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뒤흔들 도전적 질문 설파 이정동 교수
“중국 베끼고 모방하며 서서히 침몰할 텐가”
“리더십이 새로운 도전 인내하며 지원해야”
“도전 기회에 나랏돈 투자, 그게 세금 역할”
“대통령이 과학기술 존중해야 부처 움직여”
“미래세대 흥분하고 국가는 실패 토닥여야”
“중국 베끼고 모방하며 서서히 침몰할 텐가”
“리더십이 새로운 도전 인내하며 지원해야”
“도전 기회에 나랏돈 투자, 그게 세금 역할”
“대통령이 과학기술 존중해야 부처 움직여”
“미래세대 흥분하고 국가는 실패 토닥여야”
이정동 서울대학교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2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공학관에서 가진 본보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존중해야 부처가 움직인다"고 강조했다. 2025.05.22 박시몬 기자 [email protected]
2015년이었다.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26명이 의기투합했다. 당시 한국 산업의 위기를 냉철하게 진단하고 대한민국 미래 제언을 담은 책을 냈다. 제목이 ‘축적의 시간’. 이 작업을 주도한 이정동 서울대 공과전문대학원 교수는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신화를 써온 우리 산업이 지금 경쟁력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가 어느 특정 산업만이 아니라 전 산업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올해 들어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라 수년 전부터 그 전조를 보이며 구조적으로 심화하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 암울하다. 미국의 지위는 굳건하고,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반면 우리는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주력 산업의 포트폴리오는 20년 이상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 교수의 비판은 뼈를 때린다. “한국의 산업 생태계는 고인 방죽물과 같다”고, “기업가 정신이 사라진 자리에 리스크에 민감한 관리자만 남아있다”고, 또 “새로 보충하지 않은 채 예전에 쟁여둔 냉장고의 음식만 꺼내 먹고 있는 형국”이라고.
그래서 이 교수가 주도해 새롭게 꾸린 작업이 ‘그랜드 퀘스트 10’이다. 각 분야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세상을 흔드는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 10개를 매년 새롭게 추려 책을 내고 적극 공유한다. 본인에게는 1원 한 푼 남는 게 없지만, 이런 창조적 질문이 있어야만 우리 경제가 ‘추격’에서 벗어나 ‘선도’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 시작한 일이다. 기업 오너들은 물론 대선 후보들 또한 깊이 새겨야 할 내용들이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대 공학관 연구실을 찾았다.
◇네 번째 블랙박스 해체
22일 본보와 인터뷰하는 이정동 교수 뒤쪽으로 연구실 서가에 책들이 꽂혀있다. 2025.05.22 박시몬 기자 [email protected]
- 교수님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딱 한 문장으로 본인을 소개하신다면요.
“어렵네요. ‘탁월한 기술 혁신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연구하는 사람’, 이 정도가 어떨까요.”
- 부연을 해주시죠.
“뉴턴이 우주의 원리를, 다윈이 생물의 다양성을, 그리고 프로이트가 인간의 마음을 풀어냈잖아요. 그들이 모두 블랙박스를 해체한 거죠. 저는 새로움이 탄생하는 구조를 풀고자 합니다. 창의적인 천재가 아니라도 특정한 조건만 충족되면 누구라도 혁신적 발명과 발견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농담 삼아 네 번째 블랙박스 해체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 ‘축적의 시간’ 이후 일관되게 던지는 제안으로 보이는데요.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뭔가요.
“우리나라가 2000년 전후까지는 ‘추격형 모델’을 통해 눈부신 압축성장을 했죠. 선진국이 만들어 놓은 개념설계(concept design), 그러니까 혁신적 설계도를 가져와 빠르게 흉내 낸 결과에요. 하지만 이제는 글로벌 환경이 추격형 모델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바뀌고 있어요. 모방하려고 하면 이미 선진국에선 새로운 설계도가 등장하는 거죠. 지금까지의 성장 공식을 버려야 해요. 우리가 선도해서 게임의 룰을 만들지 않으면 서서히 침몰할 수밖에 없습니다.”
-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이 그 시작이라고 보시는 거군요.
“맞아요. 세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최초의 질문이 있어야 하고요. 계속된 실험을 통한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축적돼야 돼요. 이를 통해 버전을 계속 업그레이드하는 스케일업(scale-up·확장)이 필요합니다. 그런 뒤에라야 우리도 독창적 설계도(개념설계)를 손에 쥘 수 있어요. 독일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위대한 것은 단지 뛰어난 수학자여서가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흥분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서였다고 봅니다.”
사실 '패스트 팔로어'에서 벗어나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는 주문은 너도나도 했다. 단지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을 뿐. 일각에서는 남 하는 일에 감놔라 배놔라 훈수만 두느냐는 말도 나오더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최초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직접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그게 작년부터 시작한 ‘그랜드 퀘스트’다. 올해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역노화 기술을 이용해 인간은 다시 젊어질 수 있을까. 아직 등장하지 않은 미래에 나타날 신종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는 백신을 선제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일반인공지능(AGI)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할 수 있을까.
