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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폐와 증여 융합으로 시장 경제 빈틈 채운다
일본에 ‘증여 열풍’ 일으킨 젊은 철학자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증여의 핵심은 수취인의 깨달음
‘고객님’ 정체성 벗고 고마움 자각해야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라는 책으로 일본 사회에 증여 열풍을 일으킨 일본의 언어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일본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정서다. 부모로부터 그런 가르침을 받고 살아온 한 일본 중년 남성이 병 든 부모를 부양하며 회사에 다니다 구조 조정을 당했다. 실업 급여마저 바닥나자 고립된 그는 86세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을 시도한다. 고령화 사회가 깊어갈수록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런 비극적인 뉴스가 드물지 않게 들린다.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 이제 죽는 수밖에…’ 두 문장을 잇는 논리적 비약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이런 사고 체계는 우리를 심각하게 위축시킨다.

자식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사회에 폐를 끼치는 것도 싫은 사람들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 잘 살기 위해 더 많은 ‘은퇴 자금’ 튼튼한 ‘보험’, ‘사회 복지’ 설계에 집착한다. 그렇게 홀로 준비하면 문제는 다 해결되는 걸까? 그런 사회는 정말 안전하고 행복한가?

생산 인구 감소를 둘러싸고 시작된 갈등은 일본 사회에 깊은 골을 만들어 냈다. 몇 해 전 인터뷰했던 재일 정치철학자 강상중도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요양병원에서 장애인과 노인을 돌보던 한 청년이 19명을 집단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사회에 부담만 주는 이들을 대리 살인했을 뿐이라는 논리를 펼쳤어요. 그런데 그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 의외로 많았어요.”

‘교환 가치가 없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는가?’ ‘자본주의 사회는 정녕 교환 가치로만 굴러가고 있나?’ 이 질문은 지진과 저성장 등 극심한 사회적 재난을 통과한 일본 사회를 강타했고, 이후 일본의 생활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세공된 디테일로 이 문제를 풀어갈 실무적인 개념을 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라는 책을 출간한 젊은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도 그중 한 사람이다. ‘자본주의의 빈틈을 메우는 증여의 철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에서 그는 수신인과 발신이 일치하지 않는 ‘민폐와 증여’의 융합으로 시장 경제의 수학적 빈틈이 채워진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일본에 ‘증여 열풍’을 일으킨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는 주장한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사회란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사회’라고.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공동체에 무언가를 갚으려고 하는 건전한 ‘부채 의식’만이 사회 곳곳에 살만한 통로를 만들 수 있다고.

증여는 수취인의 ‘받았다’는 감각에 의해 생긴다.

장애인 아들을 향해 “보석 같은 민폐를 끼쳐줘서 고마워”라고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인터뷰에서 고백했던 ‘마이노러티 디자인’의 저자 사와다 도모히로의 진술과 맥을 같이했다.

찾아보면 민폐가 화폐가 되어 시장 경제 안에서 사회관계 자본을 일으킨 사례는 적지 않다. 일상에서 공짜로 무언가를 받았을 때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는 빚진 마음은 경제적인 순환을 만들어 낸다. 일례로 ‘매번 공짜로 글을 읽은 게 미안하다’는 독자들의 빚진 마음이, 꾸준히 글을 포스팅하는 SNS 작가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기도 한다.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수많은 증여로 이루어져 있다고 논증하는 매력적인 언어 철학자 지카유치 유타를 인터뷰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쓴 야마구치 슈도 그렇고, 일본의 인문학자들은 생활의 달인인 것 같습니다. 모든 학문을 거시적으로 보기보다 실용화, 좋은 의미로 축소지향적으로 세공해서 잘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사회가 철학자에게 그렇게 요구합니까?

“철학은 박물관에 장식된 중요 문화재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대한 이론적 결과물뿐 아니라 이른바 ‘민예(民藝)’처럼 일상에서 쓰이는 것도 중요하죠. 엄밀히 검증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일본(혹은 일본어)에 이론보다 서사를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서사성’은 평범한 일상과 잘 어울리게 마련이죠.”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 철학자의 생업이고, 기존에 없던 좋은 개념을 제공해서 인류의 생존에 공헌한다는 점에서 철학은 현대인을 위한 테크놀러지 즉 생활의 기술이라고 했다.

철학적으로 증여란 무엇인가요?

