아낼 때 비로소 자영업 위기나 양극화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응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지속가능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경제적 동기 부여에서 출발했지만, 그 경험이 공동체의 가치를 이해하고 지역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계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서인석 팀장은 “굿뜨래페이 결제 앱에서 팝업이나 푸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데 지역화폐에 담긴 공동체적 가치나 메시지를 전송하기도 한다. 지역화폐를 쓰는 행위에 대한 이유를 계속 설명하는 것”이라며 “인센티브라는 경제적 동기에서 시작했지만, 점점 사람들이 지역화폐를 지역화폐의 목적에 맞게 쓰려는 성향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지역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도 요구된다. 양준호 교수는 “지역경제 문제를 해당 지역이 감당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과제로 바라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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