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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일한 범선 코리아나호 정채호 선장
바람에 제 몸을 맡긴다. 돛이 펄럭인다. 코리아나호는 미끄러지듯 더 큰 바다로 나아간다. 12노트(시속 22㎞). 지난 17일 정채호(76) 선장은 이틀 전 배를 손봤다. 그의 손에는 그때 묻은 녹색 페인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배가 언젠가는 어느 땅에 닿듯이 페인트도 언젠가 지워지겠죠.”
우리나라 유일한 범선 코리아나호의 정채로 선장이 모항인 전남 여수시 소호요트마리나에서 조타키를 점검하고 있다. 그의 손에 페인트가 묻어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전남 여수시 사도로 향한 코리아나호는 우리나라 유일한 범선이다. 한국에서 진수식을 올린 지 올해로 30년. 마침 30회를 맞는 바다의 날(5월 31일)도 앞두고 있었다.

“돛 올리자!”
정 선장의 외침에 코리아나호의 11개 돛 중 맨 앞의 ‘제노아’가 5분 만에 활짝 펼쳐졌다. 그런데 달랑 하나만 올리다니.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 선장처럼 “쇼를 시작해 봅시다”와 비슷한 일갈을 바랐는데. “연안 운항에는 돛을 많이 펴면 속도가 너무 붙어 위험해요. 그리고 운항이 무슨 쇼도 아니잖아요.”

전남 일대에서 온 학생과 학부모 47명이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정 선장이 다시 외쳤다. 이번엔 잭 스패로로 분한 조니 뎁이 됐다. “자, 우리 한번 힘차게 소리 질러요. 파이팅!” 긴장과 흥분 대신 패기와 기대감이 바다 위로 뿜어져 나왔다.


Q : 학생들 눈이 동그래졌네요.

A :
“그러면 일단 출항은 성공이네요. 제 임무의 반은 벌써 달성한 겁니다.”
Q : 임무요?

A :
“무사 귀환, 그리고 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바다에서의 꿈과 열정을 심어주는 게 제 사명이자 미션이죠.”
"이 배는 내 배, 꼭 살 것" 진해에 억류 중인 범선 구입
범선(帆船). 풀어쓰면 돛단배. 게다가 사명이라니. 영화 ‘미션(1986)’이 문득 떠올랐다. 얼마 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속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1750년대 라틴아메리카 순교를 그린 작품. 배경에는 제국의 각축이 있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무너진 뒤 유라시아 육로가 막히면서 열린 대항해시대도 저물던 시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버티고 있었고 영국은 떠오르고 있었다. 영국 탐험가 월터 롤리(1552~1618)의 말대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그 최전선에 범선이 있었다. “역사가 바다의 힘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정 선장이 조타기를 부선장에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한국의 유일한 범선 코리아나호는 전장 41m에 총 톤수 135t, 11개의 돛을 다는 마스트(돛대) 높이가 최고 30m다. 맨 앞에 다는 제노아 돛을 포함해 모든 돛을 합치면 931㎡의 넓이가 된다. 코리아나호가 모항인 전남 여구시 소호요트마리나에 정박해 있는 사이, 관광객이 찾아와 정채호 선장(사진 맨 아래 하얀 모자 쓴 사람)의 설명을 듣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Q : AI 시대에도 바다의 힘은 여전할까요.

A :
“바다에 소홀할 때는 큰 대가가 따릅니다. 명나라 정화의 원정(1405~1433) 이후 바다의 문을 잠근 중국도 결국 기울지 않았습니까. 그 중국이 600년 만에 일대일로)를 내걸고 21세기 해양 강국을 노립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하늘이 바다를 대신할 줄 알았지만, 바다 없이 석유와 밀·자동차가 어떻게 오갑니까. 미국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AI를 구동할 해저 광케이블 30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AI도 바다 없이는 안 되는 겁니다. 그 이유로 예로부터 각국의 범선이 바다를 개척해 왔고, 지켜왔죠. 범선을 국력으로 보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범선에 올라야 비로소 바다가 보이는 거고요.”
지난해 9월 길이 111m, 폭 13.5m, 무게 2350t의 대형 범선인 인도네시아의 비마수치함이 한국 해군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부산에 입항했다. 승조원들이 돛대에 도열해 있다. [연합뉴스]

Q : 범선이 국력이라뇨.

