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중 75%가 기업 후원 축소돼…존립 여부 불투명
미 기업들, 트럼프 반(反) DEI 정책에 눈치 보기 돌입
스코틀랜드 대법원 판례 등 국내 상황도 영향 끼쳤다는 분석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다양성 정책(Diversity, Equity, Inclusion·DEI)’ 철회 움직임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이 DEI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을 의식해 후원을 잇달아 중단하면서 영국 전역에서 성소수자 축제들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축소되고 있다.
로이터통신
4일(현지 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영국의 성소수자 축제 기획 네트워크인 UKPON(UK Pride Organisers Network)은 올해 행사조직위원회 중 약 75%가 기업 후원 축소를 겪었으며 이 중 25%는 후원금이 절반 이상 줄었다고 밝혔다. 이에 일부 행사는 아예 취소되거나 규모가 크게 줄어드는 상황이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행사는 오는 7월 5일 개최 예정인 ‘프라이드인런던(Pride in London)’이다. 매년 160만 명 이상이 찾는 이 행사는 약 170만 파운드(약 29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며 대부분 기업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는 수년간 후원을 이어온 주요 미국계 기업들이 대거 후원을 접으면서 개최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프라이드인런던의 크리스토퍼 조엘 디쉴즈 최고경영자(CEO)는 “글로벌 후원사 가운데 미국 기업들이 DEI 후퇴 흐름을 반영해 지원을 끊고 있다”며 “예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라고 말했다.
지방 소규모 행사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6월 성소수자 인권의 달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를 맞아 예정됐던 행사들이 잇따라 취소됐으며 사우샘프턴, 헤리퍼드, 토턴 등 영국 전역의 지역 퍼레이드가 무산됐다. 남부 항구 도시 플리머스는 정식 행사를 포기하고 지역 커뮤니티 주도의 대체 행사를 열 계획이다.
이 같은 흐름은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DEI 정책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하면서 본격화된 것으로 분석된다. 트럼프는 기업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이른바 ‘워크자본주의(woke capitalism)’에 반대 입장을 내세우며 기업들에 관련 활동 중단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미국 기업들은 정치적 중립성을 명분으로 성소수자·인종 평등 관련 후원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리서치업체 그래비티리서치가 지난 4월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 기업인 5명 중 2명은 올해 프라이드 관련 활동을 축소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며 전체 기업의 40%는 이로 인한 소비자 반발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영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후원 철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스코틀랜드 대법원이 ‘법적 성별은 생물학적 성을 기준으로 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트랜스젠더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자 일부 기업들이 아예 관련 행사 후원에서 손을 뗐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프라이드인에든버러(Pride in Edinburgh) 행사 공식 홈페이지에는 올해 공식 후원사가 단 5곳만 등재됐다. 이 중에는 독일계 대형마트 리들(Lidl), 영국 유통업체 테스코(Tesco) 등이 포함돼 있지만 예년의 13곳에 비하면 대폭 줄어든 수치다. 프라이드인런던 역시 저스트잇(Just Eat), 딜로이트(Deloitte), 스카이스캐너(Skyscanner) 등 오랜 기간 후원해온 주요 기업들이 올해 스폰서 명단에서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프라이드인에든버러 마케팅 책임자인 제이미 러브는 “후원에 나선 기업 수 자체가 현저히 줄었다”며 “올해는 가장 메마른 해(driest year)”라고 토로했다.
행사 기획 단체들은 존립을 위한 새로운 수익 모델을 모색 중이다. 디 루엘린 UKPON 의장은 “지자체 보조금 확대, 무료 행사에 입장료 부과 등 다양한 수익 모델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성소수자 단체 엘지비티히어로(LGBT HERO)의 이안 하울리 CEO는 “정치적 상황이 정리된 뒤 기업에 다시 협찬을 요청할 수는 있겠지만, 커뮤니티는 그들의 부재를 기억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선비즈
현정민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