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 20여 년간 '균형발전'을 외치지 않은 정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더 벌어졌고, 지방소멸 위기는 이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저출생, 가계부채 상승으로 이어지는 지방소멸은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0%대로 끌어내릴 수 있는 최대 리스크입니다. 이런 기로에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시작으로 균형발전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일보는 지방을 떠난 청년들의 시선으로 위기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전문가들과 해법을 모색해봤습니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그날도은 퇴근 후 기숙사 독서실에 앉았다. ‘OPIC(오픽•영어말하기평가)’ 책 한 권을 펼쳤다. 선주 측 외국인 엔지니어와의 소통을 더 수월하게 하고 싶어 시작한 공부였다. 그날따라 손끝은 책장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낮에 회사 동료가 툭 던진 한마디가 그의 온 신경을 끌어당겼다.

“너 여기서 계속 살 거야?”

다. 화학공학 전공을 십분 살린 설계직을 택하며, 무려 400㎞ 떨어진 이 조선업 도시에 발을 디뎠다. 우왕좌왕하던 신입 시절은 쏜살같이 지났다. 어느덧 일의 재미를 알아가는 2년 차가 됐다. 평생 직장은 없다지만, 당장은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다. 인턴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정이 많이 들었던 동기 하나가 공기업으로 이직하며 퇴사 인사를 돈 게 방아쇠가 됐다. 마음속에서 불안이 일렁였다.

'나만 여기에 안주하고 있는 건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데……. 아이 교육은 잘할 수 있을까.'

질문을 거듭할수록 불안은 몸집을 불렸다. 그간 억눌러 왔던 생각들이었는지 모른다. 안정적인 일자리인 건 분명했지만 이곳에서 성장에 대한 의심은 조금씩 쌓여 가던 때였다. 무심코 동료들의 책상을 돌아봤다. ‘토익 고득점 완성‘ ‘대기업 인적성검사 최신 기출’ ‘공사·공단 인적성 종합편’ 희섭은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 묘한 동지애가 올라오며 차분해졌다. 약 9년 전, 그가 거제를 떠나기로 확고하게 결심한 날이다.

5일 한 청년이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5 강남구 행복 일자리 박람회'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었다. 전체 증가분의 78.5%를 차지했다. 그사이 비수도권은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급기야 지난해 제2의 도시 부산이 광역시 최초로 소멸위험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방을 살리기 위해 청년을 유인할 일자리가 제일 중요하다며 각종 정책이 쏟아진 지도 20년 가까이 흘렀다. 공공기관을 옮기고 산업 규제를 푸는 각종 특구도 운영해봤다. 그럼에도 현재 성적은 낙제다.

“단지 임금이 괜찮다고 ‘좋은 일자리’가 아니죠. 훨씬 입체적으로 봐야 해요. 주거 여건, 교통, 문화, 발전 가능성 등 여러 요소가 충족되는 일자리가 있어야 청년이 그 지역에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겠어요?”

2016년 우리나라에 지방소멸 위험성을 처음 알린 이상호 한국고용정보원 박사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가적 위기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눈 높은’ 청년 탓을 하는 수준의 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다. 저출생 등의 문제를 야기하는가 된다. 지방을 넘어 국가 전체 성장동력이 소멸로 향하고 있다. 희섭처럼 비교적 임금이 높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청년들조차 지방을 떠난다. 지방은 왜 청년들을 잡지 못하는 걸까. 한국일보 창간기획팀은 그들이 털어놓은 생생한 지방 생활기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2012년부터 2022년 사이 지역별 인구 대비 청년(15~34세) 순유입률을 나타낸 그래프를 보면, 수도권과 충청권, 제주에만 청년들이 늘고 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야근 ‘없데이’에 회식... 깨진 성비로 빠져나가는 청년

“오늘은 ‘없데이’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따뜻한 저녁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수요일이었다. 사내 방송이 정오 무렵, 익숙한 안내를 흘려보냈다. 희섭이 속한 부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이 몰릴 땐 야근도 적지 않았던 설계 파트였지만, 을 했다. 파트 전체가 빠짐없이 모였다. 30~40명 파트원이 단체로 이동했다. 희섭은 담담하게 말했다.

“가족 친화적이지는 않은 문화였죠, 확실히.”

