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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명물 '성삼문 오동나무' 싹둑
국가유산 담당 부서, 문화경관 훼손 주체
예산 들여 심고, 베고, 다시 심는 행정
‘성삼문 오동나무’가 베어졌다. 나무가 잘린 뒤 절개선이 선명히 남았고, 나무껍질 위로 켜켜이 쌓였던 기억들은 희미해졌다. 이번에 잘려나간 이 나무는 1950년대 성삼문 선생 생가 옆에 있던 개체가 고사한 뒤,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고 다시 자라는 과정을 반복하며 대를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홍성=하상윤 기자


충남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에는 조선시대 충신 성삼문과 연이 깊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아버지 성승이 성삼문의 과거 급제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나무에 북을 매달아 쳤다는 일화는 조선 후기 대학자 우암 송시열이 펴낸 ‘송자대전’에 실릴 만큼 널리 전해진다. 오랜 세월 나무가 가지를 드리웠던 이 자리는 성삼문의 외가 터이자, 그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5호(성삼문선생유허지)로 등록돼 보존되고 있다. 비록 ‘성삼문 오동나무’는 보호수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아니지만, 지역민들에게 오래도록 살아있는 충절의 상징이자, 지역 정체성이 반영된 문화경관의 일부로 여겨져 왔다.

성삼문선생유허지의 한쪽 귀퉁이에 오동나무가 잘게 잘린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홍성=하상윤 기자


그런 나무가 사라진 건 지난 5월 4일이었다. 홍성군청이 성삼문선생유허지 일대에 ‘성삼문 선생 매죽헌 쉼터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성삼문 오동나무를 베어낸 것이다. 홍성군 측은 5월 중순, 지역 언론의 보도가 나간 뒤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뒤늦게 파악에 나섰다. 당시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내놓은 대답은 “나무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 그런데 정말 아무도 몰랐던 걸까? 한 마을 주민은 “작업자들이 벌목 준비하는 걸 보고, 놀라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우려를 표했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쉼터 조성 사업 공사로 성삼문선생유허지 내 둔덕이 파헤쳐져 있다. 오른쪽 사진은 현장에 배치된 공사안내판.


성삼문 선생 매죽헌 쉼터 조성사업 조감도. 성삼문 선생의 외가 터와 '성삼문 오동나무', 후계목들의 존재는 모두 지워졌다. 선생의 호(매죽헌)를 참고해 단순히 매화와 대나무를 조경 요소로 활용할 뿐, 역사적 공간에 대한 고증은 전무하다. 홍성군청 측은 성삼문 오동나무 벌목 사태 이후 쉼터 설계를 수정한다고 밝혔다. 홍성군청 제공


성상문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 성삼문선생유허지 내 외가 터는 현재 쉼터 공사로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는 반면, 홍성군은 최근 유허지에서 500m 떨어진 '노은리 고택'의 안내문 문구를 '성삼문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로 고쳐 놓았다. 공교롭게 아래 영어 설명은 원래 상태로 남아 있다. 홍성=하상윤 기자


현장에 설치된 공사안내판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참담함이 더해진다. 교목 8주와 관목 243주를 철거하고, 새 교목 1,596주와 관목 2,560주, 초화류 4,840본, 잔디 1,965㎡를 심는다는 구체적인 벌목 및 식재 계획이 명시돼 있으며, 공사감독은 ‘홍성군청 문화관광과 국가유산팀’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안내문 맨 위에는 파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모두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합시다.' ‘몰랐다’는 말은 행정의 책임을 지우기엔 너무나 가볍다. 공사를 감독한 주체가 ‘국가유산팀’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착오나 실수가 아니라 체계적 무지 혹은 책임 회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안내판 위치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귀퉁이에는 오동나무가 잘게 잘린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오동나무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지만, 유허지 한가운데서 100년 넘게 자라온 은행나무도 함께 잘려나가 그루터기로 남았다.

잘린 건 성삼문 오동나무 뿐만이 아니다. 유허지 한가운데서 100년 넘게 자라온 은행나무도 함께 베어져 그루터기로 남았다. 홍성=하상윤 기자


지난 행보를 돌이켜보면 홍성군과 충청남도는 성삼문 오동나무의 존재를 몰랐던 게 아니다. 오히려 지역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해왔다. 충남도 산림환경연구소(현 산림자원연구소)는 2011년부터 3년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의뢰로 국립산림과학원과 함께 성삼문 오동나무의 대량 증식을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 모수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후계목 500여 그루가 생산됐다. 이후 이 나무들은 성삼문선생유허지를 비롯해 세종시 문절사, 논산시 성삼문 묘역 등 도내 여러 곳에 보급됐으며, 최근엔 충남도청 인근에 조성 중인 홍예공원 내 ‘후계목 정원’에 이식되며 도청 보도자료에도 이름을 올렸다.

2014년 3월 2일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성삼문선생유허지에서 열린 영정 봉안식 및 오동나무 식재 행사에서 김석환 홍성군수를 비롯한 내빈들이 성삼문 오동나무 후계목을 심고 있다. 11년 동안 이 나무는 울창하게 자라났지만, 지난달 초 홍성군이 ‘성삼문 선생 매죽헌 쉼터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모수와 함께 벌목됐다. 오른쪽 사진은 왼쪽 사진과 동일한 위치. 애써 심어 키운 나무는 모두 잘려나가고 공사 구간을 알리는 파란색 깃발만 남았다. 연합뉴스·하상윤 기자


2014년에는 홍성군수가 손수 유허지 입구에 후계목을 심고 군청이 이를 홍보하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당시에 식재된 후계목들은 이번 사태 때 모수와 함께 다 잘려나갔다. 홍성군은 논란이 커지자, 산림자원연구소에 남아 있던 후계목을 다시 유허지에 옮겨 심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많은 시간과 예산을 들여 후계목을 보급하고, 다시 예산을 들여 베어내고, 문제가 되니 또 예산을 들여 같은 자리에 같은 나무를 심겠다는 이야기다.

최근엔 충남도청 인근에 조성 중인 홍예공원 내 ‘후계목 정원’에 이식된 성삼문 오동나무 후계목 모습. 홍성=하상윤 기자


이번 사태는 단순히 나무 몇 그루를 자른 일로 갈무리하기 어렵다. 끝끝내 신분을 밝히길 거부한 마을 주민은 커다란 그루터기 앞에 서서 넋두리하듯 말했다. “오랜 세월 문화재와 수목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경관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됐다. 쉼터를 조성한다는 미명 아래 더 큰 훼손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엔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가 축적된 그 나무 몇 그루면 충분했다.”

지난 2025년 1월 1일, 성상문선생유허지에서 바라본 일출. 성삼문 오동나무(오른쪽)와 100년 은행나무(가운데), 성삼문 오동나무 후계목(왼쪽) 뒤로 새해 첫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이제는 영영 만날 수 없는 풍경이 됐다. 독자 제공


편집자주

아메리카 원주민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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