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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외로운 목수 어네스토(Ernesto)를 아시나요? 최근 유튜브에선 남루한 차림의 54세 목수가 장기자랑 프로그램 '아메리카 갓 탤런트'(AGT)에서 노래로 관객을 울린 영상이 화제로 떠올랐다. 영상은 인스타그램과 틱톡 등에서 확산하며 지구촌 수천만 명이 시청했고 '감동적', '간만에 눈물', '당신을 응원한다' 등의 댓글이 쇄도했다.

목수 어네스토 AGT 바이럴
54세 목수인 어네스토라는 인물이 장기자랑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 부르는 모습. [유튜브 화면 캡처]


어네스토가 부른 노래 'Still waiting at the door'(여전히 문 앞에서 기다려)는 선율과 가사가 아름답고 그의 음색과 가창도 뛰어났다. 애수에 찬 목소리에 관객은 물론 심사위원까지 눈물을 훔쳤다. 공연 전 그가 소개한 사연은 감동을 더 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신파였다. 끼니를 거르고 초과 근무를 하며 자식 교육과 가정에 모든 걸 바쳤지만, 아이의 대학 졸업 후 모든 게 달라졌다. 거리에 나앉을 만큼 가난해졌고 아내와 아이는 연락을 끊은 채 멀어졌다. AGT 출연 이유도 상이나 명성을 위한 게 아니라 가족이 자기 목소리를 듣길 바랄 뿐이기 때문이라 했다.

희생한 아버지의 아이콘 자체였다. 이 정도 자락을 깔고 자신의 존재 이유인 가족이 돌아오길 매일 기다린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니 최루탄이나 다름없다. 자,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가짜(fake)였다니! 어네스토란 목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오디션도 열린 적 없으며, 심사위원과 관객들도 진짜가 아니었다. 한 유튜브 채널에서 인공지능(AI)을 이용해 만들어낸 가상현실로 밝혀진 것이다.

AI 기술의 초고속 발전을 알고 있는데도 이 영상은 많은 이에게 충격을 줬다. AI로 딥페이크나 모창 영상, 가짜 뉴스를 만들고 바이럴 마케팅을 하는 건 일상이 됐지만 이렇게 완벽히 모두를 속이다니. 이 정도면 촬영기사, 모델, 아나운서 등은 머지않아 사라질 직종이 될 것 같다. 가수나 화가도 안심할 처지가 못 된다. 이미 AI 모델·가수·아나운서가 날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AI로 지브리 애니 캐릭터를 만드는 게 유행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영상이 가짜라는 걸 알고 난 뒤 사람들 반응이다. AI가 창조한 거짓 세계임이 알려진 뒤에도 조회수와 응원 댓글은 계속 느는 기현상이 보였다. 허구지만 감동적이면 된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이런 현상은 이제 현대인들에겐 실제와 가상 현실의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 게임 속 세상에 익숙한 MZ 세대는 더 그런 듯하다.

이 대목에서 세계적 거부이자 인류 문화를 재창조 중인 일론 머스크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진짜 현실 속에 있을 가능성은 수십억분의 1이라는 주장 말이다. 이 세상은 가상현실이며 우리 인간도 프로그래밍한 대로 움직이는 캐릭터란 주장인 셈이다. 사실 우리 뇌가 전기신호에 의해 외부 세상을 인식할 뿐이라는 건 과학적으로 이미 입증됐다. 이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나 불교의 색즉시공(色卽是空)과도 연결된다. 장자는 나비가 된 꿈에서 깬 뒤 인간인 자아와 나비인 자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색즉시공은 물질적 세계와 실체가 없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의미다.

이런 개념은 프리드리히 니체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서양 철학에 영향을 준다. 일찍이 고대 철학에서도 플라톤이 본질(이데아)을 복제한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현대 철학에선 시뮬라크르를 '복제를 다시 복사한 복제', 즉 원본이 실종된 복제로 정의한다. 예컨대 당신을 찍은 사진을 가리켜 당신은 '나'라고 말하겠지만 정확히는 '나'가 아니다. 나의 실체가 아닌 나를 그려놓은 허상의 이미지이며 무한 복제도 가능하다. 이 시뮬라크르 개념이 극대화한 공간이 가상현실(VR)이다.

일론 머스크
(AP=연합뉴스) [재배포 DB 금지]


이쯤 되면 머스크가 지지하는 '시뮬레이션 우주 가설'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AI가 만든 허상인 목수 아빠에게 열광하는 세상이 됐고, 무엇이 가짜이고 진짜인지 구분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미래학 고전 '특이점이 온다'에서는 오는 2045년에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레이 커즈와일이 지은 이 책의 부제는 '인류가 생물학을 초월할 때'이다. 이 역시 우리 육체나 마음의 번뇌는 실체 없는 것이라는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훗날 알고 보니 이 세상이 덧없는 가상현실이라면 우리도 이념이나 빈부의 차이 등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leslie@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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