“제가 설정한 증여의 의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다면, 답은 ‘누군가 주는 것’입니다(‘뺏는다’는 예외). 영어로는 ‘GIFT’죠. 증여에 관한 제 논의의 특징은 ‘사물’에 한정하지 않고, 선의가 담긴 ‘행위’ 전부를 지칭합니다. 가령 ‘네가 그때 말해준 한 마디가 엄청 도움이 되었어’라고 상대방(증여의 수취인)이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그 순간, 나는 상대에게 증여의 발신인이 됩니다. 증여를 발생시킨 발신인이 기억하지 못해도 증여라는 선물은 성립됩니다. 달리 말해 의도가 없었더라도 증여는 성립되지요.”

위험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수많은 증여의 손길들.

받는 사람의 인식이 중요하군요?

“맞아요. 증여의 핵심은 수취인의 깨달음입니다. ‘이건 내게 도착한 선물(증여)이야’라는 그 깨달음. 수취인이 ‘받았다’라고 여길 때 비로소 증여의 발신인이 생겨난다는 거죠. 대개 증여 논의는 ‘주는 것’ 혹은 ‘주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저는 ‘수취인의 인식, 깨달음’으로 증여를 연구했습니다.”

증여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였어요. 일상의 온갖 인프라, 교통, 물류 등이 정지됐어요. 그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이 세상을 조금씩 떠받치고 있다, 서로 조금씩 분담해서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습니다. 저명한 사상가인 우치다 다쓰루 선생(‘무지의 즐거움’의 저자)에 의하면 증여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증여는 거의 가족 간의 재산 이동으로, 법적 용어로 쓰입니다. 일본에서는 어떤가요?

“일본에서도 ‘증여’라는 말은 증여세 등 법적인 단어로 많이 쓰입니다. 제가 쓴 철학적인 ‘증여’ 개념은 일본 독자에게도 새롭게 다가갔어요. ‘아, 그게 증여였구나.’ ‘부모에게 받은 모든 보살핌이 증여였구나’ 새삼 깨달은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미움받을 용기’를 쓴 기시미 이치로나 ‘운을 읽는 변호사’의 니시나카 쓰토무 등 일본의 인문학자들은 공헌감, 도덕철학, ‘운값’이라는 단어를 쓰더군요. 일본의 문화적 배경과 연관이 있을까요?

“일본에서 ‘증여’는 낯설지만 비슷한 단어는 여럿 있습니다. 이를테면, 은정(恩情), 은혜(恩惠), 의리(義理), 인정(人情), 보살핌, 도움, 지원, 은덕(隱德), 선행 등이 있죠. 중요한 것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무언가를 주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는 선물’은 기독교와 관련이 깊은데, 기독교도가 적은 일본에는 그런 종교적 경로와 다른 루트로 증여가 자리 잡았습니다. 촌락 사회를 지탱했던 상호부조 정신 같은 것들이죠.”

비트겐 슈타인의 언어 철학으로 증여의 원리를 밝혀낸 책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철학의 언어가 이토록 실용적일 수 있다니, 놀랍다.

책에서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나온 실화를 예로 들었더군요.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에 관한 스위스의 해당 주민 설문조사 결과는 불가사의합니다. 애초에 처리장을 받아들인다는 주민 찬성률이 51%였는데, 경제학자들이 고액의 보상금을 준다고 했더니 오히려 25%로 떨어졌다고요. 더 많은 보상을 이슈로 갈등을 빚는 한국 사회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스위스 지역 주민들은 원자력의 혜택을 받았으니, 자신들이 그 보답으로 처리장을 짊어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그런 무상의 선의를 돈으로 사려고 하자 반대로 돌아선 거죠. 시민으로서의 공헌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일본인들도 비슷하게 반응했을 겁니다. 그런 실험을 한다면, 주민들이 “사람 갖고 노나”라고 불쾌해할 겁니다. 보상금 즉 돈으로 낚으려는 의도에 불신감을 느낄 거예요. 결국 돈으로 민심을 사고 싶다면, 굳이 이 마을에 폐기물 처리장을 둘 필요가 없다고 반발하겠지요.”

─한편, 전통적인 경제학자는 증여를 싫어한다고 하셨어요.

“우선, 경제학자는 이른바 ‘제로섬 게임’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증여는 계측할 수 없고 수량화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죠. 즉, 증여는 시장경제라는 개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혼자서도 잘 사는 사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는 자유로운 자본주의 사회의 실체란 어떤 모습입니까?

“자신의 존재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상상해 보세요. ‘지금, 꼭 당신의 힘을 빌리고 싶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내가 나설 차례가 전혀 없죠.

그런 사회는 위험 부담에 대해 병적일 만큼 불안해하는 사회입니다.

질병 때문에 일을 못 하게 되거나 장애가 생기면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회에서는 금액적 가치를 낳지 못하게 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험 부담에 벌벌 떨 수밖에 없어요.”

