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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동남아 선거 이모저모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싱가포르 총선이 열린 이달 3일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가 투표함에 표를 넣고 있다. 싱가포르=AP 연합뉴스싱가포르 총선이 열린 이달 3일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가 투표함에 표를 넣고 있다. 싱가포르=AP 연합뉴스


다음 달 3일,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진다. ‘민주주의 꽃’이라 불리는 투표를 통해 더 나은 내일을 만들려는 열망은 국내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도 이어졌다. 지난 20일부터 25일까지 엿새 동안 세계 118개국, 223개 투표소에서 재외국민 투표가 진행됐다.

재외선거인 명부에 등재된 25만8,254명 가운데 20만5,268명이 참여했다.
투표율 79.5%, 2012년 재외국민 투표 도입 이후 가장 높은 수치
다. 비록 몸은 타국에 있어도 한 표에 담긴 무게를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 결과다.

지난 20일 베트남 하노이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21대 대선 재외국민 선거 투표소에서 최영삼 대사가 투표 용지를 받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이처럼 투표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사회에 새기는 행위다. 다만 그 모습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게 구현된다.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얼핏 비슷할 것 같지만 인종과 언어, 문화, 종교, 경제 수준이 다른 만큼 선거 제도와 문화는 천차만별이다.

‘잉크’로 투표 인증, 인니·필리핀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처럼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한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동티모르 정도다. 이 가운데 인구 2억8,000명 인도네시아는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3위 민주주의 국가로 꼽힌다. 5년마다 돌아오는 대선·총선에는 유권자 약 2억 명이 투표소로 향한다.

인도네시아 대선·총선을 하루 앞둔 지난해 2월 13일 동자바주 안동그레조에서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산간 마을 투표소에 전달할 투표함과 물품을 말에 싣고 산을 넘고 있다. 안동그레조=AP 연합뉴스 자료사진


거대 인구의 정치적 견해를 소화해야 하는 만큼 선거 규모도 상상 초월이다. 지난해 2월 대선 당시 군도를 이루는 1만7,000개의 섬 중 사람이 거주하는 7,000곳에 82만 개 투표소가 설치됐다. 투표 관리 인력만 570만 명에 달했다. 차량 접근이 불가능한 도서·산간 지역에는 말과 코끼리까지 동원돼 투표함과 물자를 운반했다. 당일치기 투표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투표 방식도 유별나다.
투표 용지에 도장을 찍거나 펜으로 표기하는 대신, 지지 후보 번호 옆을 못으로 뚫는다.
이를 ‘뇨블로스(nyoblos)’라 부른다. 투표 결과 조작을 어렵게 한다는 명분으로 도입됐다. 그러나 구멍을 하나 더 뚫어 무효표를 만들 수 있는 점은 이 방식의 '구멍'으로도 지적된다.

인도네시아 대선·총선을 한 달 여 앞둔 지난해 1월 반튼주 탕그랑의 한 물류창고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 대통령 후보 투표용지를 정리하고 있다. 투표 용지에 도장을 찍거나 펜으로 표기하는 대신 지지 후보 번호 옆을 기표소에 마련된 못으로 뚫으면 된다. 탕그랑=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투표를 마치면 손가락에 짙은 특수 잉크를 바른다. 중복 투표를 막는 일종의 인증 장치다.
주민등록 체계가 한국처럼 정교하지 않은 탓에, 육안 확인이 가능한 방식이 도입
됐다. 일반적으로 새끼 손가락을 잉크에 담갔다 꺼내지만, 다른 손가락도 무관하고 여러 손가락에 묻혀도 상관없다. 잉크는 보통 72~96시간 정도 유지되며 길게는 한 달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필리핀과 동티모르도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잉크 자국은 자연스럽게 ‘투표 인증’ 수단이 된다. 한국 청년들이 손등에 기표 인주를 찍고 인증샷을 찍는 것처럼, 인도네시아 유권자들도 선거가 끝난 뒤 잉크 묻은 손가락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한다. 인도네시아 언론인 이스밀라는
“손가락이 깨끗하면 투표를 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창피를 당할 수도 있다”
고 설명했다.

인도네시아 대선·총선이 치러진 2019년 4월 자카르타의 투표소에서 한 유권자가 투표를 마친 뒤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중복 투표 방지를 위해 기표 후 손가락에 특수 잉크를 바른다. 자카르타=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인도네시아 투표 인증샷


선거법상 투표 위임 가능한 베트남



공산당 일당 체제인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의 지도자 선출 방식은 사뭇 다르다. 국민에게는 선출 권한이 없고 5년마다 ‘최대 정치 행사’로 불리는 공산당 전국인민대표회의(전대)에서 결정
된다.

당원 500만 명을 대표하는 대의원 약 1,500만 명이 당 주요 사안을 결정할 중앙집행위원회(약 200명)를 선출한다. 이 위원회가 다시 20명 안팎의 '정치국원'을 추려내고, 이후 정치국 위원이 내부에서 공산당 서열 1위인 당 총비서(서기장)를 뽑는다.

서기장이 결정되면 권력 서열 2위이자 한국의 대통령과 비슷한 역할을 맡는 국가주석(외교·국방), 국무총리(3위·행정), 국회의장(4위·입법) 윤곽도 드러나게 된다. 당 서기장이 2~4위 임명제안권을 갖고 있어 사실상 그의 뜻에 따라 국가 권력 방향이 정해지는 게 특징이다.

