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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기사 김슬기 인터뷰
택배기사 김슬기씨를 지난 달 12일 만났다. 코로나 호황에 월 900만원을 벌다 노조 파업에 수입은 반토막나고, 정부의 전세보증보험 정책 변경 탓에 갭투자한 빌라가 발목잡아 파산했다. 전민규 기자
" 도파민 제로 시티. " 유튜브 '피식대학'이 지난해 5월 경북 영양 편 영상에 붙인 섬네일 문구인데, 재미 하나도 없는 동네라는 뜻이다. 손흥민과 잭 블랙 등 글로벌 스타가 앞다퉈 출연하며 연일 구독자와 조회 수가 치솟던 이 인기 채널은 들끓는 지역 비하 비판 여론에 순식간에 구독자(당시 318만)가 수십만 빠졌다.

하지만 정작 여기서 나고 유년기를 보낸 '페이스북 인플루언서' 택배기사 김슬기(35)씨 반응은 전혀 달랐다. 되려 '영양 사람인 내가 재밌는데, 구독 취소하는 XX들 영양 어딨는지는 아냐'고 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김슬기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싶다. 군중에 편승해 무턱대고 시기·질투·비난하는 대신 본인 경험을 잣대로 이성적 사고를 하고, 대세에 거스르는 소수 의견이라도 옳다 생각하면 거침없이 피력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런 스타일은 가난·학대에도 땀의 가치를 믿고 살아온 그를 괴짜 투사로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 땐 대기업에서 일감 받는 택배기사 신분으로 민주노총 산하 택배노조의 불법 파업에 혈혈단신 반기를 들었다. 지난 대선에선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지지연설을 했고 대통령 측근이 이끄는 한 위원회에 들어갔지만, 의정 갈등 국면에서 의사 집단을 향해 "자신 주장 관철하려는 자는 테러범, 대테러 특수부대가 나설 때"라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부 위원들의 전체주의적 사고에 맞서 싸우다 박차고 나왔다. 또 윤 정부 고용부가 택배 대리점주에게 산재보험 보험료를 소급 부과하는 방침을 내놓자, 본인은 점주 아닌 기사일 뿐인데도 "택배산업 망가뜨리는 정책"이라며 앞장서 SNS 여론전을 펼쳤다. 늘 자신을 '고졸 일자무식'이라 칭하지만 사회 좀 먹는 여느 이기적 엘리트보다 훨씬 낫다. 하지만 진보·보수 정부 할 것 없이 현장 무시한 정책은 그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노력해도 희망이 안 보여 그냥 쉰다는 청춘이 50만명인 시대에 매우 사적이지만, 한편으론 새 정부가 새겨들을 만한 의미 있는 이야깃거리 많은 인생을 지난달 12일 듣고,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가난과 시혜, 정책의 허점 고향 영양은 신호등도 없는 전국 최고 오지였다. 다섯 살에 부모 이혼으로 타지 친척 집 전전하다 아무 경제 활동 없는 이 폐광촌에 돌아왔을 때가 초등 1학년. 돌봐주는 어른은 없었다. 빈집에서 형·동생이랑 라면 끓이거나 산딸기 따 먹고, 잡은 물고기를 인근 공군 기지 인부한테 팔며 살았다. 몇 년 후 새엄마가 왔지만, 돈 벌러 간 아버지 없는 집에서 참 많이 맞았다. 엄마한테 "못 살겠다"고 전화했더니 우릴 데려갔다. 그게 6학년 때(2002)다.
지난해 5월 인기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은 경북 영양편 영상을 올렸는데, 지역 비하 논란 끝에 사과하고 내렸다. 하지만 영양 출신 김슬기씨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유튜브 캡처]

