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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대기자
이재명 새 대통령은 어렸을 때부터 셈이 밝았던 듯하다. 16세 소년공부터 대학 신입생까지의 일기. “목걸이 공장. 한 달에 1만원 받기로 하고.(쌀 한가마는 3만5천원) 오늘 회사에서 얘기들 하는 데 한국 돈 가치가 떨어져 1dollar당 580원. 정기적금 18% 이자가 24%로 인상됐다. 물가가 막 오를 것 같다.” “처음으로 저금통장이란 걸 만들었다. 장학금 20만원 중 2만원 찾고, 나머지 18만원은 보통예금 했다. 이번 달엔 집에 10만원 갖다주기로 했다”(1980년) “새 책을 9000원씩 달라 해서, 청계천 헌책 상회 가서 7000원주고 행정학 책을 샀다. 병영 집체 교육 추리닝도 한 벌 4500원에 샀다. 기지(옷감)도 나쁘지만 학교에선 9500원씩 비싸서….”(1982년)

가난 앞에서 생계·생존을 위한 ‘계산’과 ‘비교’, ‘균형’을 잡아야 했던 흔적이다.

DJ만큼 어려운 과제들 놓여 있어
모든 선택에 ‘실천의 지혜’ 필요
선택 따른 위험 최소화할 계산과
시대 요구 우선하는 지혜 발휘를

33년 뒤 대통령이 된 그의 취임사에서 꼭 지켜졌으면 하는 구절이 들린다. “지속적 성장 발전 사회를 위해 유연한 실용 정부가 될 것”이다. ‘실용’이 이어진다. “이제부터 진보의 문제도, 보수의 문제도 없다” “낡은 이념은 역사의 박물관으로”, 그리고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필요하고 유용하면 구별 없이 쓰겠다.” 이 대통령이 평소 좋아하던 영화 대사는 “뭐이를 마이 멕이야지, 뭐”(『웰컴 투 동막골』)다. 인민군 장교가 촌장 노인에게 “고함 한 번 안 지르고 휘어잡는 영도력의 비결이 뭐냐”고 물은 뒤였다. “상인의 현실 감각과 서생의 선비 의식을 겸비해야”(김대중), “진보든 보수든 다 잘 먹고 잘 살자는 얘기 아니냐”(노무현)는 맥락이겠다. ‘잘 먹고’(경제 성장, 복지)와 ‘잘 살고’(정의·공정·평등)가 조화를 이루는 그런 사회 말이다.

이 대통령 앞의 위급한 과제가 수북하다. 부도난 국가를 앞에 둔 DJ에 버금갈 정도다. 위기 극복의 리더십은 유연한 실용, 균형이 골간이다. 그 철학적 토대가 바로 ‘프루던스(Prudence)’다. 대개 ‘신중함’이라 번역되는 그 단어다. 라틴어 Prudentia로부터 출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왕, 통치자의 미덕”이라고 지칭했던 그 덕목이다. 마키아벨리~데카르트~파스칼 등의 수백 년 논박을 거쳐, “정치에 있어서 제일의 미덕”이라고 에드먼드 버크 역시 프루던스를 첫손 꼽았다. 신중한, 사려 깊은, 차분한, 분별 있는, 절제된, 세심한, 결과를 예측하는, 빈틈없는 등의 총합이다. 정치적 적(敵)들이야 거꾸로 원칙 없는, 비겁한, 타산적, 이기적인 등으로 비난할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다. 특히 메스로 째는 외과 수술처럼 화끈, 선명한 결단을 좋아하는 강성 진보들에게야 영 마뜩지가 않다.

프루던스의 실현을 위해 필수적인 방법이 세 가지 있다. 첫째, 반드시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위험 부담’을 헤아려야 한다. 막스 베버가 정치가의 자질로 ‘책임 윤리’를 꼽았던 맥락이다. 그가 이끄는 공동체가 전부 나락으로 떨어질 수있으니 말이다. 온 나라를 수렁에 빠트린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가혹한 부동산 징벌 과세로 집값 올려 서민의 꿈을 앗아간 문재인 정부 정책 등이 사례다. 새 정부의 대법관 증원 같은 이슈 역시 ‘정의’였든 ‘분노’였든, 잠시 숨 고르고 그 위험까지도 충분히 숙고해 봐야 할 까닭이다.

둘째, 위험 최소화를 위해 최대한 ‘계산’하라는 명령이다. 새 정부가 선호하는 지역화폐, 기본소득 유의 정책들, 좋다. 서민 복지, 불평등 해소의 ‘선의’였을 터다. 그러나 정치가가 맞닥뜨린 상황이란 늘 변화무쌍이다. 우연, 편견과 변덕 여론까지 뒤죽박죽이다. 그러니 모든 지식, 이성을 동원해 추상적 관념에 따른 선택 결과를 계산하라. 지옥으로 가는 길은 늘 선의로 포장돼 있으니 말이다.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후유증에서 보듯 진보의 가장 취약한 지점은 늘 결과에의 계산이었다. 대개의 답은 “낮과 밤의 경계선을 명확히 찾진 못해도 밝음과 어두움이 무리 없이 분별되는”(버크) 수준이면 족하다.

세 번째 필수는 선택의 ‘시기(時機)’다. 그때, 그 시대의 요구를 찾아 수용하라는 준칙이다. 쉽지 않지만 모든 대 정치가들의 공통 자질이었다. 새 정부의 ‘내란 세력 척결’과 ‘국민통합·경제 살리기’가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할 근거다. 결코 무한하지 않은 게 바로 대통령의 시간과 에너지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선택의 우선 순위와 수위들을 조정해 가는 것, 그게 프루던스다.

프루던스의 적용이 가장 어려운 곳은 외교와 국제정치다. 심판도 없이 각자 힘을 과시, 사용하는 주권국가들의 난투극 속에서다. “우리 외교 근간은 한·미 동맹” “북한과의 평화가 바로 경제” “중국·러시아와 관계도 도외시 말고 불필요한 적대할 필요가 없다.” 이 대통령의 방향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고도의 외줄타기에서 추락 않으려면 절대 이상주의적 관념에 치우쳐선 안 되는 게 외교의 프루던스다. “평화는 힘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국제정치의 진리 때문이다. 특히 북한·일본 관계에의 프루던스가 절실하다. 새 정부가 잘해 줘야 나라가 산다. 늘 ‘프루던스’해 주길 기대해 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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