2021년 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13차 공산당 전국대표회의(전대)가 열리고 있다. 전대에서는 향후 5년간의 국가 정책 방향과 지도부 인선이 논의된다. 하노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반면 5년마다 진행되는 국회의원 선거는 국민 참여가 가능하다. 만 18세 이상은 1인 1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사전에 인민위원회에서 받은 유권자 카드를 선거 당일 투표소에 제출하면 투표용지를 받게 된다. 투표를 마친 뒤에는 유권자 카드에 ‘완료’ 도장을 찍어 중복 투표를 막는다.

‘대리 투표’ 허용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베트남 선거법 제7장 69조 3항은 스스로 투표용지를 작성할 수 없는 유권자는 다른 사람에게 기표를 위임할 수 있도록 명시
하고 있다. 한국처럼 직접·비밀 선거를 대원칙으로 하되, 불가피한 사정까지 감안한 조항이다. 본인이 직접 투표함에 용지를 넣는 것이 원칙이지만, 장애 등 사유가 있는 경우 타인이 이를 대신할 수도 있다.

2021년 5월 치러진 베트남 총선 당일, 박장성의 한 노인이 투표소에 가는 대신 자전거에 실린 이동 투표함에 투표지를 넣고 있다. 현지매체 징 캡처


선거관리위원회가 직접 보조 투표함과 용지를 들고 유권자 거주지를 찾아가 투표를 돕는 ‘출장 투표’도 허용
된다. 거동이 불편한 유권자의 투표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선거 당일 출장자의 경우 사전 신고 후 투표 위임이 권장된다. 투표를 누락하면 장문의 사유서 제출이 필수다. 불참이 처벌 대상은 아니지만 사유서를 냈다는 자체만으로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다.

형식상 위임 조건은 ‘장애’ ‘질병’ 등으로 제한돼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이 같은 규정이 느슨하게 적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노이 거주 30대 베트남인 A씨는 지금까지 직접 투표소에 가본 게 한 번뿐이라고 했다. 대부분은 가족 중 한 명이 나머지 구성원의 유권자 카드를 가져가 한꺼번에 투표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2021년 5월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 총선 투표를 독려하는 대형 포스터가 걸려있다. VNA캡처


그는 “나를 포함해 친구 10명 중 서너 명은 가족에게 투표를 부탁하거나 포기한다. 그럼에도 투표율은 항상 100%에 가깝다”며 “
건강 등 사유를 이야기하면 (위임이) 어렵지 않고, 투표소 직원들도 정해진 기준(투표율)을 채우고 싶어해 규정을 넘어서는 투표를 묵인하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실제 2021년 5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속에서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99.57%에 달했다. 직전 총선(99.35%)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전 국민 투표’ 수준이다.

승려에게 투표권 안 주는 '불교 국가' 태국



인구 93%가 불교 신자인 태국에서는 약 20만 명의 승려와 약 8만5,000명의 사미승(예비 승려)이 투표권을 갖지 못한다. 1949년 헌법에 관련 조항이 명시되면서 종교인의 선거 참여가 금지됐다. ‘속세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불교 교리에 따른 것으로, 종교의 순수성과 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도 있다.

2021년 8월 태국 방콕 민주기념비 앞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한 승려가 쿠데타 군부 내각 인사들의 사진이 붙은 인형을 배경으로 서 있다. 방콕=EPA 연합뉴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정치 격변기마다 승려들은 거리로 나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왔다.
지난 2020~2021년 태국을 뒤흔든 대규모 반정부·민주화 시위 당시에도 많은 승려가 쿠데타 군부 수장 쁘라윳 짠오차 당시 총리의 사퇴를 촉구했다. 태국 불교 최고 기구인 승가위원회는 이에 대응해 승려의 시위 참여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불적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했지만 민주화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시민 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종교인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져왔다.
①종교인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고 ②국제 사회가 참정권과 투표권을 ‘기본 인권’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정치권에서도 일부 진보 정당을 중심으로 관련 법 개정 논의가 있었지만 실제 입법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싱가포르 총선이 열린 이달 3일 거동이 불편한 유권자들이 휠체어를 타고 투표소로 들어오고 있다. 싱가포르=AP 연합뉴스


인구 600만 명의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의무투표제를 시행한다.
대선이나 총선에 정당한 사유 없이 투표하지 않으면 선거인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
된다. 이후 다시 투표하고 싶어도 명부 복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 출마도 제한된다.

투표권을 회복하려면 투표하지 않은 합당한 사유를 관계 기관에 설명하고, 50싱가포르달러(약 5만3,000원) 수수료를 납부해야 한다. △해외 근무 △유학 △질병 △출산 등은 정당한 사유로 인정되지만, 이 경우에도 정부는 ‘일시 귀국 투표’를 우선 권장한다. 이달 3일 치러진 총선 투표율은 92.47%였다. 싱가포르 선거국은 홈페이지를 통해 의무투표제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를 선택하고 선출하는 것은 시민의 책임이자 기본권이다. 선거인 명부에 이름이 오른 모든 시민은 반드시 투표해야 한다.”
투표가 민주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는 인식이 제도에 반영된 셈이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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