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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근우

SPC 제품 불매운동에 나선 ‘크보빵에 반대하는 크보팬 일동’


“지속 가능한 천만 관중 기반을 조성하는데 전념하겠습니다.” 지난 1월 허구연 한국야구위원회(이하 KBO) 총재의 신년사 일부다. 그의 다짐처럼, 지난해 꿈의 숫자라 생각했던 프로야구 천만 관중 시대에 돌입한 이후 올해는 한화 이글스의 33년 만의 12연승 등의 화제와 함께 지난 시즌을 능가하는 속도로 관중을 동원하며 최소 경기 400만 관중을 기록했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올해도 천만 관중을 넘길 것이다. 그런데 올해 KBO는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천만이라는 숫자를 경험했다. 지난 3월 KBO와 SPC삼립이 협업해 출시한 크보빵(KBO빵) 이야기다. 겨우 30경기 정도 진행된 4월 말에 이미 누적판매량 천만 봉을 돌파했다. 과거 포켓몬 캐릭터를 활용한 포켓몬빵에서 그러했듯 각 구단 선수들 스티커를 무작위로 동봉한 전략은 팬들의 수집 욕구를 제대로 자극하며 크보빵을 SPC삼립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만들었다. 프로야구의 오랜 역사에서 누적된 구단의 서사와 동시대 선수들의 캐릭터성이 상품에 문화적 경험을 부여한 셈이다. 이 상업적 성공과 야구팬의 주도적 소비문화를 야구의 황금기를 위한 ‘지속 가능한’ 기반으로 봐도 될까. 만약 지난 5월 19일 이전이었다면 어느 정도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5월 19일, 야구 경기 없는 월요일, 야구팬들이 가장 평온할 날이었다. 비보가 들려온 건 서울 잠실구장도, 부산 사직구장도, 광주 챔피언스필드도 아닌 시흥의 SPC 공장이었다. 한 50대 노동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운명을 달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 그리고 그곳에서 크보빵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소식.

한 시즌에 천만 관중이 모이려면 매 경기 입장 행렬이 길고 빽빽하게 늘어져 여차하면 1회를 놓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천만 봉 넘는 빵이 출고되려면 얼마나 빠르고 정신없이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야 할까. 사고 경위에 대한 공식 발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고인의 죽음과 크보빵 생산라인의 속도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란 어렵다. 이미 2022년 10월과 2023년 8월에도 노동자가 계열사 공장에서 사고로 죽었던 SPC그룹의 전례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니 2022년 벌어진 SPC그룹의 부당노동행위와 노동자 사망에 대한 소비자 불매 운동이 잠시의 휴지기를 지나 다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기존 불매 운동과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KBO도 압박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야구팬으로 구성된 ‘크보빵을 반대하는 크보팬 일동’은 온라인 캠페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선수들의 얼굴이 산재 기업의 이미지 세탁에 쓰이는 것에 반대”한다며 KBO와 SPC삼립의 협업 중단을 요청하는 온라인 서명을 진행했다. 물론 크보빵 불매엔 동의하더라도 KBO까지 비판하는 건 과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최애 선수’의 스티커를 모으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고 불매에 동참하는 것만 해도 작지 않은 실천이다. 혹은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크보빵을 반대하는 크보팬 일동’의 활동은 크보빵을 반대하지 않거나 유보적인 이들에게도 더 나은 야구의 경험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앞서 인용에서 허구연 총재가 말한 ‘지속 가능한 천만 관중 기반’에서 중요한 건 천만이라는 숫자가 아닌 지속 가능한 기반이다. 프로야구에서 반짝 우승이 아닌 소위 왕조를 세웠던 팀들은 강력한 코어와 미래 자원 육성과 일관성 있는 내부 문화로 지속 가능한 강팀의 기반을 만들었다. 허구연 총재가 같은 신년사에서 강조한 공정성과 경기력, 팬 중심 마케팅은 이러한 지속적인 프로야구 황금기를 위한 건강한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야구를 일종의 공동체적 경험으로 만들기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팬에게 가장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은 당연히 본인 응원팀의 승리지만 야구장을 찾은 천만 관중 모두가 승리를 경험하는 건 불가능하기에(그 불가능한 걸 바라는 게 야구팬이지만) 팬과 팀, 심판 모두가 공유하는 룰 안에서 정정당당하게, 프로에게 기대하는 수준의 플레이를, 팬들을 위해 펼쳐주길 기대한다. 실제로 그런 경기가 구현되는 건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이러한 믿음이 깨질 때 야구라는 공놀이는 전문 야구인끼리의 영리활동, 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가 되며 팬은 소외된다. 팬들의 응원과 관심은 승과 패 50퍼센트 확률이 정해진 룰렛에 올려놓는 판돈 같은 게 아니다. 승률 50퍼센트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란 걸 절감하되, 3시간 내외의 경기 시간 동안 쏟은 열정이 승패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우리’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경험되고 공유되길 바라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그러한 경험과 바람이 팀과 야구를 매개로 각각의 팬을 ‘우리’로 묶어준다. 좁게는 ‘우리’ 팀 팬이, 더 넓게는 ‘우리’ 야구팬이.

