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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영의 시선]
'무관계 사회' 속 여성 일자리의 위기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 합니다.

지난달 15일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손님들이 키오스크를 이용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주 경기 광명역에 들렀다.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한 식당에 들어섰다. '키오스크'(Kiosk)라는 무인 단말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직접 주문을 받지 않는 게 어느새 당연한 일이 돼버린 시대, 터치 스크린을 눌러 음식을 주문하고 카드로 계산한 후 잠시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얼마 후 번호판에 내 번호가 떴다. 일어나 주방 앞으로 가서 쟁반에 담긴 음식을 가져와 먹고, 다 먹은 후에는 또 식기 반납대로 가서 쟁반을 반납하고 식당을 나왔다.

키오스크 앞에서 그림자 노동을 하며



주문에서 반납에 이르는 전 과정을 돌아보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오늘날 '그림자 노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들어와 있는지를 다시금 실감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림자 노동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로 불리는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1981년에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산업 경제에서 가려져 있는, 노동의 그림자 측면을 의미한다.

일리치에 따르면 산업 사회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임금 노동의 보완물로 '무급'으로서의 그림자 노동을 요구하는, 아주 기이한 체제를 유지한다.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대부분의 가사 노동과 장보기, 직장 통근 등이 대표적이다.

키오스크를 비롯해, 우리에게 더 많은 그림자 노동을 강제하는 무인화와 자동화의 물결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전개되는 모든 공간, 예를 들어 철도역이나 공항, 대형서점, 백화점이나 전시장, 생활용품점, 패스트푸드점, 구내식당 등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원래는 자본이나 고용주 측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노동이나 소비자 측이 부담하는 방식으로, 효율의 극대화를 향한 '비용의 외부화'가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관계 사회, 사라지는 여성 일자리

지난해 7월 31일 서울 서초구 농협 하나로마트 양재점 식당가에서 시민들이 키오스크를 이용하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비대면·디지털화로 빠르게 산업 전환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금융업과 음식점업을 분석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키오스크와 태블릿 주문기의 도입이 음식점업의 판매·서빙 직종 근로자의 고용 감소를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1


그러나 이처럼 한 사회가 효율의 극대화를 향해 질주하게 되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관계'의 사전적 의미가 '둘 이상의 사람·사물·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는 것'이라고 할 때, 사람과 사물 간의 관계는 늘어나는 반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줄어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고독 사회'나 '무관계 사회'를 피할 길이 없게 된다. 특히나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비대면 접촉이 강조된 것을 기점으로 키오스크의 도입 속도까지 빨라지면서, 이런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경향은 무엇보다 여성의 일자리를 빠르게 잠식한다.
대형마트의 셀프 계산대, 식당의 키오스크, 가스의 모바일 자가 검침 등으로 인해 가장 먼저 사라지고 있는 게 바로 여성의 일자리
다.

'그림자 노동의 역습'(2016)을 쓴 크레이그 램버트(Craig Lambert)는 그림자 노동을 '대가 없이 당신에게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
현재의 경제·정치 제도가 직원을 채용하는 기업이 아니라 내버리는 기업에 보상하고 있다는 사실
"에 대해 경고했다.

이제는 무인화와 자동화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들을 젠더 관점에서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림자 노동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한편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엮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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