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신유열 롯데지주 부사장,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 사진=한화갤러리아·롯데지주
“예전엔 강남 고급 한정식집이나 계열 호텔이 비공식 회동 장소였다면 지금은 CES 같은 공개 전시회장이 오히려 만남의 중심이 되고 있다. 경쟁사 매장을 방문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다.” (한 기업 관계자)
MZ세대 오너들의 사교 방식이 진화하고 있다. 과거처럼 학교, 지역, 가문에 기반한 폐쇄형 인맥이 아니라 관심사·취향·공통된 브랜드 감수성이 연결고리가 된다. 미국 테크 전시회 뒤편의 와인바, 압구정의 아이스크림 가게도 만남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이들의 네트워킹 방식은 출신 학교와 출신 지역 중심의 폐쇄적 모임에서 벗어나 공개적 만남이 트렌드다.
지난 5월 21일 서울 압구정로데오 거리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부사장의 모습이 포착됐다. 그의 옆에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3남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이 함께였다.
김 부사장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5월 23일 론칭한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 ‘벤슨’의 선공개 파티에 초대된 것이었다. 3세 경영인인 두 사람은 1980년대생으로 MZ세대 오너라는 공통점이 있다. 1986년생인 신 부사장이 1989년생인 김 부사장보다 3살 위다. 김 부사장과 신 부사장의 사적 친분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화갤러리아 자회사 베러스쿱크리머리가 선보인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 '벤슨' . 사진=한화갤러리아
골프장·고급 한정식 대신 아이스크림 가게
지난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4’ 현장에선 또 하나의 비공식 모임이 업계의 시선을 끌었다. 현대가 3세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과 신 부사장 그리고 K팝의 아이콘 지드래곤의 와인 회동이었다.
지드래곤이 정 수석부회장, 신 부사장과 함께 와인을 곁들인 식사 자리를 갖고 이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리면서 이들의 회동이 공개됐다. 정 수석부회장은 당시 HD현대 부스를 찾은 지드래곤에게 직접 전시를 소개하고 가상현실(VR) 탑승 체험을 함께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지드래곤은 롯데이노베이트(옛 롯데정보통신) 부스를 찾아 신 부사장과 함께 사진도 찍었다. 이들의 만남이 단순 친분인지 사업적 협력을 염두에 둔 만남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3세 경영인들이 해외 유학 경험과 첨단기술에 대한 지식,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춘 만큼 언제든 신사업에서의 협업 기회는 열려 있다.
가수 지드래곤이 2024년 1월 'CES 2024' HD현대 전시관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HD현대
신유열 롯데지주 부사장,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 지드래곤, 최용호 갤럭시코퍼레이션즈 대표가 'CES 2024'에서 와인 회동을 하는 모습. 사진=지드래곤 인스타그램
레이싱 서킷에서 미래차 기술 동맹까지
앞서 오너 3세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은 지난해 10월 경기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현대 N×토요타 가주 레이싱 페스티벌’에 청바지와 점퍼 차림으로 참석해 토요타 아키오 토요타그룹 회장과 회동해 눈길을 끈 바 있다.
흔히 정장과 수행비서로 상징되던 재계 회동의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젊은 총수들은 레이싱 문화를 매개로 한 라이프스타일 기반의 기술 교류라는 새로운 형식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정 회장은 글로벌 경쟁사들과 경합을 벌이면서도 협력이 필요한 미래차 분야에서는 적극 협력하는 ‘프레너미 전략(프렌드+에너미)’으로 실리를 챙기고 있다. 이 페스티벌은 현대차의 고성능 브랜드 현대 N과 토요타 가주 레이싱(GR)이 모터스포츠 문화 활성화를 위해 처음으로 손잡고 연 행사로 정 회장과 아키오 회장이 처음 공개 회동해 업계 안팎의 관심을 모았다.
