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 원하시는 건 뭐든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다 해드리겠습니다."
파에통탄 시나와트라 태국 총리, 2025년 6월 15일
38세 최연소 태국 총리 파에통탄 시나와트라가 지난 15일(현지시각) 캄보디아 훈 센 원로원 주석(상원 의장)과 통화에서 쏟아낸 말들이다.
19일 두 나라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한 이 통화 내용이 유출되자 태국이 발칵 뒤집혔다. 태국은 가뜩이나 경기 침체와 미국발(發) 관세 폭탄 우려로 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이 와중에 터진 총리 ‘굴욕 외교’ 논란은 단순한 말 실수 파문을 넘어 정권 존립을 위협하는 뇌관이 되고 있다. 늘 있던 캄보디아와 국경 분쟁이 이번에는 총리 실각, 나아가 쿠데타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태국 총리 파에통탄 시나왓(가운데)이 19일 태국 방콕 정부 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개 사과를 하며 태국 전통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발단은 지난 5월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에서 벌어진 총격전이었다. 이 교전으로 캄보디아 군인 1명이 사망하면서 해묵은 양국 갈등에 다시 불이 붙었다.
파에통탄 총리는 갈등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훈 센 의장과 긴 통화를 나눴다.
20일 AP 등에 따르면 파에통탄은 훈 센에게 태국 동부 지역 사령관을 ‘적(opponent)’이라고 지칭했다. 이어 태국 2군 사령관 파드클랑 중장을 겨냥해 “국가에 도움이 안 되는 말만 한다”며 비판했다.
이어 훈 센을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무엇이든 원하시면 말만 해달라. 다 해드리겠다”는 굴욕적인 발언을 했다.
태국 반정부 시위대가 19일 목요일 방콕 정부 청사 앞에 모여 파에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연합뉴스
통화 파일이 공개되자 태국 여론은 들끓었다. ‘국가와 군의 자존심을 팔아먹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파에통탄 총리는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 기술”이라고 해명했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대다수 태국인들은 이 발언을 경험이 일천한 젊은 지도자가 국익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증거로 받아 들였다.
곧 69석을 보유한 연정 핵심 파트너 품짜이타이당이 “국가 주권과 군의 명예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혔다”며 연정 탈퇴를 선언했다. 이 결정으로 파에통탄 총리가 이끄는 푸어타이당 연립정부는 하원(500석)에서 과반(251석)을 겨우 1석 넘기는 불안정한 처지로 전락했다.
당장 정부가 무너지진 않더라도, 야권 공세와 연정 내 이탈표가 한 표라도 더 나오면 언제든 실각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가운데)가 파에통탄 친나왓 태국 총리(왼쪽)와 함께 캄보디아 프놈펜 평화궁에서 지난 4월 걷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적 논란과 별개로 태국과 캄보디아 관계 역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캄보디아는 지난주부터 반(反)태국 감정을 이유로 태국산 과일과 인기 TV 드라마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영국 가디언은 전문가를 인용해 “태국 문화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국경 분쟁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는 상징적 조치”라고 전했다.
태국 역시 국경 검문소 통과 절차를 대폭 강화하며 보복 조치에 나섰다. 캄보디아에 대한 전력 공급과 인터넷 서비스도 차단하겠다고 위협했다.
CNN은 “태국 경제가 현재 10년 만에 최악의 침체를 겪고 있다”며 “현재 태국은 미국의 대중국 관세 정책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까지 겹쳐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갈등은 내부 불만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기 쉽다. 늘 있던 국경 분쟁도 파에통탄 총리 리더십 위기와 태국 내 불안한 경제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 실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태국 왕립군 총사령관 파나 클라우플로드툭 장군(오른쪽)과 캄보디아 장군 마오 소판(왼쪽)이 지난달 태국 수린주 캅초엥 지역 태국-캄보디아 국경에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태국과 캄보디아는 동남아에서도 국경 분쟁이 심한 나라다. 갈등의 뿌리는 1907년 프랑스가 식민 통치 시절 그은 국경선에 있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817㎞에 이르는 국경을 공유한다. 이 경계 대부분은 118년 전 프랑스 점령기에 만든 지도가 근거다.
여기에 복잡한 역사적 배경도 한몫한다. 캄보디아는 과거 동남아를 호령했던 크메르 제국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여전하다. 하지만 1970년대 크메르루주 집권 등을 거치면서 발전이 지체됐다.
태국은 시암 왕국 시절부터 동남아에서 맏형 노릇을 했다. 이런 미묘한 관계 속에서 태국 국민들은 자국 지도자가 캄보디아에 저자세로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2023년 8월 방콕 돈므앙 공항에 도착한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가 막내딸 파에통탄 친나왓(오른쪽)과 함께 지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현직 총리가 외국 수반과 통화에서 군 수뇌부를 적이라 칭한 것은 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 것과 다름없다고 분석했다.
태국 군부는 왕실과 국가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이를 빌미 삼아 정치가 불안정해지면 수시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태국 현대사에서 군부 쿠데타는 5~6년에 한번 꼴로 등장했다. 태국 군부는 1932년 이후 93년 동안 14차례 쿠데타를 일으킨 전력이 있다.
파에통탄 아버지 탁신 치나왓 전 총리와 파에통탄의 고모 잉락 치나왓 전 총리 모두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태국 왕립 군대는 이미 “국경 상황이 악화되면 고강도 작전을 수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CNN은 전문가를 인용해 “젊은 총리가 벌인 외교적 실수가 경제난과 맞물려 태국 정치 전체를 뒤흔드는 상황”이라며 “품짜이타이당에 이어 다른 연정 파트너들도 이탈할 경우 정권 교체는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