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서울지하철 5호선 열차 안에서 방화로 인해 승객들이 지하 터널을 통해 대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화재로 인해 대피하는 승객들의 모습. 사진 영등포소방서
지난달 31일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에서 60대 남성이 불을 질러 승객 400여명이 지하 터널로 대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20여 명이 연기 흡입이나 골절 등 부상을 입었지만,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다. 지하철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이라는 점에서 지난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와 유사했지만, 당시와 달리 안전 대책 강화와 기관사·승객의 신속한 대처로 인해 대형 참사로 번지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1일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전날 오전 8시43분쯤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에서 미리 준비한 인화성 물질과 라이터형 토치로 불을 내 승객 등 20여명을 다치게 한 혐의(현존전차방화치상)로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A씨는 5호선 여의나루역에서 마포역으로 향하는 열차 네 번째 칸에서 미리 준비한 인화 물질을 바닥과 벗은 옷 등에 뿌린 뒤 라이터형 토치로 불을 낸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들것에 실려 여의나루역 역사로 나오는 A씨의 손에 그을림이 많은 것을 발견하고 A씨를 추궁했고, A씨가 범행을 시인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혼 소송 결과에 불만이 있어 지하철에 불을 질렀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김영옥 기자
열차에 사용된 불연재(不燃材) 자재는 불이 크게 번지는 것을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서울 지하철은 대구 지하철 참사 후인 2003년 9월부터 전동차 골격과 바닥·내장재 등을 스테인리스 등으로 교체했다. 스테인리스는 섭씨 약 800°C의 고온에서도 형태를 유지하고 연소하지 않아 불에 타지 않는 대표적인 불연재다. 김진철 마포소방서 소방행정과장은 31일 현장 브리핑에서 “최근 지하철 열차는 대부분 불연재로 돼 있어 쓰레기만 일부 불에 탔다”고 말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땐 우레탄폼, 폴리우레탄 등 가연성(可燃性) 소재가 열차 내부에 사용되면서 불길이 순식간에 전동차 전체로 번졌다. 객차 전체가 약 2분 만에 불길에 휩싸이며, 192명이 사망하고 151명이 다쳤다.
지난달 31일 아찔했던 5호선 지하철 방화 화재로 검게 그을린 객차 내부 모습. 영등포소방서 제공. 연합뉴스.
사고 대응에 기관사와 승객들의 빠른 대처도 빛났다. 불이 나자 놀란 승객들은 인접한 객차로 이동한 뒤 비상 통화 장치로 기관사에게 즉시 상황을 알렸다. 28년 차 기관사 B씨가 신고 접수 뒤 열차 내 CCTV를 확인하니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열차를 멈추게 한 뒤 곧장 불이 난 네 번째 열차 칸으로 이동했다. B씨와 일부 승객들은 열차가 멈춰 서자 벽면에 비치된 소화기를 꺼내 직접 화재 진압에 나섰다.
B씨는 연기를 마셔 구토 등 증상을 보였지만 열차를 대피선이 있는 애오개역까지 운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영등포승무사업소에 따르면 B씨는 31일 낮 12시쯤 인근 병원으로 이송돼 4시간 가량 치료를 받은 뒤 퇴원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로 현재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김 과장은 현장 브리핑에서 “(소방관들이) 열차에 진입했을 당시 상당수 승객이 대피하고 있었다”며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기관사와 승객이 소화기로 자체 진화해 진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진화된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김영옥 기자
대구 참사 이후 비상 대응 체계를 강화한 것도 피해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전동차 내에 비상 호출 장치는 한 칸의 양쪽 끝 출입문 옆에 각 1개씩 설치돼 있다. 이 장치를 누르면 기관사와 직접 통화할 수 있고 운전실 내 폐쇄회로(CC)TV가 호출을 요청한 칸으로 전환된다. 기관사 B씨가 발빠르게 상황을 인지할 수 있던 이유다.
기관사에게 상황을 알린 승객들은 객실 의자 하단에 있는 비상 개폐장치를 찾았다. 일부 승객은 비상개폐장치를 통해 열차를 마포역에서 약 300m 떨어진 구간에서 세웠고, 승객 400여명은 터널을 통해 인근 역사 대합실 등으로 대피했다. 비상개폐장치로 문이 열린 뒤에는 승객들이 서로 대피를 도왔다. 당시 119에 최초 신고를 한 오창근(29)씨는 “열차 문을 열고 어르신, 여성 등이 약 1.5m 아래 있는 터널로 뛰어내리는 것을 다른 남성들과 돕고 대피했다”고 말했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열차 내장재를 바꾸고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춘 데다 기관사와 시민들이 힘을 합쳐 적절히 대응한 덕분에 큰 인명피해를 막은 사례”며 “사회적 불만을 방화로 표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도 방화에 대비한 소화 훈련 등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