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9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은행마저 0%대 성장 전망을 공식화했다. 관세 충격ㆍ내수 부진 겹악재에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5%에서 0.8%로 반토막 냈다. 경기 부양을 위해선 기준금리 ‘빅컷(0.5%포인트 인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집값 상승, 환율 불안 우려에 소폭만 내렸다.
29일 한국은행은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0.8%로 수정해 전망했다. 2023년 11월 이후 지난 2월까지 4차례(2.3%→2.1%→1.9%→1.5%)에 걸쳐 지속해서 전망치를 낮춰왔는데 결국 0%대를 찍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 경제가 연 1% 미만 성장에 그친 건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4.9%),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0.8%), 2020년 코로나 팬데믹(-0.7%) 등 세 번뿐이다.
김경진 기자
내년엔 1.6% 성장할 것으로 봤는데, 2년 연속 2%를 밑도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이번 한은 전망치 0.8%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1.5%), 아시아개발은행(ADB·1.5%), 국제통화기금(IMF·1.0%) 등보다 낮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주요 해외 투자은행(IB) 8곳의 평균 전망치와는 같은 수준이다.
한은 조사국은 올해 1분기(-0.2%)에 이미 역성장을 기록한 데다 4월 들어서도 건설 경기 악화, 소비 부진이 이어지면서 예상보다 내수 회복이 더딜 것으로 내다봤다.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요인별로 보면 지난 2월에 비해 건설 경기 침체(-0.4%포인트)가 심화한 게 성장률 전망치를 가장 많이 끌어내렸고, 수출 둔화(-0.2%포인트), 소비 부진(-0.15%포인트)이 뒤를 이었다”고 설명했다.
고금리ㆍ대출 규제로 건설 경기가 꺾이면서 내수 침체가 가속화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2년간 성장률을 발목 잡아 온 가장 큰 것이 건설투자 (부진)”이라며 “건설투자가 6.1%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만약 0%라고 하면 올해 성장률은 0.9%포인트 늘어 1.7%가 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하지만 이 총재는 섣부른 금리 인하, 재정 투입으로 건설 경기를 부양하려 하면 ‘집값 상승→가계부채 증가→소비 침체’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경기를 부양하는지가 새 정부의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다. 이지호 한은 조사국장도 “나중에 필요하지 않은 시멘트 덩어리를 짓는 게 성장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며 “인공지능(AI) 발전소라든지 기업 공장 건설 규제를 완화해 성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건설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은은 미ㆍ중 갈등이 재점화하고 유예 기간 이후 트럼프 정부가 주요국에 상호관세를 다시 높게 부과할 경우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각각 0.7%, 1.2%로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대로 올해 말까지 미 관세가 상당 폭 인하될 경우엔 0.9% 1.8%로 올라갈 수 있다고 봤다. 특히 이날 미국 연방법원이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 관세 정책을 위협으로 판단하고 7월 발효에 제동을 건 데 대해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낙관적인 소식이지만 품목별 관세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라며 “관세가 내려가더라도 올해 성장률은 0.9%이거나 조금 더 높아지는 수준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열어 기준금리를 연 2.75%에서 2.5%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금통위원 6명 모두가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지난달 1500원 선을 위협하는 달러당 원화가치에 금리를 동결했지만, 미ㆍ중 무역 협상 이후 1370원대로 비교적 안정된 흐름을 보이면서 통화정책을 완화할 여력이 생겼다.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는 다시 2%포인트로 벌어졌다.
김주원 기자
하지만 추가 인하 시기와 정도에 대해 이 총재는 말을 아꼈다. “예상보다 성장세가 크게 약화한 만큼 향후 금리 인하 폭이 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단기적으로 2% 밑으로 내려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시장의 연내 2회 추가 인하, ‘빅컷’ 기대에 대해서도 “유동성(통화량)은 충분한 상황이라 금리를 너무 많이, 빨리 낮추면 경기 부양보다 주택 등 자산 가격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며 “가계부채 등 금융 안정 리스크에 유의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금통위원 6명 중에서도 4명만 향후 3개월 내 추가 인하 가능성을 열어놨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올해 들어 경제 정책 대응의 무게 중심은 통화정책에서 재정정책으로 옮겨갔다고 본다”며 “새 정부에서 추진할 추가경정예산안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시기와 내용이 더 중요하다. 올해 성장률을 좀 더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소비ㆍ투자 활성화 등을 유도해 구조적 저성장 우려를 완화할 수 있는 재정정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