A :
“얼마 전 멕시코 해군사관학교 생도를 태운 범선이 뉴욕 브루클린 다리를 들이받아 두 명이 사망했죠. 왜 범선이겠습니다. 범선은 철갑함과 장갑함에 전투선의 위상을 넘겼지만 상징성은 여전합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범선축제는 국력의 각축장이라고 할 수 있죠.”
아이러니다. 페리 제독이 1853년 일본의 문을 두드렸을 때 흑선이라고도 불린 대형 범선과 증기선은 일본인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 '흑역사'를 축제로 만들다니. 우리에겐 프랑스 범선이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문수산성을 초토화한 기억(병인양요·1866)도 있지 않은가. 정 선장은 "바다의 역사를 잘 써먹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853년 7월 8일 일본 우라가에 내항한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을 묘사한 그림. ‘서스퀘해나’(증기선 ) ‘미시시피(증기선)’, ‘새러토가(범선)' ‘플리머스(범선)' 4척으로 구성됐다. [사진 위키백과]


Q : 바다가 보인다는 뜻은 뭔가요.

A :
“바다는 항상 변합니다. 같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승객들의 무사 귀환과 꿈을 심어주는 사명을 완수하려면 무수한 난관에 대비해야 합니다. 옛날식 배는 자연과 바다의 기본을 알려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다를 이해하게 되고요.”
코리아나호는 18세기 영국과 자웅을 겨루던 해양 강국 네덜란드에서 1983년 건조됐다. 길이 41m, 총톤수 135t. 30m까지 치솟은 마스트(돛대)는 넷. 돛 11개를 모두 펼치면 931㎡, 300평짜리 논 한 마지기 넓이다. 자체 엔진을 가동해 평소 9~10노트의 속력으로 달리다 맨 앞의 제노아 돛 하나만 펼쳐도 2노트나 빨라진다. 요트와의 외형적 차이는 마스트 수와 배의 길이. 길이가 60피트(약 18.3m)를 넘고 마스트가 두 개 이상이면 범선으로 친다. 요트는 상위 1% 부자들이, 범선은 상위 0.01% 재력가들이 탄단다. 그래서, 대놓고 물어봤다.
우리나라 유일의 범선인 코리아나호가 돛을 펴고 바다를 가르고 있다. [사진 정채호]


Q : 코리아나호 가격은 얼마였습니까.

A :
“하하. 그건 비밀입니다. 1989년부터 5년간 경남 진해의 대동조선(후에 STX조선이 인수)에 억류 중인 걸 사서 코리아나로 이름 붙였어요. 골치 아팠죠.”
코리아나호는 왜 당시 억류 중이었을까. 이 범선이 미국 마피아 두목 소유였다는 설이 있다. 정 선장에게 물어보자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라며 제노아 돛 같은 방어막을 폈다. 여하튼 그 ‘설’에 의하면 배가 대동조선소에 리노베이션을 위해 들어온 사이에 두목이 미국에서 체포됐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한국에 요청해 범선이 억류됐다.

정 선장은 “예나 지금이나 희한하게도 B클래스(전장 40m 미만, 코리아나호는 6m 늘임) 새 범선은 1000만 달러(약 137억원)로 고정돼 있다”며 “현재 코리아나호 시세는 235만 달러(약 32억원)”라고 했다. ‘제대로’ 샀다면 235만 달러와 1000만 달러 중간쯤의 가격이란 어림짐작만 할 뿐. ‘고가의 급매물로 나와 경쟁자도 없어 15억원에 싸게 샀다’는 설도 있다. 현재 1년 유지비는 1억6000만원 정도 든단다.
코리아나호 내부. 선실을 개조해 아카데미 교육실로 쓴다. 김홍준 기자

여천시장 당선돼 취임식과 겹친 진수식엔 '대타' 보내

Q : 어떻게 범선에 끌렸습니까.