삼립이 판매중인 ‘크보빵’이 지난 20일 서울 광진구의 한 편의점 매대에 진열되어 있다. 김태욱 기자


당연하지만 이 상상의 공동체는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천만 관중의 시대에 2500명 서명을 목표로 한 ‘크보빵을 반대하는 크보팬 일동’ 역시 이 비균질한 무리의 아주 일부를 차지할 뿐이며, 실제로도 소수의견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운동에는 크보빵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관계를 지닌 여러 야구팬들의 동의를 구하고 각 입장 차를 봉합할 좋은 상징적 가치와 서사가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야구가 불의한 기업에 의해 사유화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서사. 그동안 크보빵을 사 먹고 스티커를 모으는 것이 야구팬으로서의 문화생활이자 즐거운 ‘덕질’일 수 있던 건, 야구를 매개로 한 문화적 공동체 안에서 의미 있는 경험으로 공유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적 없이 빵 봉투 안에 깔끔하게 밀봉되었던 핏빛 진실이 드러나고 공론화될 때, 크보빵은 팬을 위한 문화 콘텐츠가 아닌 문화의 당의정을 입은 SPC그룹의 교활한 영리활동이자 기만으로 재서사화된다. 팬은 소외되고 KBO와 SPC 간 건조한 자본의 논리만 남을 때, 매번 서로 욕하고 지지고 볶으면서도 야구로 하나 되는 ‘우리’로서의 감각은 분열되고, 파편화된 개별 소비자의 취향만이 황량하게 남는다. 이것이 이번 크보빵 불매 운동이 긋거나 그어야 할 전선이다. 소외를 받아들이고 한 명의 소비자가 될 것인가, 모두 함께 즐길 야구를 지킬 것인가.

KBO는 크보빵 불매 운동을 천만 관중 시대의 규모에 동반되는 예민한 일부의 유난이나 분란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이 운동이 표방하는 가치는 바로 그 천만 관중이 가능했던 공통의 감각을 지키고 복원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허구연 총재도 말했던 지속 가능한 기반이다. 현실 앞에 대의를 들이밀려는 게 아니라, 바로 그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대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당장 SPC와의 협업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이번 시즌 천만 관중 달성에 실패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야구가 깨끗하고 정당하고 떳떳한 경험으로 남길 바라는 팬의 요구 앞에서 ‘왜 이러십니까 손님’이라 말하고도 천만 관중의 기반이 지속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과연 2025년 시즌이 천만을 넘긴 숫자로 자랑스레 기억될지 KBO의 비정함으로 기억될지도 알 수 없다. 당장 올해, 프로야구 역사상 비극적 사건으로 손꼽힐 창원 NC파크에서의 구조물 낙하로 인한 야구팬 사망에 대해 KBO는 시설 관리 책임 여부와 상관없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애도 기간을 가졌다. 야구팬도 이견 없이 동참했다. 어떤 애도로도 비극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우연적이고 운 없는 사고라 회피하는 대신 모두에게 가슴 아픈 사건으로 기억하고 자시는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상상의 공동체는 다시 한 번 연결됐다. 이번 크보빵 생산 공장에서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공유할 수 없다면 이 공놀이 사업에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위근우>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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