가난은 출생(1990)부터 따라다녔다. 병원비 없어 날 낳자마자 바로 퇴원하는 엄마가 딱했는지 의사·간호사가 돈 모아 기저귀 사줬다고 한다. 쌀 없는 공포는 수시로 겪었다. 엄마 수입 끊기면 전부 굶어야 했다. 아무도 안 믿겠지만 지능 검사가 늘 높게 나와 학교에선 "공부해서 대학 가라"고 했다. 그런데도 대학 생각한 적 없고 오로지 돈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가난해도 난 열심히 일할 생각
정치인·관료는 세금 쓸 궁리만
택배기사·의사 모두 밥그릇 소중
당위 아닌 현실 기댄 정책 간절
중1부터 알바 자리를 찾았다. 종일 전화 돌려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근로기준법상 취업 최저연령(15세)이 걸림돌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생애 첫 일자리는 고1 때 인력사무소 통해 구한 측량 보조기사였다. 아침·점심·저녁 끼니마다 6~7인분씩 배불리 먹는 건 좋았다. 일당 7만원인 줄 알았는데 20일 일하고 100만원만 주길래 따졌더니 "주민등록증이 없어 다른 사람 명의로 처리해서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땐 원망했는데, 이젠 기회를 준 거라 생각한다.
정부가 약자 보호 명목으로 내놓는 정책의 허점을 나만큼 체감한 사람도 드물 거다. 20대 초반 택배 시작할 무렵 만난 아파트 경비는 대개 노인이었다. 월급이 많진 않아도 일을 해서인지 활기찼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임금을 2년 만에 6000원대에서 8000원대로 급격하게 올리자, 전부 쫓겨났다. 그 자리는 보안업체가 차지했다. 살면서 딱 한 달 쉬어봤는데, 미치겠더라. 그 노인들도 타의로 집에 들어앉아 폭삭 삭았겠지.

남들 보기엔 힘들기만 한 인생이겠지만 어릴 적 산 타며 재밌게 논 기억이 더 많다.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동사무소가 한 달에 두 포대씩 주는 쌀을 받았다. 고마웠지만, 왜 진작 안 도와줬느냐고 원망하거나 더 많이 바란 적은 없다. 1967년생 싱글맘 혼자 애 넷 먹여 살리는 걸 보며 늘 대단하다고 여겨서인지 먹고 살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늘 이 생각뿐이었다.
택배와 사진, 정책의 배신 난 가난하지만 여야의 포퓰리즘적 '무임' 시리즈 정책에 반대한다. 부모 세대가 어렵게 일군 산업 생태계가 망가지거나 규제 탓에 기업이 한국을 떠날까 노심초사한다. 남들 눈엔 기득권 근처도 못 간 고졸 블루칼라의 계급에 반하는 행보로 보이겠지만, 산업 생태계 이루는 기업 없이는 내 밥그릇 못 채운다는 걸 직접 겪으며 깨달아서다.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던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에 반대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정부가 정책적 효과보다 의사 밥그릇 뺏는 데 더 관심이 커 보여 동의할 수 없었다. 내 밥그릇 소중하면 남의 밥그릇도 소중하다. 뺏겨봐서 안다.
김슬기씨는 지난 2022년 2월 민주노총 산하 택배노조가 점거농성중인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노조에 맞서 파업 중단을 촉구하는 회견을 했다. 연합뉴스
내가 유튜브 출연 등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게 지난 2018년 민주노총 산하 택배노조가 CJ대한통운 상대로 파업했을 때 그 회사 물량 받는 택배기사로서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부터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헛소리한다"고 감히 노조에 대항했다. 방검복을 선물 받을 만큼 살해 협박을 많이 받았다. 투사 되겠다고 한 일이 아니다. 1년 가까이 공들인 거래처를 확보한 지 일주일도 안 돼 파업 탓에 도로 빼앗긴 게 너무 화났다. 2021년 수차례 파업에 이어 12월부터 아예 두 달 넘게 끈 본사 불법 점거 파업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파업 전 월 800만~900만원 벌다 300만 원대로 주저앉았으니 하는 말이다.

내 눈엔 밥그릇 걸린 파업이 아니었다. 통진당 후보로 19대 총선에 출마했던 초대 김태완 위원장이나 후임 진경호 위원장 등 택배를 잘 모르는 외부인이 전체 10%도 안 되는 노조원 앞세워 다른 정치적 목적을 취한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당시 야당인 국민의힘은 배제한 채 노·사·정·더불어민주당만 참여해 사회적 합의 기구를 출범했는데, 이게 지켜지지 않는다는 게 파업 사유였다. 현장 얘기 들어보면 노조 측이 고의로 구실을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난 2023년 6월 국민의힘 민생특별위원회 주최 택배산업 종사자 간담회에 참석한 김슬기씨(맨 오른쪽). 그는 평일 낮에도 부르면 달려갔지만, 늘 사진찍기 이벤트일 뿐이었다고 했다.

