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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여름, 미군 클럽에서 일하던 17살 김경희 씨(가명) 앞에 봉고차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낯선 남성들이 내리더니 경희 씨를 끌어다 강제로 차에 태웠습니다.

파출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한참 이동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인천에 위치한 협성여자기술양성원이었습니다.

같은 해 김은지 씨(가명)는 오산 미군기지 근처에 갔다 평택여자기술양성원에 끌려갔습니다.

붙잡힌 장소만 달랐지 경희 씨와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그해에 잡혀간 여자가 1만 2천 명이 넘었습니다.

■모든 걸 매로 다스리는 곳, 여성수용시설


경희 씨가 기억하는 협성여자기술양성원은 '모든 걸 매로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수시로 '오리걸음', '토끼뜀'과 같은 기합이 주어졌고, 반항하면 여기저기서 몽둥이가 날아왔습니다.

매를 맞으니 상처가 나는데, 치료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구비된 약은 소염진통제 한 종류뿐이었습니다.

경희 씨와 같은 방을 쓰던 원생은 폐결핵에 걸려 밤이면 피를 토했고, 보다 못한 원생들이 몰래 하얀 죽을 쒀다가 먹였습니다.

1992년 서울시립여자기술원에서 미용 기술을 배우는 여성들(KBS 자료 화면)

아침 조회가 끝나면 직업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경희 씨는 스스로 신을 양말을 짜고, 외국으로 수출된다는 스웨터에 수를 놓는 일을 했습니다. 소일거리로 번 돈으로 비누도 사고 생리대도 샀습니다.

은희 씨의 일과도 비슷했습니다.

매일 아침 집합해 운동장을 열 바퀴씩 뛰었습니다. 조회가 끝나면 알파벳을 배우고, 고무풍선에 비누칠을 해 면도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꽁보리밥에 짠 무'로 버틴 1년…계속되는 탈출 시도

가장 힘든 건 배고픔이었습니다.

밥이라곤 파리가 날리는 보리밥에 짠 무가 전부였습니다. 경희 씨는 일주일을 굶고서야 시커먼 보리밥에 손이 갔다고 했습니다.

면회를 온 부모들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습니다. 원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소금과 고춧가루, 깨소금이 담긴 봉지에 보리밥을 비벼 먹곤 했습니다.


시설 보안은 철통같았습니다. 창문마다 쇠창살이 달렸고, 일과 시간이 끝나면 모든 문이 밖에서 잠겼습니다. 밤에는 화장실도 갈 수 없어 방에 놓인 통에다 볼일을 봐야 했습니다.

경비는 큰 개를 데리고 다니면서 '도망치면 죽는다'거나 '개가 물어 죽인다고'고 협박했습니다.

1995년 8월 21일 경기여자기술학원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KBS 자료화면)

1995년, 시설 생활에 불만을 가진 원생이 경기여자기술학원에 불을 질렀습니다. 잠긴 문을 열지 못한 원생 37명이 숨졌습니다.

돌멩이로 유리창을 깨고, 원생복 바지로 끈을 만들어 담을 넘는 등 탈출 시도는 계속됐지만, 도망친 원생들은 결국 며칠 만에 붙잡혀 돌아왔습니다.

도망친 원생을 신고한 주민에게는 포상으로 밀가루 한 포대가 주어졌습니다.


한번 들어오면 중도 퇴소는 불가능했습니다.

진실화해위가 조사한 각 시설의 내규를 종합하면 ①단속기관장의 오인 단속일 때 ②의사의 진단 결과 처녀일 때 ③법률혼이 확인될 때 등 극히 예외적인 사유로만 중도 퇴소가 가능했습니다.

고달픈 감금 생활에 많은 원생들이 시설이 소개해 주는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남자랑 싸웠다고 단속…'성매매할 우려' 있으면 수용


강제 수용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적게는 3천 8백여 명에서, 많게는 1만 3천여 명의 여성이 '매년' 갇혔습니다.