정 회장은 “연초에 아키오 회장을 일본에서 봤을 때 자신이 레이싱에 진심이라 관련 행사를 진행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 오늘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현대 N x 토요타 가주 레이싱 페스티벌'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임형택 한국경제신문 기자
이 회장은 삼성 사업장인 에버랜드에서 열린 행사인 만큼 아키오 회장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행사장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재계에선 글로벌 1, 3위 완성차 업체 수장과 잇따라 회동한 만큼 향후 삼성의 미래 먹거리인 전장 분야에서 파트너십을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이 만남은 올해 2월 삼성SDI와 현대차그룹 간 로봇 전용 배터리 공동개발 착수로 이어졌다. 현대차와 토요타는 모터스포츠로 출발해 수소 생태계, 자율주행, 인공지능(AI) 등 미래차 분야까지 협력 범위를 계속 넓히고 있다. 최근 한일경제인회의에서 김동욱 현대차 부사장은 토요타와 수소 충전 기술 표준화 추진 등 협력 내용을 밝힌 바 있다.
MZ 오너 3세들의 달라진 사교 방식. 그래픽=정다운 기자
폐쇄적 모임 지고 가치 중심 모임 뜬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재계의 네트워크는 골프장, 고위층 중심 사교클럽, 향우회 등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모임 일색이었다. 오너 2·3세와 벤처 창업인들의 모임으로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벤처 창업자 출신인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도 속해 있던 브이(V)소사이어티, 30대 2·3세와 벤처기업가가 주축을 이룬 글로벌 모임인 한국YEO(Young Entrepreneurs’ Organization),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형제, 이웅열 코오롱 명예회장, 신동원 농심 회장 등 서울 신일고 출신의 2·3세 사교클럽인 신수회 등이 대표적이다.
과거의 폐쇄적 사교모임은 권력과 정보를 독점했다. 이들 모임은 정치·경제권과의 연결, 사업 기회 독점, 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 사교 모임은 국정농단 사건 이후 사회적 투명성 요구, MZ세대 오너로의 세대교체로 거의 해체되거나 비공개로 축소됐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교모임으로는 40대 이하 회장, 사장급이 주축이 된 한국YPO가 있다. 비중 있는 오너 2세들이 모여 있어 ‘미니 전경련’으로 불리던 사교모임이다. 입회 기준이 까다로워 40세 이전에 대표이사를 맡은 사람으로 기존 회원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가입할 수 있다. 50세가 넘으면 명예회원으로 전환돼 활동이 제한된다.
한국YPO는 미국에서 시작된 YPO(Young Presidents’ Organization)의 한국지부다. 한국지부는 1966년 고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과 고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주축이 돼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담철곤 오리온 회장 등이 멤버로 활동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조찬모임을 갖고 각계 전문가를 초빙해 강연을 듣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질적으로는 경영상 마주하는 다양한 어려움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될 인맥 네트워크 형성이 주된 목적으로 전해진다.
재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시기에 생겨나 모임명을 내건 공개적인 행사는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2세 경영인들이 한창 일할 시기에 있기 때문에 회장 맡기를 꺼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CES 2024'에 마련된 HD현대 전시관에서 대화를 나누는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과 신유열 롯데지주 부사장. 사진=뉴스1
과거 사조직 중심의 폐쇄형 인맥이 정보 독점과 권위 유지의 수단이었다면 지금의 젊은 오너들은 브랜드 감각과 개방형 연대를 통해 산업 간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들에게 인맥은 더 이상 출신 학교나 혈연 중심의 배타적 연결이 아니다.
MZ세대 오너들의 등장은 단순한 세대교체를 넘어 사교의 형식과 내용 모두를 바꾸고 있다. 그들의 네트워킹은 누구와 알고 지내는가보다 무엇에 공감할 수 있는가가 중심이다. 비슷한 취향을 기반으로 공개된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방식은 폐쇄성과 권위로 상징되던 과거의 사교 문화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재계 전반의 협력과 네트워크 작동 방식을 바꾸는 신호라는 해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젊은 오너들은 취향과 브랜드 감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제는 인맥을 숨기기보다 보여주는 게 경쟁력인 시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