회식은 보수적인 ‘남초’ 집단의 문화를 보여 주는 한 사례일 뿐이었다. 기계과보다 여자 직원이 많은 조직이었는데도, 한 파트에 5, 6명뿐이었다. 여자 동기 한 명이 지나가면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직원들이 줄줄이 고개를 돌리는 광경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연애와 결혼은 더 어려웠다. 은 소개팅 한 번 하려면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지역에서 또래 여성은 물론, 직장인 여성을 소개받기가 쉽지 않았다. 동료들과의 대화 주제는 ’여기서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로 자연스레 흐르곤 했다. 서울에서 사귄 여자친구가 있으면 헤어지기 일쑤였고, 소개팅을 하러 주말이면 서울에 가는 경우가 흔했다. 결론은 늘 비슷했다. 수도권으로 옮겨야겠다는 것. 이다.

“직장을 3, 4년 다니면서 연애하고 결혼하는 게, 우리나라 청년의 대체적인 인생 루트(노선)잖아요. 그 흐름이 끊겨버리니까요. 사적인 영역에서는 치명적인 거죠.”

게티이미지뱅크

성비 불균형은 산업별 취업자 성비 구조와도 맞물려 있다. 지난해 에 달했다. 일자리를 따라 여성은 서울로, 남성은 지방으로 향하는 흐름이 형성돼 있는 셈이다.

실제 성비 통계는 이를 뒷받침한다. 통계청(5월 기준) 자료를 보면, 20~39세 인구 성비(여성 100명당 남성 수)가 여성이 높은 곳은 서울(94.45)과 세종(99.97)뿐이다. 경남(121.46), 강원(121.58), 충남(122.57), 충북(123.27), 경북(127.85), 울산(128.3) 등은 모두 남성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이를 ‘사적인 문제’로 볼 순 없다. 저출생과 지방소멸 위험 등과 밀착돼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는 결국 여성 친화적이어야 해요.” 청년 인구의 이동 흐름을 연구해 온 하수정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가정과 일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합니다. 여성들이 머무를 수 없다면, 그 지역은 결국 살아남을 수 없어요.”

우리 성장할 수 있을까, 나도 회사도

을 살릴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남쪽 끝으로 갔다. 그가 입사했던 2018년, 그 회사는 삼성전자보다도 초봉이 높았다. 남자 직원들 틈바구니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여성은 거의 없었지만 더 치열하게 일했다. 직접 낸 아이디어대로 공정이 바뀌고 수익성이 개선될 때면 벅차오르는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업황이 눈에 띄게 꺾였어요. 저도 회사도 성장하는 곳에 있고 싶었어요. 지금 보면 지방에 있는 산업들은 경쟁력을 많이 잃어가고 있잖아요."

일이 손에 익어갈 때쯤 같은 고비를 맞은 건 수민도 마찬가지였다. 물리학과를 졸업해 개발자가 된 수민은 비전공자로서 부족함을 극복하고 싶은 부담을 늘 안고 있었다. 함께 질문하고 고민할 수 있는 동료와의 교류를 원했지만 찾기 쉽지 않았다.

“파견 근무를 갔던 판교에서는, 퇴근 후 개발자 모임을 하자는 글이 줄줄이 올라오더라고요. 포항은 조용하죠. 개발자로서 성장하려면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그때 더 커졌어요.”

2012년 대비 2022년 권별역 지역내총생산을 보면, 여러 대기업이 입주한 수도권과 반도체 생산 시설 등이 몰려 있는 충청권은 눈에 띄게 성장한 데 반해 다른 권역은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6월 발간한 '지역경제 성장요인 분석과 거점 도시 중심 균형발전' 보고서에서 발췌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이들의 고민은 지역 경제의 단면이다. 교육도, 산업도 수도권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다. 대학들은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고, 전국 생산의 3분의 2는 수도권과 충청권에 집중돼 있다.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전통적 제조업에 의존했던 남부 지역은 성장이 멈춰 섰다. 일자리 정책을 연구하는 전인 영남대 교수는 탄식 섞인 진단을 내놨다. 로 꼽았다. 자체 발전 동력이 없다는 얘기다.

“지금까지는 협력을 안 해도 지역 도시가 망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판도가 바뀌었어요. 각자도생을 고수하면 지방은 죽을 수밖에 없어요. 과거에 쌓아 둔 것으로 먹고살 수 있는 건, 길게 봐도 15년 남았죠.”

