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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 첫날, 동행 취재기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29일 아침 전남 여수 석창사거리에서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민주노동당 제공

“사진 한 장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29일 오전 7시10분,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로 들어가는 초입 석창사거리에서 ‘기호5번’이 적힌 커다란 장갑을 끼고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던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에게 시민 한 명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여수국가산단에서 출퇴근 버스를 운전하는 오외진(57)씨다.

“정치인과 평생 사진을 찍어본 적 없다”던 그였다. 오씨가 그런데도 아침 퇴근 길, 자전거를 타고 3㎞나 떨어진 이 유세 장소까지 찾아온 건, 세차례의 대선 후보 티브이(TV) 토론에서 권 후보가 보여준 모습이 마음 깊이 남았기 때문이다. 오씨는 이 토론 전까지만 해도 권영국이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했다. 그에게 권 후보는 “정책적으로 비전도 없고 험담이나 사생활만 뜯어싸대는 토론에서 유일하게 괜찮아 보였던 후보”였다. 오씨는 “(권 후보에게서) 노무현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권 후보는 세차례 대선 티브이 토론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레드카드’를 들어 보이고, 손바닥에 백성을 뜻하는 한자 ‘민’(民)자를 쓰고 나와 화제가 됐다. 또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에게 ‘자격이 없다’며 사퇴를 촉구하고, 부자 감세·친기업 행보를 보이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비판하며, 12·3 내란 이후 거대 양당 모두에게 답답함을 느끼던 유권자들에게 사이다 맛을 안겨줬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29일 오전 전남 여수 주삼동 주암마을회관에서 사전투표를 마친 뒤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류석우 기자

권영국이 “사표는 절대 없다”고 한 이유

“티브이 토론이 끝나고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사전투표를 하기 위해 주삼동 주암마을회관으로 이동하던 길 이은주 후보 비서실장이 이렇게 말했다. ”특히 기차역 같은 델 가면 같이 사진 찍자는 요청이 많아요. 대부분 토론회를 보고 (권 후보를) 알게 됐다고들 해요.”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온 권 후보도 기자들 앞에 서서 말했다. “아마 그동안 (저를) 잘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서민의 삶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후보인지 토론을 통해 잘 보셨을 겁니다. 저는 사회적 약자와 가려진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습니다.이번엔 나를 대변할 수 있는 후보를 뽑는 대선이 되길 기대합니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29일 오전 광주 동구의 길거리에서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류석우 기자

투표를 마친 권 후보는 여수산단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광주전남지부와의 간담회가 예정돼 있었다. 간담회 전, 권 후보는 화섬노조 조합원들과 빵을 나눠먹으며 가벼운 얘기를 나눴다. “실물이 더 나은데요.” 한 조합원의 말에 “화면으로는 별로라는 이야기냐”며 권 후보가 우스갯 소리를 했다. 모인 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나왔다.

간담회가 시작되고, 김성호 화섬식품노조 광주전남지부장이 여수산단의 위기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구조조정 계획을 하는 사업장들이 많고 원청도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장 취약한 사내하청부터 구조조정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이에요.” 최진만 화섬식품노조 엘지(LG)화학사내하청지회장도 말을 보탰다. “지금 대통령 후보들 여수산단 위기라는 거 다 알아요. 그런데 여기에 대한 어떤 해결 의지도 없는 거고. 권 후보에게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연락했습니다.”

조금 전 웃음기는 오간 데 없이, 자리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30분 간 이어진 노동자들의 하소연을 듣고 권 후보가 어렵게 입을 뗐다.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비정규직이나 사내하청이 먼저 폭탄을 맞게 될 텐데, 내가 당선되면 당장 협의체를 구성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아요. 일단은 이 문제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것부터 해서 저희도 고민을 같이 해보겠습니다.”

권 후보 말 끝에 김 지부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요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총선이나 대선 때 후보자들이 한번 와서 아픔을 듣고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경험을 너무 많이 했어요. 저희 아픔만 위로하고 가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권 후보에게 이 말은 “뼈아픈 이야기”였다. “사실 제가 이번에 대통령 될 수 없다는 건 다 아실 거 같아요. 이번엔 어렵겠죠. 저를 만나는 게 무슨 의미 있을까 하는 분도 많을 거예요. 제가 당장 문제를 해결할 만큼 힘과 권력이 있진 않습니다.” 권 후보는 “그래서 이번에 필요한 건, 우리의 목소리를 함부로 가볍게 여길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절대 사표는 없어요. 제가 5% 득표하면 민주당도 저를 함부로 못합니다. 제가 하는 얘기를 정책에 반영할지 고민하게 될 거예요.”

