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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서재]
박정민 출판사 '무제' 대표의 서재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올해 1년간 연기 중단을 선언하고 부업인 출판사 대표 일에 매진하고 있는 배우 박정민. 그가 서울 마포구에 있는 출판사 '무제'의 서가 앞에 섰다. 박시몬 기자


본업은 잘나가는 배우, 부업으로 출판사를 운영한다. 배우 박정민(38)은 올해만큼은 출판사 '무제(無題)' 대표로 본업을 바꿨다. 1년간 연기 중단을 선언한 그는 서울 마포구에 있는 출판사로 매일 출근한다. 오전 6시에 나와 자정쯤 퇴근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한 달 전 야심 차게 내놓은 '듣는 소설' 프로젝트의 첫 번째 책, 김금희 작가의
'첫 여름, 완주'
홍보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를 지난달 16일 무제 사무실에서 만났다.

출판업에 뛰어든 이유가 뭘까. "출판사 일은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지금 재미있는 일을 되는 대로,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해보려고요." 담백한 답이 돌아왔다. 재미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건 아니다. 그는 인근에서 2019년부터 2년 가까이 독립서점 '책과 밤, 낮'을 꾸렸다. 그동안 읽었던 재미있는 책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서였다. 서점을 운영하다 출판업으로 관심이 뻗었다. 소문난 애서가인 그는 "책을 만드는 건 또 어떤 재미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1인 출판사를 차렸다.

"책이 좋아서… 내가 재밌어서 하는 일"

배우 박정민이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출판사 '무제'에서 그가 좋아하는 책들로만 가득 채운 책장 앞에 앉아 있다. 박시몬 기자


단출한 사무실은 그의 작업실이자 서재다. 업무 책상 뒤 한쪽 벽면을 그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 채웠다. "스무 살 때부터 책을 모았는데 여기 책들은 30대 초반부터 수집했어요. 최신 버전 책장인 셈이죠."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진 책과 거리가 멀었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본 게 전부다.

우연한 계기로 독서의 재미에 눈을 떴다. 대입을 앞둔 2004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화과에 지원했다 떨어진 그는 고려대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연기를 하고 싶었던 그는 한 학기 만에 대학을 그만두고 대형서점 내 문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무료하던 차 고교 동창인 배우 조현철이 언급한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를 집어든 게 시작이다. 좋아하던 컴퓨터 게임도 끊고, 2주도 안 돼 김 작가의 책을 독파했다. 독서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이때 읽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은 그가 항상 '인생 책'으로 언급한다. 그는 "특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마음속에 품은 채 해결되지 않던 열등감에 괴로워하던 당시 스무 살 청년에겐 인생 책이었다"고 했다. 김영하, 박민규로 시작해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베르 카뮈까지 마구 읽어 내려갔다. 독서에 입문한 그는 이듬해 두 번째 도전 끝에 한예종에 입학했다. 독서와 영화 인생이 나란히 시작됐다.

고전·문예지도 탐독… "좋은 소설 읽으면 기분 좋아"

박정민의 책장에 김영하, 박민규, 이기호, 성해나, 김금희 작가 등의 책이 꽂혀 있다. 계간 '창작과비평'도 눈에 띈다. 박시몬 기자


그는 소설을 주로 읽는다. "본업이 배우다 보니 책 중에 가장 비슷한 소설에 끌려요. 허구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 독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요. 이야기라는 구조도 영화와 소설이 비슷하고요." 독자가 평소에 느낄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을 끌어낸다는 점이 그가 꼽는 소설의 매력이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과 만나 마음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좋은 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좋은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읽을수록 관심 분야도 확장됐다. 해외 소설, 특히 고전은 어렵다는 편견은 카뮈의
'이방인'
'페스트'
를 통해 날려 버렸다. 그는 20대 중반 처음 떠난 유럽 여행을 첫 해외 고전 소설 '이방인'과 함께했다. "엄청 어려울 줄 알았는데 재밌더라고요. 생각보다 웃기고, 생각보다 소동이 많이 일어나네 싶은 게 이것도 하나의 소설이었더라고요. 이 책을 통해 해외 문학으로 또 길을 연 거죠." 등장인물의 러시아식 긴 이름을 극복하고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까지 탐독했다.