금액적 가치를 낳지 못하게 되면 그걸로 끝인 사회. 그런 사회의 구성원들은 재난 앞에 벌벌 떨 수밖에 없다.

─교환으로만 작동하는 사회가 가능합니까? 그런 사회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교환으로만 작동하는 사회란 생산성이 있는 개체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인간은 어릴 때 생산성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생산성이 있는 개체만 살아남는 사회는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세대를 길러내겠다는 발상 자체를 할 수 없는 사회니까요. 그런 이유로, 교환으로만 작동하는 사회는 완전히 가상의 공동체입니다. 사실 그런 곳은 존재할 수 없죠.”

부모가 손주를 바라는 이유도 증여로 설명하셨어요. 자식에게 흘려보낸 사랑이라는 증여가 올발랐을까에 대한 의심에서 손주를 바란다고요. 그런데 요즘 세계적으로 특히 한국의 젊은이들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합니다. 사회적 증여가 메말랐기 때문일까요?

“일본의 경향도 한국과 비슷합니다. 증여의 감각보다 ‘교환 논리’가 지배력을 확대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아이를 낳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 경제적 위험 부담이 크다, 아이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제한된다,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다(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근거가 없다) 등등 ‘교환 논리’에 근거한 이유를 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증여 관점에서 저도 제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 즉 증여의 전사가 부족해서 자식 낳기를 거부했습니다. 서른 넘어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신이 태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나를 사랑했다’는 전사를 찾아냈고, ‘자식의 사랑을 받아보겠다’는 철없는 마음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부모에서 자식으로, 사랑의 증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을 때 다양한 심리적 역동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들려주신 경험은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한 에피소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이 겪은 전사(前史)도, ‘아이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계기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런 의도는 금세 뒤집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나를 원하는 아이의 시선을 마주하면 ‘이걸로 내 목적은 달성했다.’ ‘이익을 회수했다.’ 같은 생각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지 않나요. 그리고 아이를 위해 이런저런 돌봄을 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사명감이 싹트지 않나요.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부모가 아이에게 증여하고 아이로부터도 증여가 돌아오는 ‘서로 받기’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뇌가 완전히 자라지 않고 미숙한 채로 태어난 인간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류는 시작부터 ‘대가 없이 주고 받는 증여’가 운명처럼 정해졌다.

물론 육아에는 정말 많은 난관이 있고 모든 가정에는 제각각 다른 사정이 있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안았을 때 자연스레 샘솟는 사명감 같은 것을 호모 사피엔스가 애초에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도태되지 않고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거죠.

증여는 좁은 의미의 인과론이 아닙니다. 증여는 결과론이며 서사론입니다. 증여란 ‘이것이 내 인생이었다’고 다시 이야기하고, 다시 만남으로써 생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에서 과거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 때문에 저는 당신이 동기를 너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사랑이 있다면, 대체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상관없지 않습니까, 지금 사랑이 있다면.”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증여는 ‘값없는 은혜’더군요. grace, favor. 신에게서 받은 호의를 인간의 행위로 쪼갠 것이지요. 최초의 증여는 희생 제물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증여의 최초 발신자는 예수였다는 해석도 할 수 있고요.

“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제가 책에서 소개한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주인공 트레버도 예수를 모티프로 삼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제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트레버는 나쁜 부모 밑에서 힘든 성장기를 겪었고, 이 세계가 최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 없는 그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친절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증여의 시발점이었던 트레버는 싸우는 친구를 말리다 칼에 맞아 죽고 맙니다. 허무한 결말이라고요? 아닙니다. 증여의 기원은 ‘희생 제물’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전달되지 않아요.”

문득 궁금합니다. 사랑이든 물건이든 주는 사람이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을까요?

“‘이걸 너에게 줄게.’라고 명시적으로 밝히면, 상대방은 답례해야 합니다. 답례할 수 없는 경우 증여의 권력 구조에 의해 발신인의 지배를 받고 말죠. 그래서 상대방에게 증여를 건넬 때는 그 나름의 ‘작법’이 필요합니다. 유머를 섞는다든지,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눈치채지 못하게 전달한다든지.

가장 필요한 ‘윤리’는 생색내지 않는 태도입니다. 발신인은 자신의 증여를 망각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답례를 기대하고 마니까요. 증여의 발신인은 내가 주는 것을 잊는다는 각오로 주어야 합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증여의 출발점이 된 트레버. 증여의 전사가 없었기에 그는 희생 제물을 상징한다.