- 이런 기술들이 우리나라에서 개발이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요. 기업들 반응은 어떻던가요?
“포럼을 열 때마다 기업 신사업부나 연구소 임직원들이 적극 관심을 보이더군요. 이 10개 질문은 일종의 예시라고 보면 되고요. 각자의 환경에 맞는 도전적 질문들을 적극 발굴하는 노하우를 전파하는 게 목적이에요. 우리 사회 곳곳에 그런 도전적인 질문이 넘쳐나고 해답을 찾기 위한 공격적인 확장(스케일업)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거죠.”
◇오너 핑계대는 CEO
이 교수가 어느 때보다 지금을 절박한 위기로 보는 건 중국의 위협이 감당하기 벅찬 수준에 와있다고 봐서다. 미국 등 선진국이 ‘시간’으로 승부를 했다면, 중국은 넓은 영토와 시장, 즉 ‘공간’으로 시간을 우회하는 승부를 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선진국이 1년에 10번씩 100년에 걸쳐 1,000번의 시행착오를 축적해 길을 개척했다면, 중국은 1년에 100번씩 10년만에 1,000번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하나 다 다른 경험을 축적하는 게 공포스럽다고 했다. 딥시크가, 비야디가, CATL이, 로보락이 그 결과물일 것이다. 중국이 세계 최첨단 제조업 강대국이 되겠다는 10년 계획인 '중국제조 2025'의 목표를 이미 달성하고 다음 10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22일 본보와 인터뷰에 앞서 서울대 공학관 연구실 복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정동 교수. 2025.05.22 박시몬 기자 [email protected]
- 이대로면 중국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4월에 상하이모터쇼를 가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창업 2, 3년 신생업체들이 완성차를 만들어 내놓더라고요. 살짝 고개만 돌려도 배터리, 전장, 강판, 바퀴, 페인트 등이 다종다양하게 널려있으니 가능한 일이에요. 넓고 다양한 생태계에서 실험된 결과들이 사회적으로 축적된 힘인 겁니다..”
- 우리 산업계에 대해선 독한 진단을 많이 하시더군요.
“10년 전보다 훨씬 심각하죠. 정말 20년째 예전에 쟁여둔 냉장고 음식만 꺼내먹고 있는 형국이에요. 이대로면 곧 텅텅 비겠죠. 우리나라 산업 포트폴리오가 20년 넘게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 게 강력한 증거에요.”
-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함이 필요할 텐데요.
“우리 산업계에는 그런 절박함이 안보여요. 내놓는 처방이 더 빠른 벤치마킹이에요. 새로운 도전은 없이 기존에 해오던 걸 더 강력하게 쓰려고 하는 거죠. 앞으로는 중국이 만든 설계도를 받아서 흉내 내고 모방하며 먹고 살겠다는 걸까요? 그래서는 한국에 내일은 없습니다.”
- 뭐가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까요.
“리더십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고 교과서와 달라서 불안하더라도 새로운 걸 한번 해보자고 질문을 던지고 목표를 제시해야 됩니다. 단기 성과를 기대해선 안 돼요. 숱한 시행착오 과정을 인내심을 가지고 버텨야 합니다. 리더십이 기다려주지 않으면 구성원들은 절대 해낼 수가 없어요. 국가 연구개발 사업 성공률이 왜 그렇게 높은지 아세요? 실무자들이 실패하면 안 되니까 질문 자체도 도전적으로 하지 않는 겁니다.”
- 오너가 제일 중요하겠군요.
“그렇긴 한데요. 고용된 최고경영자(CEO)도 오너 핑계를 대고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 적절히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무리한 도전을 하지 않는 거죠.”
◇신산업 열어가는 기업가형 국가
그는 무엇보다 정부 역할을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 경제과학특별보좌관으로 2년6개월 가량을 일하면서 그 중요성을 더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국가가 의지를 가지면 신산업을 열어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곧 출범할 차기 정부에 대한 주문이기도 하다.
이정동 교수가 지난해 출간한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2025.05.22 박시몬 기자 [email protected]
-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뭘까요.
“정부가 한 해 재정으로 쓰는 돈이 670조 원 가량입니다. 그중 물건을 사는데 들어가는 돈이 200조 원 가량이에요. 대한민국에 이 정도의 막강한 바잉 파워(구매력)를 가진 집단은 없죠. 정부가 어떤 물건을 사느냐에 따라 산업계 방향이 확 달라질 수 있어요. 그 돈의 일부라도 단순히 최저가 입찰이 아니라 혁신성을 전제로 쓰자는 겁니다.”
- 예를 들자면요.