계간
'창작과비평'
도 꼬박꼬박 챙겨 읽는다. 훌륭한 작품들이 한데 모인 종합선물세트 같은 문예지서 "미처 몰랐던 작가를 발견하는 순간"을 즐긴다. "얼마 전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박민규 작가의 단편(
'여름의 시작'
)이 오랜만에 실려서 말벌 아저씨(말벌이 나타나자 꿀벌을 지키기 위해 쏜살같이 뛰어가는 한 TV 프로그램 출연자에서 유래한 밈)처럼 책을 펴 읽었습니다. 여전히 좋았습니다. 팬심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박정민이 '듣는 소설' 프로젝트의 첫 번째 책으로 펴낸 김금희의 '첫 여름, 완주'를 손에 들고 있다. 박시몬 기자


"이름 없는 것들 대변하고파"



출판사 운영은 그의 지독한 책 사랑의 연장선이다. 2013년부터 3년간 한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 산문집
'쓸 만한 인간'
(2016)을 펴냈던 경험이 씨앗을 뿌렸다. 그는 "독서를 즐겨 하는 독자로 있을 때와 책을 쓸 때 느낌이 달랐다"며 "한 권을 만드는 데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공을 들인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면서 '꽤 재밌고, 뜻깊다'는 생각이 '책 만드는 일을 계속 해나가면 좋겠다'는 것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시작은 가벼웠다. 사명(무제)을 지을 때만 해도 "귀찮은 마음에 세상에 내던진 이름"이었다. "의미가 담긴 단어들을 배치하는 게 간지럽고, 짓기도 너무 힘들어서 '아, 그냥 귀찮아' 하고 '이름 없음'으로 한 거였죠." 무제의 첫 책인 박소영 작가의 동물권에 대한 에세이집
'살리는 일'
(2020)이 나오면서 비로소 제 의미를 찾았다.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 이름 없는 것을 대변한다"는 의미다. 박 작가가 동생인 배우 박수영과 함께 쓴 두 번째 에세이집
'자매일기'
(2024)도 무제에서 나왔다.

배우 박정민이 운영하는 출판사 무제가 펴낸 책 3권. 왼쪽부터 박소영의 '살리는 일', 박소영·박수영의 '자매일기', 김금희의 '첫 여름, 완주'. 박시몬 기자


'첫 여름, 완주'는 순서로는 무제의 세 번째 책이지만, 그가 처음 기획해서 펴낸 책이다.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위해 오디오북 제작을 염두에 둔 '듣는 소설'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기획부터 작가 선정, 제작, 유통, 홍보 등 전 과정을 전적으로 그가 맡았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작가 섭외다. 대사맛을 살려야 하는 듣는 소설인 만큼 김금희 작가가 적임자였다. 그는 "글을 읽고 연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유일한 작가였다"고 했다. "온기가 느껴지는 김 작가 특유의 글 안에 있는 리듬을 사랑해요. 그 방점이 대사에 있어 작가가 쓴 대로만 연기해도 칭찬받겠는데라는 느낌이 있어요." 김 작가의 소설 중에선
'복자에게'
를 특히 좋아한다.

오디오북은 대중성이 낮아 기존 업계들은 도전하지 않는 분야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다. '첫 여름, 완주' 오디오북은 배우 고민시, 염정아, 김도훈, 최양락, 배성우 등의 연기가 가미되고 음악과 효과음까지 더해져 한 편의 드라마로 탄생했다.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에서 들을 수 있다. 오디오북에 삽입된 노래의 뮤직비디오도 제작했다. 전시로도 확장해 서울 성수동(LCDC 서울)에서 '청각 전시'를 열고 있다. "출판계 경험이 전무해 오히려 아무런 제약이 없었어요.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돼'라는 눈앞에 정해진 길이 없으니까요. 또 배우라는 직업상 가용할 수 있는 든든한 자원이 없었더라면 할 수 없었던 일이죠."

'첫 여름, 완주'의 청각 전시 '완주:기록:01'이 열리는 서울 성동구 복합문화공간 LCDC 서울의 전시장 내부. 시각적 자극을 최소화한 공간에서 오로지 청각에 의지해 문학을 경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LCDC 서울 제공


출판업에 대한 목표도 배우만큼 야무지다. 2011년 독립영화 '파수꾼'으로 데뷔한 그는 '전설의 주먹' '너희들은 포위됐다' '들개' 등에 출연하며 연기 이력을 쌓았다. 2016년 영화 '동주'에서 독립운동가 송몽규를 연기하며 청룡영화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이달 18~22일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을 준비 중인 그는 출판계에서도 광폭 행보를 이어간다. 매년 책 5권을 내는 게 장기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수많은 천재지변을 겪고도 사람들은 책을 만들고 읽었습니다. 어떠한 형식으로든 책은 계속해서 남을 것입니다. 대재앙으로 전 세계적 정전 사태가 일어나도 책에 적힌 글자는 없어지지 않을 거고요. 읽는 사람은 줄어든다 해도 누군가는 만들고 누군가는 읽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책이 가진 따뜻한 물성도 누군가는 지키고 갈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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