택시 아니면 걷는다... 산부인과·안과도 없어

이다. ‘뚜벅이’ 희섭도 택시 외에는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다는 게 늘 불편했다. 시내에 나갈 때면 40~50분 걷는 게 일상이 됐다. 사회 초년생이라 차를 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병원은 부족하고 은행은 멀었다. 서울에선 점심시간에 짬을 내 은행 업무를 보고 병원 진료를 받는, 그런 ‘당연한’ 일이 그곳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은 결혼 전 진천에서 신혼집을 알아보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처음엔 마음에 들었다.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외관도 괜찮았고 내부도 깔끔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 보니 그곳엔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산부인과가 없어요. 안과도 없고. 임신했을 때 아내를 청주까지 데려가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먼 길을 혼자 다녀야 한다는 거잖아요. 영화관도 하나 없는 것도 좀. 출퇴근이 좀 멀더라도 서울로 가기로 했죠.”

2023년 2월 14일 전북 김제시 원평공용버스터미널에서 지역 주민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김제=이한호 기자

수치도 이런 격차를 말해 준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서울 사람이 은행에 가기 위해 평균 432m만 이동하면 되는 반면 경북 주민은 6.1㎞를 움직여야 한다. 최댓값으로 보면 편차는 더 커진다. 서울은 최대로 이동해도 1㎞가 채 안 되지만 경북과 전남, 강원의 최대 이동거리는 27㎞에 달했다. 교통 역시 비슷하다. 수도권에서 버스가 하루 평균 51.0회(한국교통연구원) 다니는 동안 비수도권은 21.7회 운행에 그친다. 대중교통으로 의료시설에 가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수도권이 평균 15.4분, 비수도권은 그 두 배인 평균 30.4분이 걸린다.

생활의 불편은 예상치 못하는 순간에 툭 튀어나왔다. 수민이 포항에서 처음 집을 구하던 날도 그랬다.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매물을 몇 개 확인하고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을 때, 돌아오는 말은 하나같았다.

“일단 와서 보세요.”

앱에 올라온 매물도 적었고, 그 적은 매물조차도 허위가 많았다. ‘5트(다섯 번의 시도)' 만에 전세 원룸을 구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서는 당근마켓(중고거래 플랫폼)으로도 집을 구하잖아요.” 온라인으로 먼저 정보를 얻고 발품은 줄이려는 젊은 세대에겐 낯선 세상이었다.

13일 서울 시내 아파트의 모습. 뉴스1

서울살이에도 도돌이표처럼 돌아온 그 질문

수민은 아직도 포항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공기를 기억한다. 생경한 도시에서의 첫 사회생활을 앞두고 잔뜩 움츠렸던 몸이 그 낯선 포근함에 스르르 풀렸다. 그렇게 몇 개월은 포항의 여유를 즐겼다. 서울의 숨 가쁜 리듬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꼭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제 커리어(경력)를 키워갈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데, 포항에 기회가 있었다면 굳이 떠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희섭도 비슷한 감정을 품었다. 거제를 떠난 후 6년간 충북 청주에서 일한 희섭은 지난해 경기 이천으로 직장을 옮기며 결혼도 했다. 서울에 신혼집을 구하면서 그는 만만치 않은 서울살이를 체감했다.

“서울에서 전셋집 구할 돈이면 청주에서는 집을 살 수 있잖아요. 자기 집이 있는 청주 동료들을 보면 삶의 안정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등바등 서울에서 사는 게 과연 좋은 걸까 싶기도 하고요.”

같은 직장에 다니는 희섭 부부의 하루는 오전 5시에 시작된다. 아침 6시면 출근 버스를 타고,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저녁 6시 반을 넘긴다. 하루 세 시간을 도로 위에서 보낸다. 평일엔 회사가 전부겠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애를 키울 수 있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였다. 서울이란 거대 블랙홀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지금, 대한민국 어디에서 답을 얻을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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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① <상> 청년, 지방과 헤어질 결심
   1. • ‘최고의 직장’을 떠날 결심 “너 여기서 계속 살 거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218210001385)
   2. • "떠난다면, 보내 줄 수밖에"... 청년도, 기업도, 경쟁력도 놓치는 지역의 속앓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000180002963)

한국일보

진달래 기자 ([email protected]) 최현빈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