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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에 딱 한 번 통화한 뒤 아직도 소식을 못 들었어요. 친척들이 저를 죽이려고 할 때 몰래 살려준 누나인데, 제가 도망간 뒤로 가족 모두가 마을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고, 조카들은 학교도 못 다니고 있습니다. "
예멘에서 온 알렉스(Alex·38·가명)씨는 2012년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예멘 형법은 “이슬람에서 이탈한 자는 세 번의 회개 기회를 준 뒤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알렉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그는 배교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국가로부터 탄압 받을 위기에 처한 가족들은 그를 죽이려 들었다.

그때 그를 구해준 것이 알렉스의 누나였다. 집 지하실에 묶여 있던 알렉스를 풀어주고 차도르(무슬림들이 입는 전신을 감싸고 눈 또는 얼굴만 내놓는 옷)를 입혀 그를 예멘의 수도 사나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알렉스에게 “회개할 기회조차 주려 하지 않으니, 도망가서 잘 살라”고 했다.
마스크를 쓴 ISIS 대원들이 예멘 알베이다 지역에서 성직자를 모욕한 혐의를 받는 청년 4명을 처형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 지역 출신인 알렉스는 ″우리 집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AFP=연합뉴스

‘난민 신청자’ 신분으로 한국에서 생활한 지 3년차이던 2014년. 그는 교통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통화한 누나는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며 “남편과 아이들도 가족으로부터 버려졌고, 아이들 역시 삼촌 탓에 조롱당해 학교도 못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알렉스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IS)의 공개 처형 장면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보이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도적 체류자라 가족결합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누나 가족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한국에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지난 2019년 6월,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난민인권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법무부 난민면접 조작사건 피해자 증언대회에 피해를 본 난민신청자들이 증언을 위해 참석해 있다. 알렉스는 이 사건으로 난민 신청자 등의 지위에서 벗어나 '인도적 체류자' 자격을 취득했다. 연합뉴스

난민법이 정하는 ‘인도적 체류’는 난민에는 해당하지는 않지만, ‘고문 등의 비인도적인 처우나 처벌 또는 그 밖의 상황으로 인하여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 등을 침해당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받을 수 있는 체류 자격이다. 난민과 상황은 비슷하지만, 법적 지위는 현저히 다르다. 체류 기간부터 난민이 3년, 인도적 체류자가 1년으로 상대적으로 짧은데다가 취업 역시 난민은 허가가 필요하지 않은 반면 인도적 체류자는 ‘체류자격외 활동허가’를 받아야만 하고, 취업기간 역시 1년으로 제한된다. 또 난민들에게는 사회보장, 기초생활보장, 교육권 보장 등이 지원되는 반면 인도적 체류자에게는 제공되지 않는다.

이같은 인도적 체류자는 지난 4월을 기준으로 국내에 2702명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지난 2021년과 2023년 인도적 체류자의 지위와 처우를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개선하고, 난민법을 개정할 것을 법무부에 권고했다. 취업이나 체류 기간 등에 있어 불이익을 겪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인권위는 지난해 10월에도 이들의 가족결합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난민법 개정을 추진할 것을 권고했다. 헌법이 국가가 가족생활을 보장하도록 규정하고 있고(제36조 제1항), 가족결합권은 세계인권선언 제16조, UN 시민적·정치적 권리규약(ICCPR·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제23조, 아동권리협약 제9조 및 10조 등 인권규범이 인정하고 있는 보편적인 권리라는 점이 그 근거였다.

정근영 디자이너
하지만 법무부는 “난민법상 난민과 인도적 체류자는 명확히 다르기에 가족결합권은 인도적 체류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볼 수 없다”며 지난해 11월 18일 불수용 입장을 밝혔다. 이어 “임시적 체류 신분인 인도적 체류자에 대한 가족 초청 허용 여부는 장기 체류로의 전환 가능성, 제도적 파급 효과 등을 고려해야 할 사안”이라며 “국민적 공감대 형성 및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신중히 검토해 나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인도적 체류자의 체류 기간이 계속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21년 3월 기준 5년 이상 체류자는 700명 이상, 10년 이상 체류자는 67명이었다. 10년 전인 2015년 이전에 인도적 체류 자격을 얻은 사람의 수가 908명인 점을 고려했을 때, 10년 이상 체류자의 수는 이보다 더 증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근영 디자이너

전문가들은 인도적 체류자들의 체류 기간이 장기화하고 있고, 사실상 난민과 다르지 않아 생이별 상태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김연주 난민인권센터 변호사는 "이미 인도적 체류자들의 체류 기간 장기화는 진행되었고, 그들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사실상 난민과 다를 바 없다"며 "우리나라 인도적 체류자의 인권 상태는 세계 기준으로 봐도 후진적이라 서둘러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이주인권센터 박정형 센터장은 “인도적 체류자는 국제적으로 ‘보충적 보호’ 대상에 속하고, 유럽 연합 대다수 국가는 이들의 가족 재결합을 허용하고 있다”며 “인도적 체류자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고, 이를 국가가 방치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들의 고통을 줄이고, 국가 위상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인도적 체류자의 가족결합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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