그 배경에는 지금은 사라진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있습니다.

정부는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윤락행위등방지법을 제정하고 성매매를 '윤락행위'로, 윤락행위를 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여자를 '요보호여자'로 정의했습니다.

요보호자들을 선도 보호한다는 목표 아래, '양성원', '기술원', '기술학원' 등의 이름으로 전국에 30여 개의 직업보도시설이 설치됐습니다.

경찰과 보건소는 자체적으로, 혹은 지자체 등의 협조 요청에 따라 요보호여자를 단속해 시설에 신병을 넘겼습니다.


윤락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여자라는 자의적인 기준 탓에, 자살 시도를 했다(박○○, 1981년 의정부부녀복지원)
미군과 결혼 준비를 했다(김○○, 1979년 양주여자기술학원), 길에서 남성들과 말다툼을 했다(신○○, 1985년경 의정부부녀복지원)는 이유로 단속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윤락행위등방지법에 경찰과 보건소가 이들을 체포해 구금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요보호여자는 경찰관직무집행법상 경찰이 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는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법원, 국가 배상 책임 첫 인정…"책임 주체는 대한민국"

김은지 씨(가명)가 그린 평택여자기술양성원 평면도(촬영기자 안민식)

사건은 지난해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으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2기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월, 이 사건을 "감금 상태에서 폭력에 방치되고, 의식주, 의료적 처우 등 기본적 생활을 지원받지 못한 가운데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받은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는 이 사건 진실규명 대상자에게 사과하고, 이들에 대한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결정을 근거로 피해자 12명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습니다.

진실화해위는 사과를 권고했지만, 피고 대한민국은 변론 과정에서 책임이 없단 주장을 폈습니다.

대한민국 측을 대리하는 정부법무공단은 ①시설 설치·운영 주체인 각 지자체에 책임이 있고 ②본인 진술은 객관적 증거로 보기 어려우며 ③소멸 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재판장 김지혜)는 지난 15일 이 사건 손해배상 소송 선고기일을 열고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습니다.

인용된 금액은 총 8억 8천여만 원으로, 1심 판결이 확정된다면 피해자들은 수용 기간 등에 따라 각각 4백만 원에서 2억 4천만 원을 받게 됩니다.


재판부는 이 사건 책임 주체가 '국가'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 요보호여자의 단속의 주체는 피고(대한민국)"라며 " 여성수용시설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를 피고가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봤습니다.

'어떤 공무원이 어떤 피해자에게 위법 행위를 했는지 특정돼야 한다'는 정부법무공단 주장도 배척했습니다.

재판부는 "다수 공무원들의 행위가 전체적으로 모여 이루어졌으므로 그 적용, 집행 과정에서 개별 공무원의 위법한 직무집행을 구체적으로 특정하거나 개별 공무원의 고의, 과실을 증명 또는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 광범위한 다수 공무원이 관여한 일련의 국가 작용에 의한 기본권 침해에 대해서 국가배상 책임의 성립이 문제 되는 경우에는 전체적으로 보아 객관적 주의의무 위반이 인정되면 충분하다"고 봤습니다.

피해자 본인 진술은 객관적 증거로 보기 어렵단 주장에 대해선 "그 진술들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피해 진술 외에 수용 여부를 증명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경우에도 수용 경위나 퇴소 내지 탈출 경위에 대한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거나 각 진술을 뒷받침할 만한 물증 및 제3자의 진술이 존재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경희 씨는 취재진에게 "돈이 얼마나 나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억울한 인생을 살았으니, 거기에 대한 사과를 좀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전했습니다.

강제수용된 지 꼭 50년 만에 법원으로부터 피해를 인정받은 경희 씨는 아직도 국가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관 기사] [단독] “윤락 우려 있다” 강제 수용…국가 배상 책임 첫 인정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255017

그래픽: 이영현 조은수
자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서울동부여자기술원 등 여성 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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