문제는 택배노조 지지하는 민주당뿐 아니라 국민의힘 의원들 역시 별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평일 오후 2시라도 부르면 정책 반영을 기대하고 국회로 달려갔는데 전부 의원 홍보용 사진찍기 행사로 끝났다. 내 얘기를 이해라도 한 건 최재형 의원이 유일했다. 지난 대선 때 택배노조와 이재명 후보는 서로 지지했고, 난 택배산업을 살리는 반대쪽에 섰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지난 정부와 똑같이 택배 대리점주에 산재보험료를 소급 부과하는 식의 택배산업 죽이는 정책을 줄줄이 내놓았다.
부동산과 파산, 정책의 파탄 문재인·윤석열 정부를 거치며 남은 건, 현장 동떨어진 노동·부동산 정책으로 인한 파산이었다. 택배노조 파업 직전인 2021년 전세 낀 갭투자로 서울 강동구 빌라 두 채를 샀는데, 윤 정부 원희룡 초대 국토부 장관이 내놓은 임대사업자 보증보험 한도 축소로 예상했던 임대 수익을 올리기는커녕 결국 파산해버렸다.

사연은 이렇다. 문 정부 시절 서울 잠실 국민 평형 아파트가 한 달 새 5억원 오를 만큼 연일 부동산값이 폭등했다. 절망했다. 2008~9년만 해도 내가 살던 수원 인근 광교 아파트가 미분양이었다. 그런데 여기마저 투기과열지구로 지정돼 LTV(담보인정비율) 규제가 세져 광교 아파트는 꿈도 못 꾸게 됐다. 뭐라도 해야 했다. 마음이 급했다. "지금 수입이면 감당할 수 있겠다" 싶어 빌라 두 채를 질렀다.

그런데 파업으로 일감 떨어져 수입은 반 토막 나고, 겨우 버텼더니 전세 사기 방지한다며 무고한 임대사업자의 역전세 노출에 아무 대비 없이 한도를 축소해버려 사기꾼도 투기꾼도 아닌 나만 빚에 허덕이게 됐다. 만약 3억 4000만원에 들어온 세입자가 연장한다면 하락한 요율에 맞춰 2억 8000만까지 낮춰야(차액 6000만원을 돌려줘야) 한다. 차량 담보 대출이며 신용대출, 친구·형한테까지 빌렸지만 턱도 없었다. 의무임대기간(4년)을 어기면 과태료만 3000만원이라 팔 수도 없었다. 파산 신청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내가 지금 둘째를 임신했지만 이런 경제적 사정 탓에 혼인 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김슬기씨는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지지 TV연설까지 했지만, 윤 정부도 문재인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2024년 1월 국회 앞에서 윤 정부 택배 정책에 항의하는 1인 시위하는 모습. [사진 김슬기]
가진 거 없고 못 배웠어도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돈 벌 수 있다고 늘 생각했다. 지금 내가 가난한 건 잘못된 선택의 결과라고만 여겼다. 되는 일 하나 없어 '죽을까' 하는 나쁜 마음을 먹었던 순간에도 남 탓, 사회 탓, 나라 탓하며 뭘 내놓으라 한 적 없다. 오로지 일할 수 있게 해달라, 내 일터를 망가뜨리지 말아 달라고만 했다. 그런데 택배기사 해보니 보수든 진보든, 정치인이든 관료든, 엉뚱한 규제를 들이대 산업을 죽이고 결국 외국 경쟁업체 배만 불려주더라. 택배시장만 봐도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국가 전체로는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을까.

새 정부는 무슨 일 생기면 세금 쓸 궁리만 하지 말고 제발 현실을 봤으면 좋겠다. 택배만 놓고 얘기하자면, 진짜 현장 목소리를 하이재킹하는 강성 노조 얘기만 들어서는 올바른 정책이 안 나온다.
안혜리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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