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남북 정상 만남 기념우표 발행
각종 상징 조작 넣어 대외 선전도
'적대적 두 국가' 선언 뒤 일괄 삭제
"재등장 여부, 남북 관계 바로미터"
각종 상징 조작 넣어 대외 선전도
'적대적 두 국가' 선언 뒤 일괄 삭제
"재등장 여부, 남북 관계 바로미터"
2000년 6월 15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북한 조선우표사가 같은 해 10월 발행한 우표(왼쪽 사진). 오른쪽은 조선우표사가 2007년 11월 발행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 전 위원장의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 우표. 이들 우표는 지난해 1월 조선우표사 홈페이지 등에서 모두 삭제됐다. 정다현 태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제공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정상회담은 총 다섯 차례(2000년 1회, 2007년 1회, 2018년 3회) 열렸다. 그때마다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도 남북 정상의 악수 장면 등을 한 장의 우표에 담아냈다. 북한 정권에 있어 우표의 의미는 남다르다. 편지 수발의 목적을 넘어
대내 결속을 위한 주민 선동 및 대외 선전이 '합법적으로' 가능한 통로
다. 우표는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전방위 제재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한 만큼, 북한 우표는 해외 유통도 가능하다. 북한 주민들 스스로 우표를 "나라의 얼굴" "꼬마 외교관" 등으로 부르는 이유다.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을 주제로 한
북한 우표는 윤석열 전 대통령 재임기에 돌연 사라졌다.
북한에서 유일하게 우표를 발행하는 조선우표사 공식 홈페이지 등에 올라 있던 관련 우표 이미지가 모두 삭제된 것이다. 남북 관계 경색에 따른 조치일 가능성이 크다.이제는 공식적으로 '증발한',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었던 남북정상회담 관련 북한의 우표들을 발행 시기별로 살펴봤다. 각각의 우표를 통해 북한이 당시 어떤 메시지를 전파하려 했는지도 분석해 봤다. 아울러 지난 4일 취임사에서 남북 대화·협력을 천명한 뒤 11일 대북 확성기 방송을 먼저 중단해 남북 간 '소리 전쟁'부터 끝낸
이재명 정부 시기에 북한의 남북정상회담 우표가 부활할 가능성
에 대해서도 짚었다.김정일·김정은의 '선전 도구'
북한은 정권 수립(1948년) 이전인 1946년부터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지시로 우표를 생산했다. 그해 김일성 전 주석은 자신의 얼굴이 담긴 우표도 발행했다.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강화
하려는 목적이었다.북한이 1946년 발행한 우표.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얼굴이 등장한다. 정다현 태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제공
우표가 북한 지도자의 대외적 위상을 드러내는 '선전 수단'으로 본격 활용된 시기는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김일성의 실질적 후계자로 지목된 1974년 전후다.
김정일 전 위원장은 1973년부터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으로 활동하며
우표를 통해 북한 지도자가 '세계의 지도자'임을 각인하는
작업
에 공을 들였다. 북한은 이듬해 만국우편연합 가입으로 '선전용 우표'의 공식적인 국제 유통 경로까지 확보했다.2004년 북한에서 발행된 김정일(오른쪽)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 간 정상회담(2002년 개최) 기념우표. 정다현 태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제공
김정일 전 위원장은 1977~2007년 북한 최고지도자가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함께한 사진을 담은 우표를 최소 25종 발행했다. 이 중 본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우표는 14종이다. '김일성 주제' 우표(11종)보다도 많다. 2000·2007년 남북정상회담 우표도 '김정일 집권' 시절의 산물이다. 현 김정은 국무위원장 체제에서도 이런 기조는 이어졌다. 2018년 4월과 5월, 9월 열린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우표 4종이 발행됐다.