“미국이 신산업을 이끌어내는 데는 정부 역할이 상당해요. 대표적으로 미국 국방부가 ‘이런 기능이 있는 제품이 필요해'라고 시장에 주문을 내면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달려듭니다. 미국의 코핀이라는 회사가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핵심모듈의 최강자가 된 것도 이를 통해서였어요. 반도체 기술 원천이 실리콘밸리라지만 더 깊은 원천은 미국 정부에요. 공공이 계속 문제를 던지면 실리콘밸리가 답을 찾으면서 성장한 거죠. 실제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신산업의 탄생은 대부분 정부 재정으로 이뤄졌어요. 정부 재정을 도전할 수 있는 기회에 써야 해요. 기업가형 국가란 말도 있잖아요? 세금은 이렇게 쓰는 겁니다.”
- 윤석열 정부는 재정 지원은커녕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했었죠.
“당시 학교에서 해고된 포닥(박사후연구원)이 많죠. 예산을 1년 만에 복원했다지만 한번 잘리면 돌아올 수가 없어요. 게다가 의대 정원을 한꺼번에 1,500명 늘렸어요. 쉽게 말해 공대에 올 학생 1,500명을 고스란히 의대로 옮긴 겁니다. ”
- 쉽게 복원이 안 되는 건가요?
“총량보다 중요한 게 꾸준함이에요. 물건을 생산할 때는 전원을 껐다가 2년 뒤에 전원을 다시 넣으면 바로 생산이 되잖아요. 연구개발은 전원을 차단하면 축적된 게 사라지기 때문에 전부 다시 시작해야 되는 거에요. 향후 20년, 30년 악영향을 줄 고약한 일을 한 겁니다.”
- 금융도 혁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강하게 비판하시던데요.
“원래 산업의 도전성은 금융이 뒷받침을 해줘야 하거든요. 그래야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스케일업 과정을 버텨낼 수가 있죠. 그게 금융의 본질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금융이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도대체 한국에서 금융이 무슨 역할을 했길래 1년에 수십 조 순익을 냅니까. 그러면서 규제산업 운운하더군요. CEO들은 오너 핑계, 금융기관들은 금융당국 핑계만 대는 거죠.”
◇어린 과학기술 인재 손잡는 대통령
의대로 몰리는 우수한 인력들을 다시 이공계로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 또한 국가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과학기술자를 존중하는 국가적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22일 서울대 공학관 연구실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이정동 교수. 2025.05.22 박시몬 기자 [email protected]
- 과학기술자 존중을 위해 대선 후보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과학기술이 중요하다 정도라도 얘기해주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대통령이 과학기술자에 대해 사회적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하면 장·차관들이 움직이거든요. 관련 행사 한 번 갈거 두세 번 가고, 10명 만날 거 100명 만나죠. 제도 개선도 적극 나섭니다. 대통령이 어린 과학기술 인재 더 만나주고 격려해주고, 이런 모습이 많이 노출되면 사회 분위기가 바뀔 겁니다.”
- 해외 이공계 인재 유입도 필요할 텐데요.
“맞아요. 동남아 국가에 똑똑한 인재를 많습니다. 한국에 가면 대접을 잘 해준다더라는 얘기들이 퍼질 수 있도록 해야 돼요. 그들을 끌어들이고 붙잡을 수 있는 매력적인 유인을 국가가 제공해야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인재 유입은커녕 유출을 걱정해야 하죠.”
- 연구 지원은 어떤가요.
“무엇보다 기초연구, 국가미션연구 등 당장은 돈이 되지 않지만 긴 안목으로 국익을 높일 수 있는 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돼요. 자타 공인 선진국이라고 한다면 기후환경, 해양 등 글로벌 문제에 대한 연구에 돈을 써야 합니다. 먹고 살만하니까 남 도와주자 이런 도덕적인 얘기가 아니고요. 미국이나 유럽이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해답을 찾으면서 남들이 쫓아오지 못할 기술의 씨앗을 찾는 겁니다. 국격을 높이는데 K컬쳐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봅니다.”
-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AI 육성을 말하는데요. 어떤 게 필요할까요.
“AI 개발 인력만 키워서 될 게 아닙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수요자들의 AI 감수성을 키우는 일이에요. 기업 등 수요자들에게 어떤 AI 수요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또한 추격이 아니라 '그랜드 퀘스트'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래야만 남들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의 AI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봅니다.”
- 마지막으로 여쭐게요. 그래서 한국은 희망이 있을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 ‘최초의 질문’이 있고, 그걸 보고 미래세대가 흥분해 도전하고, 국가가 이를 뒷받침하면서 실패해도 괜찮다고 등 두드려주는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그런 벅적벅적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면 충분히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이정동 교수. 2025.05.22 박시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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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동 교수는
=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 공과전문대학원 및 대학원협동과정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21년 대통령 비서실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축적의 시간’(2015) ‘축적의 길’(2017) ‘최초의 질문’(2022) 등을 통해 한국 산업의 미래 기술과 혁신 동력 찾기에 매진하고 있다. 요즘엔 인간이 만든 품목 7,500만종에 대해 탄생부터 지금까지 족보를 만들어 새로운 문명사를 쓰겠다는 원대한 꿈도 꾸고 있다.그랜드 퀘스트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