이준석의 기자회견, 그리고 한 통의 전화

화섬식품노조와의 간담회를 마치고 광주로 이동하는 차 안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서울의 선거대책위원회와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던 이은주 실장이 “기자회견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 시각,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지난 27일 티브이 토론에서 했던 여성혐오 발언이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후보자와 그 가족에 대한) 단계적 검증”을 위한 절차였다고 주장했다.

차 안에서 조용히 대화가 오가는가 싶더니 잠시 후, 기자들의 휴대폰엔 ‘이준석 후보 티브이 토론 여성혐오 발언 관련 입장 발표 예정’이라는 공지 문자가 일제히 떴다. 좀 더 확실한 대응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차 안의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준 건, 한 통의 전화였다. 통화하던 권 후보의 얼굴에 환하게 웃음이 번졌다. 여수산단 내 남해화학 파견노동자들이 불법파견 소송 1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업체는 40여년 전부터 협력업체를 두고, 여러 제품 생산공정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투입해왔다. 권 후보는 정의당 대표로 취임하기 전 이 소송의 변론을 맡은 바 있다.

“불법파견 소송은 노동자 입장에선 인생이 걸린 문제이니 (변호사로서도) 책임감이 크거든요. 이겼다고 하니 당연히 기쁘죠. 이분들의 삶이 다시 밀려나지 않게 된 것 같아서 너무 다행스러워요.”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티브이(TV)토론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들어 보인 레드카드. 뒷면에는 토론에서 언급하려고 한 노동자와 농민, 성소수자 등이 쓰여있다. 류석우 기자

다시 레드카드를 들다

광주에 도착한 권 후보는 윤석열정권즉각퇴진·사회대개혁 광주비상행동과의 간담회 그리고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노조 및 사측과의 간담회를 이어갔다. ‘정규직 외 협력업체나 비정규직 직원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권 후보 얘기에 회사 쪽에선 “화재 조사 이후 검토하겠다”는 원론적 말만 반복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금호타이어 정문 앞에선 권 후보는 예고했던 대로 이준석 후보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을 했다. 국회 단상 위에 선 이준석 후보와는 달리 그는 공장 앞 맨 아스팔트 바닥에 섰다.

“성폭력을 비판하기 위해 성폭력을 자극적으로 전시해야 합니까?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막말을 전시하는 이준석의 나라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혐오 하나에 기대 연명해 온 이준석의 정치를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권영국의 승리로 퇴장시켜 주십시오.”

권 후보는 그리곤 가슴에 품었던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다. 첫 대선 티브이 토론회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꺼내 들었던 바로 그 레드카드다. 사실 이 카드는 이은주 실장이 정의당 의원이던 시절, 김문수 당시 경제사회노동위원장에게 들어보였던 카드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 손을 타며 땀 때문에 글씨가 지워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붉은 경고 카드 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이들이 더 이상 밀려나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고, 자꾸만 주변으로 밀려나는 이 불평등한 세상,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권 후보는 여기에 한마디를 더 보탰다. “제2, 제3의 이준석이 나와서 혐오와 막말을 전시하게 둘 수 없습니다. 이제 유권자들이 혐오 정치에 레드카드를 들어줄 때입니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29일 오후 광주 광산구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을 찾아 사측과 노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민주노동당 제공

다시 서울로 가기 위해 도착한 광주송정역. 기차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10여분이었지만, 잠깐의 틈에도 권 후보는 그를 알아보며 악수를 청하는 시민들에게 시간을 할애했다.

“왜 이렇게 아픈 데가 많을까요.” 고된 일정 탓에 피곤하다는 얘긴가 싶었더니 그 말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감정을 참느라 힘들어요. 곳곳에 아픈 사람들이 참 많아요. 정치가 이런 사람들한테 필요한데, 결국 해결이 안 되니까 다들 정치가 필요하다고 느끼질 않는거예요.” 하루종일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유권자들을 만났던 권 후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잦아들었다. “(정치인들이) 다들 어디에 눈길을 두고 있는 걸까요.”

아픔과 분노, 미안한 마음이 뒤엉킨 목소리다. 30일 아침, 그는 경남 창원 현대로템 앞으로 향한다. “지워져선 안 되는 목소리”를 들으러 현장에 간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29일 오후 광주 광산구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에게 레드카드를 들어 보이며 경고를 하고 있다. 류석우 기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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