근미래에 이익을 회수하리라는 예정된 증여는 증여가 아니라 주기와 받기 사이에 시간 차가 있는 교환에 불과하다고 했다. 자기 욕망을 위해 아이를 통제하면서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위장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는 심리적으로 평생 ‘허구의 빚’에 시달리게 된다고.

일명 증여의 저주다.

증여에도 저주가 있다니 섬뜩했습니다.

“생색이 지나치면 저주가 됩니다. 증여의 저주는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납니다. 가령 “왜 공부를 안 하니? 네 학원비를 누가 내주는 줄 알아?” 이런 말은 네가 노력할 때만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등가교환입니다. 특히 답이 정해진 질문은 전형적인 저주의 수사법이죠.

생색을 내는 증여는 ‘교환’이라는 본색을 드러내고 그 즉시 답례의 의무가 생깁니다. 당장 줄 것이 없는 수취인은 부채 의식에 짓눌려 저주에 걸립니다.”

반대로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요?

“지성입니다. 우리 곁으로 끊임없이 도착하는 사회적 선물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선물을 깨닫기 위해 우리에게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의 도시 생활자는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내게 오는지 보지 못해요. 그래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홀가분하게 ‘고객’으로 지낼 수 있죠.

하지만 무언가 불운이나 재앙이 일어나 도시 생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럴 때도 고객 같은 마음가짐으로 있을 수는 없겠죠. 커다란 재해가 일어나면 행정까지 제 기능을 못 하니까요.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고객’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위기가 계속해서 미연에 방지되는 덕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필수 노동자에 대한 경의와 감사가 사라질 때, 우리의 생활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겁니다.”

세계의 취약성, 문명의 우연성. 이 평형을 떠받치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만들어내는 ‘누군가가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사실은 시시포스의 엄청난 노동으로 떠받쳐진 균형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명은 언덕 위에 선 불안정한 공이고, 무질서와 혼란으로 떨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이름 없는 ‘증여자’에 의해 존재해 왔다.

문득 ‘고객님’이라는 정체성이 부끄럽군요.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나 도시 인프라도, 위험을 무릅쓴 타인의 누적된 공헌이라는 걸 헤아리면 뭐라도 해야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맞아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만 해도 점검하고 수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처럼 생활에 필수적인 인프라가 문제없도록 관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들은 금전적인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것이지만, 그 사람들이 일을 대충 하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합니다.

저는 돌봄이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는 일 모두를 아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일, 돌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 눈에는 문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 ‘혹시 저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어떻게 이 사회가 돌아가지?’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유지 보수 노동자’를 볼 수 있습니다.

수취인에게 필요한 지성이 바로 그런 상상력이지요.”

이 세계의 취약성 이 문명의 우연성,이라는 선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평형을 떠받치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만들어내는 ‘누군가가 있다’는 자각…

“맞아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을 만들어내는 ‘누군가’라는 자각이 필요하지요. 이름 없는 영웅 가령 ‘매일 정비하는 사람들’처럼, 세계의 취약성을 인식하는 사람이야말로 ‘성숙한 어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환적인 인간관계만 쌓아온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주위에 증여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 자신 역시 증여의 주체가 아닌 경우, 그 사람은 매우 간단히 고독해집니다.”

“받은 것을 세어보는 상상력, 언젠가 나의 증여도 필요한 곳에 닿길 바라는 기도… 기도와 상상력으로 교환이 어긋난 세계를 이해하는 게 교양입니다.” 사진은 작업장의 필수 노동자들.

마지막으로 따뜻한 자본주의로 가기 위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육체적 연약함, 정신적 취약함을 자각하면, 자연과 세계에 넘쳐흐르는 증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치과에서 진료를 받을 때마다 마취가 개발되고 보급된 시대에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절감합니다.

의학, 과학기술, 위생, 사회복지 등 태어난 시대와 장소가 달랐다면 받지 못했을 앞선 사람들의 증여가 우리 주위에는 정말 많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시대나 장소에서 태어났다면?’이라는, 얼핏 단순해 보이는 상상력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받은 것을 세어보는 상상력, 언젠가 나의 증여도 필요한 곳에 닿길 바라는 기도… 그렇게 기도와 상상력으로 교환이 어긋난 세계를 이해하는 게 교양입니다. 증여의 감각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으로 우리는 타인에게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건네줄 수 있습니다. 세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유지되어 왔어요.”

애덤 그랜트는 ‘기브 앤 테이크’라는 책에서 단기적으로는 테이커가 많은 걸 가져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기버가 이긴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증여의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는 ‘이기적인 테이커’의 본 모습을 각성시켰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았구나!’라는 테이커의 깨달음. 그렇게 세상은 교환이 아닌 보이지 않는 증여(타인에 진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로 굴러가고 있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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