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오른쪽)가 지난 3월 14일 백악관을 떠나 플로리다 마러라고 자택으로 향하기 전 대화하는 모습. 워싱턴/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의 갈등이 파국으로 마무리되는 모양새다. 머스크가 소셜미디어 엑스(X)에 올린 트럼프 대통령 공격 게시글 일부를 삭제하는 등 숨 고르기에 들어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와 끝났다”며 선을 그었다. 이번 ‘동맹 붕괴’ 배경엔 대선을 계기로 손잡은 ‘테크(기술) 우파’와 ‘포퓰리스트 우파(마가)’ 간 이념적 간극이 자리하고 있다. 공화당의 대선 승리를 이끈 이 조합이 해체되면 내년 중간선거는 물론 차기 대선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머스크 트럼프 비판 트윗 삭제했지만, 트럼프 “관계 끝났다”
머스크가 최근 엑스에 게시한 트럼프 대통령 비난 글 중 일부를 삭제한 것으로 7일(현지시각) 확인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문서에 언급됐다고 주장하는 글과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하고 제이디 밴스 부통령으로 교체하자’는 게시물에 “예스”라고 답한 글 등이다. 스페이스 엑스와 항공우주국(NASA)간 협력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트럼프와 머스크가 함께일 때 훨씬 더 강하다’는 한 지지자의 발언에 “틀리지 않는다”고 답하기도 했다.
중재 시도도 물밑에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봉합은 쉽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밴스 부통령은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머스크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전방위적인 비난에 나선 것은 큰 실수”라며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얻기 어려울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엔비시(NBC) 뉴스와 전화인터뷰에서 머스크와 관계를 회복하길 원하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와의 관계가 끝난 것으로 보냐는 물음에 “나는 그렇게 추정한다”고 답했다. 머스크와 대화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엔 “나는 다른 일을 하는 데 너무 바쁘다. 그와 대화할 의향이 없다”며 “그가 대통령직에 대해 무례했다. 매우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나사 국장 후보 지명 철회로 폭발…“트럼프, 머스크 추궁”
‘동맹 붕괴’는 누적된 갈등의 결과지만, 결정적 국면은 머스크의 측근이자 차기 항공우주국 국장 후보였던 재러드 아이잭맨의 낙마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지난주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진행된 머스크의 공식 환송 행사 직전, 트럼프 대통령은 보좌관으로부터 한 파일을 건네받았다. 그 안에는 아이잭맨이 최근 몇 년간 민주당 인사들에게 기부한 내역이 담겨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사 도중 분노를 억누르며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했지만, 카메라가 꺼지자마자 머스크를 추궁했다고 한다. 머스크는 “아이잭맨은 일 잘하는 사람이자 양당 모두에 기부했던 많은 인물 중 하나”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등을 돌릴 것”이라며 설득에 응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머스크는 아이잭맨의 낙마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는 백악관과의 관계 단절을 촉진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머스크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공개 비판했고, 재무장관 스콧 베선트와 격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 효율성부 ‘도지’의 운영으로 행정부 내에서 반발을 샀고, 장담하던 ‘2조 달러 감축’도 달성하지 못했다. 트럼프 1기 백악관의 수석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은 “트럼프 대통령이 도지가 헛소리라는 걸 알게 됐고, (머스크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고 평가했다.
■갈등의 본질은 마가와 기술진보의 결별
동맹 붕괴의 계기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으로 이름 붙여진 감세법안이었다. 하지만 배후에는 이번 대선을 계기로 손잡은 공화당 내 두 진영인 ‘기술 우파’와 ‘마가’ 간 이념적 갈등요소였던 ‘이민자’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이날 폴리티코가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가 진영은 1550억 달러가 투입되는 대규모 이민 단속 및 추방 예산을 이번 법안의 핵심 정당성으로 내세우고 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경 보안 및 추방 조치를 포함하고 있는 ‘보수운동의 결정적 성취’라는 게 마가 쪽 입장이다.
반면, 기술 우파의 대표격인 일론 머스크는 해당 법안이 대규모 재정적자를 낳을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테크 분야 보조금이나 투자 항목 삭감으로 도지가 추진하던 기술혁신 관련 프로그램들도 축소될 운명에 처했다. 머스크는 “기술 혁신을 이끌 부문에 대한 지원은 줄이고, 정치적 목적의 지출만 확대됐다”고 비판했다. 전기차에 제공되는 보조금이 대폭 축소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민자 제한’을 국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는 마가 진영과, ‘재정 건전성과 기술 혁신’을 우선 가치로 삼는 기술 우파간 충돌은 지난해 12월 이미 한차례 펼쳐졌다. 당시 마가 진영의 스티브 배넌은 고급 기술 인력을 대상으로 하는 H-1B 비자 폐지를 주장했다. 머스크는 이민이 미국 경제의 역동성을 이끄는 동력이라며 반대 입장을 표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머스크 편에 서며 갈등은 봉합됐다.
폴리티코는 “이번 사태는 트럼프 공화당 내에서 ‘이민’이 절대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라며 “이민자에 대한 태도 차에 따른 균열이 점점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머스크, 미국 정치 흔들까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공화당 지지층에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 지지층에서 머스크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젊은 남성층과 같은 공화당의 비전통적 지지층으로부터 기반을 확보하고 있어 공화당 내부 결속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변수로 꼽힌다.
둘 간 충돌은 당장 공화당이 추진 중인 감세 법안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법안은 하원에서 1표 차로 통과됐다. 상원을 거쳐 다시 하원을 통과해야 하는데, 상·하원 모두에서 1,2표차로 법안 운명의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머스크가 여론전에 나설 경우 법안 통과를 장담할 수 없을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 머스크가 감세 법안에 찬성한 공화당 의원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민주당 후보들을 후원할 경우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폴리티코는 “머스크가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해 공화당의 얼굴이 될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의 입법 전략과 2026년 중간선거 구상에 중대한 혼선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혼란 유발자”라고 평가했다.
머스크가 정치적으로 독자 노선을 모색할 경우, 그 여진은 2026년 중간선거와 2028년 대선까지 이어질 수 있다. 머스크는 6일 저녁 엑스에서 진행한 여론조사를 근거로 “중도층 80%를 대변할 새로운 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제3정당 창당을 시사했다.
한겨레
김원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