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취임 후 첫 100일을 기념한 행사를 열었다./AFP 연합뉴스
대통령의 첫 100일은 사실상 리더십의 성패를 결정짓는 시기다. 이 기간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내고 어떤 정책을 우선순위에 두는지에 따라 정권의 운명이 사실상 결정된다.
첫 100일이 중요한 이유는 선거에서 승리한 기운이 이어지고 정권의 신선함이 유지되는 ‘허니문 기간'이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사례는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100일의 법칙’을 무시하면 향후 5년의 국정 운영은 방어전으로 전락할 수 있다. 반대로 초반의 신뢰와 성과는 불리한 상황마저 역전시킨다.
문재인 정부의 대표 정책인 ‘문재인케어’도 취임 100일 안에 시작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초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선언했다.
새 정부의 ‘첫 100일(First 100 days)’이란 단어는 미국 제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처음 썼다. 대공황의 위기에 취임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과 ‘노변정담(fireside chat)’을 모두 취임 100일 안에 시작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첫 100일 동안 대공황을 극복하고 경제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 100일을 ‘뉴딜정책의 출발에 헌신한 100일’로 자평했다.
이후 ‘대통령의 첫 100일’은 미국에서 새 정부의 성패를 가늠하는 상징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중 첫 100일 동안 140건이 넘는 행정명령을 쏟아냈다. 이 중에는 대규모 관세 부과와 이민자 대량 추방 같은 파격적 조치들이 포함됐다.
문재인·윤석열의 100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첫 공식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대통령실사진기자단
한국에서도 대통령의 100일이 정치 탄력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 여겨진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인수위 없이 출범해 속도감 있게 국정 운영에 나섰다.
취임 10일 만에 윤석열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전격 임명하며 검찰개혁에 나섰고 탈원전 선언,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등의 핵심 어젠다를 실현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100일 안에 굵직한 부동산 대책도 2개나 나왔다. 이처럼 빠른 속도의 국정 드라이브는 당시 높은 지지율이 뒷받침한 덕이었다. 취임 100일 시점에 문 전 대통령 지지율은 70%를 웃돌았다. 정권 말 탈원전, 부동산정책, 소득주도성장 등이 모두 시험대에 올랐고 실패로 돌아갔지만 정부의 상징성이나 어젠다만큼은 확실했다.
문 전 대통령의 취임 당일 첫 일정은 야당 방문이었다. 열흘 뒤 여야 5당의 원내대표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갖고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구성에 합의했다. 그 결과 문 정권은 취임 100일 내에 추가경정 예산, 정부조직법 개정 등 새 정부 초기 국정운영에 필요한 필수적인 입법 과제들을 해결했다.
윤석열 정부의 첫 100일에도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한·미 정상회담, 6·1 지방선거 등 굵직한 이벤트가 치러졌다. 새로운 상징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100일 동안 인사 논란, 독선적인 국정, 집권 여당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리더십에 위기가 왔다. 자유, 공정과 상식의 가치를 앞세우며 취임 초 53%까지 지지율이 올랐지만 100일도 되지 않아 20%대로 주저앉았다.
특히 협치가 실종됐다. 윤 전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이할 때까지도 대통령과 야당 대표 회동은 성사되지 않았다. 문재인·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은 각각 취임 10일, 한 달 반, 두 달 반 만에 여야 원내대표 혹은 당대표와 회동했다. 이재명의 100일
이재명 대통령이 4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인사브리핑에서 새 정부 첫 인사 발표를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대통령실 사진기자단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당일 ‘1호 명령’으로 비상경제점검 태스크포스(TF)를 신설했다. 이 대통령은 저녁 오후 7시 30분부터 2시간 20분 동안 비상경제점검 TF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의 주요 현안은 추가경정예산(추경)이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중소기업벤처부, 금융위원회 등의 차관·차관보, 실국장급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추경을 위한 재정 여력을 살폈다. 추경을 위한 재정 여력과 추경이 가져올 즉각적인 경기 진작 효과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적극적인 경기 민생 진작 대응과 리스크 관리를 주문했다.
새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경제 살리기’라는 판단이 깔렸다. 이와 함께 대미 통상 현안 및 추진 방향에 대해 의견을 청취하고 최근 경기 및 민생 현안 문제점과 대응책을 논의했다.
신속한 경제 대응을 위한 추경 편성은 역대 정부도 임기 초마다 선택한 카드다. 재정당국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모든 정부는 대통령 취임 100일 이내에 추경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윤석열 정부는 불과 취임 이틀 만에 추경안을 통과시켰고 추경 규모는 59조4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까지 57일이 걸렸지만 여당 내 반대에 막혀 실제 집행은 취임 1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새 정부가 경제 부문에서 ‘속전속결’로 나가겠다는 의지는 대통령 발언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인선을 발표한 뒤 기자들과 만나 “지금 당장은 바로 시행할 수 있는 경제 회생 정책이 필요하고 가장 핵심은 추가경정예산 편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오늘 저녁이라도 관련된 모든 부처의 책임자뿐 아니라 실무자들까지 다 모아서 당장 할 수 있는 경제 회생 정책이 무엇인지 규모와 방식, 절차를 최대한 점검해보겠다”고 말했다.
지난 9일에도 이 대통령은 "경기 회복과 소비 진작 차원에서 속도감 있게 추경(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라"고 지시했다.
외교·안보 역시 100일 안에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숙제다. 전문가들은 향후 대미 통상 협상이 새 정부의 지지율을 좌우할 변수라고 진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과 관세를 연계하려는 전략을 유지하고 있어 단순한 무역 문제를 넘어선 국가 경쟁력의 시험대라는 것이다. 미국과의 통상 협상 시한은 한 달 뒤로 바짝 다가와 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6개월 동안 정지 상태였던 정상 외교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취임 사흘 째인 지난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20분가량 전화 통화를 했고, 9일에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통화하며 외교 첫 단추를 끼웠다.
외교가 안팎에서는 윤석열, 문재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두 취임 직후 미 대통령과 즉각 통화한 전례에 비춰볼 때 미국 정상과의 통화 지연은 우려되지만, 중국보다 일본 정상과 먼저 통화한 건 실용 외교 노선을 명확히 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의 첫 외교 무대 데뷔는 오는 15∼17일 캐나다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