A :
“이상하게도 해외에 나가면 몸이 저절로 범선 앞으로 가서 사진을 찍곤 했어요. 여수수산대 다닐 때 가업을 위해 전공을 수산물 가공으로 했어도 항해사 전공 아이들과 더 어울렸어요. 대동조선소에 갔을 때도 느낌이 왔어요. ‘이 배는 내 배다. 꼭 사겠다’라고요. 일행이 나중에 ‘저 인간 공갈치네’라고 속으로 받아쳤다고 그러더라고요(웃음). 돈을 긁어모아 결국 샀지요. 1년간 수리하고 진수식 날짜도 잡았어요. 후에 제가 초대 민선 여천시장을 지냈는데, 취임식을 1995년 7월 1일로 잡더라고요. 진수식 날과 겹쳤지 뭡니까. 진수식에 대타를 보냈지요. 후배 박길철 감독입니다.”
Q : 박길철 감독이라면….

A :
“전 요트 국가대표 감독입니다. 이곳 여수 출신이죠. 1980년대 초반에 경주용으로 쓰는 6m 이하 딩기 요트 50척을 들여왔습니다. 마침 여수시가 일본 가라쓰시와 자매결연을 한 지 얼마 안 돼 요트 교류 사업을 벌일 때였습니다. 15명의 우리 학생들 자질이 보였습니다. 요트 붐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박 감독이 요트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은 아시아 요트의 맹주가 됐습니다. 1986년 포함,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3개를 땄죠. 여수는 한국 요트의 요람이 됐고요.”
수많은 공구는 코리아나호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김홍준 기자

Q : 그래서인지 별명이 많습니다.

A :
“한국 요트의 개척자, 요트계의 살아 있는 전설, 국가대표 생산공장 공장장, 한국의 유일한 범선 선장, 바다의 민간 외교관, 또는 바다에 미친 사람(웃음).”
Q : ‘바다의 민간 외교관’에도 관심이 큰데요.

A :
“20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 때였어요. 여수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극동세계범선대회가 부대 행사로 열렸어요. ‘국가대표’가 됐습니다. B클래스에서 우승했어요. 범선 운항 실력이 국력이라고 믿는 일본·중국·러시아가 드디어 우리를 인정하더군요. 적어도 요트계에서는 우리가 일본·러시아와 친합니다. 각 대사관에서 부탁할 게 있다며 연락도 오고요.”
Q : 정치와는 연을 끊었습니까.

A :
“시장직을 연임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바다만큼 절실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과감히 바다로 돌아왔습니다.”
"장보고·이순신 … 잠들어 있는 우리 해양 DNA 깨워야"

Q : 바다에 왜 끌립니까.

A :
“우리에게는 해양 DNA가 있습니다. 신라의 장보고와 이사부, 충무공 이순신을 보십시오. 가깝게는 1998년 발해뗏목탐사대도 있고요. 그분들의 패기와 열정이 우리 안에 녹아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대항해시대의 콜럼버스(신대륙 발견)나 바스쿠 다가마(인도양 신항로 개척), 마젤란(세계 일주)이 될 수 있어요. 산에만 계시던 송광사 스님들이 코리아나호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입적하신 방장 현봉 스님이 선문답처럼 그럽디다. ‘이래서 바다구먼’이라고요. 30년간 제 승객 중 스님들이 가장 좋아하셨던 분들 같아요(웃음). 바다는 꿈의 보고입니다. 코리아나보다 더 큰 A클래스 범선이 교육용으로 해양대학교나 해군사관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잠자고 있는 해양 DNA를 깨워야 합니다.”
코리아나호의 정채호 선장은 사비를 털어 1988년 5월 4일 전남 여수 선소(소호)에서 전라좌수영 복파정(장군도)까지 9.4km 구간의 전국한국노경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는 한국 노가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사진 정채호]

코리아나호는 사도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모항인 여수 소호요트마리나로 돌아왔다. 학생들의 가슴이 꿈으로 한껏 부푼 듯했다. 딩기 요트 수십 척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40여 년 전 장 선장이 뿌린 씨앗이 이렇게 자랐구나 싶었다.

“닻 내리자!” 정 선장이 다시 외쳤다. 잭 스패로 아닌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 “그래요. 난 바다의 돈키호테입니다. 바다에 나무를 심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힘닿을 때까지 현역으로 당당히 바다를 누빌 겁니다.” 바다처럼 알 듯 모를 듯, 넓고 깊은 말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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