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서초구 호반건설 사옥. 사진=연합뉴스
최근 두 달간 한진그룹과 LS그룹이 잇따라 손을 잡으며 산업계에 새로운 연합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5월 말 대한항공과 LS일렉트릭이 국제해양방위산업전(MADEX)에서 항공우주·방위산업 기술 협약을 체결하고 LS그룹은 대한항공에 650억원 규모의 교환사채를 발행하는 등 두 그룹의 협력이 다각도로 확장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호반그룹이 한진칼과 LS 지분을 공격적으로 사들이며 재계 안팎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자산총액 16조8800억원 규모의 재계 35위 호반그룹은 한진그룹(12위·58조1700억원)과 LS그룹(15위·35조9500억원)과 비교해 자산 규모가 작지만 ‘현금 부자’로 꼽히는 만큼 추후 지분 확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24년 말 기준 호반건설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9711억원에 이르고 호반산업은 4710억원을 보유하고 있다. 호반 측은 한진칼과 LS 지분 매입 목적에 대해 “단순 투자”라고 밝히고 있지만 재계에선 특허소송(LS전선 vs 대한전선)에서 영향력 행사와 향후 대한항공 인수를 위한 치밀한 포석이라고 보고 있다.
단순 투자라지만…분쟁 도화선 되나
업계에서는 호반그룹의 공격적 지분 매입으로 대한항공의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이뤄진 한진그룹과 LS그룹의 연대를 두고 ‘반(反)호반 동맹’이 본격화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호반그룹은 최근 두 그룹 지주회사 지분을 공격적으로 매입했다.
한진칼 지분을 18.46%까지 확보해 조원태 회장 측(20.75%)과의 격차를 2.29%포인트로 좁혔고 자회사 대한전선과 LS전선의 특허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LS 지분도 3% 넘게 매입했다.
지분 3%는 상법상 소수주주 권한이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경영참여의 시작점이다. 지분 3% 이상 보유 시 회계장부 열람, 임시주주총회 소집, 이사 선임 제안, 집중투표 청구권 등 법적 권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여객기. 사진=로이터·연합뉴스
호반그룹의 지분 매입 사실이 알려지자 경영권 분쟁 가능성에 한진칼과 LS 주가가 급등했다. 호반그룹은 올 들어 지난 4월 말까지 한진칼 지분을 288억원어치 사들여 지분을 늘렸다. 이 소식이 시장에 전해지자 지난 5개월간 한진칼과 LS 주가는 각각 95.71%, 65.50% 올랐다.
호반그룹의 한진칼 지분 확대는 항공업 진출과 연관이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호반그룹이 과거 아시아나항공의 모기업이었던 금호산업 인수전에 참전해 항공업 진출을 시도한 바 있어서다.
2015년 호반건설이 아시아나항공의 최대주주였던 금호산업 매각 본입찰에 단독으로 참여했지만 6007억원을 제시해 채권단의 매각 예상 금액에 못 미쳐 불발됐다.
대한전선의 최대주주인 호반이 경쟁사인 LS전선의 모기업 지분을 확보한 것은 경영정보 접근과 견제를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향후 경영권 분쟁 가능성, 지분 가치 상승 등도 겨냥한 복합적 행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른바 ‘그림자 내부거래’가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그림자 내부거래란 공식적인 내부자 신분이 아닌 제3자가 내부 정보를 간접적으로 입수해 주식거래에 이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A사가 경쟁사인 B사 주식을 몰래 사들여 경영에 개입하거나 외부 제3자를 내세워 계열사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등이 해당할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호반 측이 한진칼, LS 지분을 매입해 주요 주주로 부상했고 경영권 분쟁 기대감에 주가가 상승하면서 평가차익, 경영권 분쟁 발생 시 협상력, 경쟁사 견제, 전략적 존재감 확대라는 금전적·비금전적 이익을 동시에 얻었다”며 “저비용 고효율의 투자를 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서울 용산구 LS용산타워. 사진=한국경제신문
판 흔드는 호반, 2세 김대헌 체제 강화 포석
두 그룹 지분 확대가 단순투자 이상의 전략적 행보이자 호반그룹 2세 승계용 밑작업이라는 해석도 있다. 호반그룹 창업주인 김상열 회장은 3남매 중 이미 장남 김대헌 호반그룹 기획총괄사장에게 사실상 승계를 마무리했다. 김대헌 사장은 호반건설 지분 54.73%를 가진 최대주주로 핵심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김 회장의 3남매 중 장녀 김윤혜 호반프라퍼티 사장은 호반프라퍼티를 중심으로 유통과 호텔·리조트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차남 김민성 호반산업 전무는 호반산업을 중심으로 제조와 전선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호반산업은 2021년 국내 2위 전선업체 대한전선을 인수하며 LS전선과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됐다.
호반그룹 지배구조. 그래픽=정다운 기자
장남 김대헌 사장은 핵심 계열사인 호반건설과 신성장동력인 대한전선에 관여하며 건설·전선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번 지분 확대는 3남매가 각각 담당하는 사업 간 시너지 확보와 장남 중심의 체제 집중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대한전선이 연매출 3조원을 넘어서며 호반의 현금 창출원으로 급부상한 점은 김 사장의 기반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88년생으로 올해 38세인 김 사장은 경희대 골프산업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2011년 그룹에 합류해 2017년 미래전략실 전무, 2018년 미래전략실 부사장을 거쳐 입사 9년 만인 2020년 말 호반건설 기획부문 대표 사장으로 승진해 2세 경영 시대를 열었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그룹의 최대주주에 올라섰으나 호반그룹 내 주요 의사결정과 핵심 현안 대부분이 여전히 김 회장 주도로 이뤄지고 있고 김 사장이 단독으로 주도한 대규모 프로젝트가 부재해 부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자적 경영자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호반건설 대표로 실질적인 경영을 맡은 기간이 짧아 대규모 사업 확장이나 위기 상황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입증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결국 호반그룹의 지분 확대는 단순한 지분 확대를 넘어 2세들의 안정적인 사업 분산과 시너지 구축을 통해 통합력을 높이면서 김 사장의 독자적 경영 기반 확보가 주목적이라는 해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진그룹과 LS그룹의 긴밀한 협력은 호반의 확장에 대응하는 ‘반호반 동맹’으로 재계 내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호반이 현금력을 바탕으로 주요 그룹에 전략적 지분을 쌓아가는 모습은 단순 투자라기보다 향후 경영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며 “이 같은 움직임은 대기업 지배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경비즈니스
안옥희 한경비즈니스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