키높이 맞추고, 백두혈통 넣고, 찬양 노래까지
북한 우표에는 다양한
이미지 조작
이 행해진다. 남북정상회담 우표도 마찬가지다. 2000년과 2007년 회담 기념 우표들을 보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키가 작은 김정일(약 162㎝) 전 위원장이 작아 보이지 않도록 조정됐다. 남북이 대등한 관계임을 강조
한 것이다.북한이 2000년과 2007년 각각 발행한 남북정상회담 기념우표. 우표 사진 속 남북 정상들의 키 차이가 거의 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보다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다현 태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제공
특히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회담 관련 우표의 경우, 북한이 대외 선전을 위해
가장 집중적으로 이미지 조작을 가
했다
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 우표 연구로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등재 논문 여러 편을 집필한 정다현 태재연구재단 책임연구원(고려대 정책학 박사)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한국 관련 이미지는 최소화하고, 북한이 강조하려는 부분에 훨씬 집중한 결과"
라고 설명했다.실제로 당시 발행된 3·4·5차 '북남수뇌상봉과 회담' 우표에는 목란꽃, 백두산 등 이미지가 대거 등장한다. 정 책임연구원은
"목란꽃은 북한의 국화이고, 백두산은 김정은 자신이 '백두혈통'(김일성의 직계가족)임을 나타내는 대표적 상징"
이라며 "김정은의 권력 승계 전까지 북한 우표에는 백두산이 등장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2018년 4월 판문점에서 열린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북한 조선우표사가 같은 해 10월 발행한 기념우표 일부. 우측 하단의 목란꽃(빨간 네모)은 북한의 국화다. 정다현 태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제공
2018년 9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북한 조선우표사가 같은 해 10월 발행한 기념우표 일부. 백두산이 등장한다. 정다현 태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제공
'5차 북남수뇌상봉과 회담' 우표에 적힌 노래, '우리는 하나'의 가사도 북한이 대내외 효과를 동시에 노린 흔적이다. 2002년 발표된 원곡 가사 속
'태양조선'(김씨 일가를 지칭)이 '혈육' '겨레' 등으로 대체
됐는데, 북한 주도 통일 메시지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분석된다. 정 책임연구원은 "북한 주민에게는 이미 익숙한, 북측 주도 통일의 뜻이 담긴 노래를 대외적으로 순화해서 (우표에) 담은 것"
이라고 풀이했다.2018년 9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북한 조선우표사가 같은 해 10월 발행한 기념우표 일부. ‘우리는 하나’ 노래 가사 중 "혈육의 정 뜨거운" "그 누구도 못 가를"(빨간 네모)은 원곡에선 "태양조선 우리는"으로 표기돼 있다. "겨레의 념원" "후손만대 물려줄"(빨간 네모)도 원곡 가사는 "찬란한 태양" "태양조선" 등이다. ‘태양’ 및 ‘태양조선’은 북한의 김씨 일가를 뜻하는 용어다. 정다현 태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제공
尹 정부 '주적' 규정 후 모두 삭제
그러나 북한은 윤석열 정부 시절인 지난해 1월, 남북정상회담 관련 우표를 공식 기록에서 모두 삭제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 책임연구원 등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조선우표사 홈페이지에선 전체 우표를 분류하는 카테고리 중
'조국통일' 분야를 지우고 남북정상회담 관련 우표 목록을
없앴다
. 대남 매체 홈페이지 등 통일 관련 웹사이트 역시 대부분 폐쇄했다. 지금도 복원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12월 26~30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 참석해 있다. 평양=노동신문·뉴스1
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데 따른 후속 조치
로 보인다. 2023년 12월 31일 조선중앙통신은 그가 "북남(남북)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10개월 후인 지난해 10월, 헌법까지 바꿨다. 한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 등으로 규정하는 조항을 신설했고, 통일을 암시하는 각종 표현은 삭제한 것으로 전해졌다.우표 재등장하면… 北 변화 신호일까
북한이 '체제 선전용'으로조차 쓰지 않게 된 남북정상회담 우표는 한국의 새 정부 출범을 맞아 '부활'할 수도 있을까. 해당 우표의 재등장 여부는 향후 북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전망이다. 김정은 정권의 검열을 거쳐 만들어지는 정치적 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정 책임연구원은
"우표가 '삭제'됐다는 건 공식적인 우표 목록이 없어진 것으로, 삭제 후 다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고 말했다. 이미 배포된 우표까지 모조리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현 상황에선 (우표 목록 재등장을 위한) '모멘텀'이 필요하다"
고 진단했다. 주적으로 한국을 못 박은 헌법을 다시 개정할 만한, 김정은 위원장이 한국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크게 바꿀 만한 계기가 있어야 남북정상회담 우표도 다시 세상에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대북 방송이 중단된 12일 경기 파주시 접경 지역에서 바라본 한국군 초소 모습. 초소 전방에 확성기가 위치해 있다. 뉴시스
최근 한국 정부의 대북 유화 메시지는 북한이 변화를 고민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교대학원 총장은 "대북 방송 중단에 북한이 호응해 대남 방송을 멈춘 것은 남북 관계의 긍정적 신호"라면서도
"헌법까지 바꾸며 한국을 적대 국가로 단정한 북한이 당장 태도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고 짚었다. 이어 "우리 정부는 일희일비하지 말고 대화·협력 원칙을 지키면서 정례 연락 채널 복원 등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단계적 로드맵을 갖춰야 한다"
고 제언했다.◆참고 문헌
-정다현(2023), <북한의 아지프로(agit-prop) 우표정책과 지도자 상징조작 연구>. 박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정다현(2021), <북미·남북관계 북한우표의 함의와 상징주의 분석>. 국제정치연구, 제24집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