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한국 사회, 공간 수축 심화되면서 갈등 격화
‘공간 인간’ 쓴 유현준, 공간 혁신이 곧 사회 혁신
조선은 영토 확장, 상업 밀도 막혀 자국민 노예화
스티브 잡스, 머스크, 트럼프는 압도적인 공간 인간
북극해 열리면 울릉도 제 2의 시칠리아로 키워야
알고리즘 분열 대안은 자연, 자연이 인간 잇는 본드

인문 건축가 유현준. 모닥불부터 스마트시티까지, 시대를 열어간 건축의 빅히스토리 다룬 책 ‘공간 인간’을 썼다./사진=김흥구

갈등 중심으로 보면 세계사는 온통 전쟁사다. 그러나 공간의 눈으로 보면 성취와 진화의 과정으로 읽힌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몸담은 건축을 진화시켰다. 모닥불에서 동굴로, 마천루에서 온라인 플랫폼으로. 각 시대의 상징적 건축물은 생존을 위한 공진화의 시스템으로 읽힌다.

드물게 빅히스토리를 다루는 야심만만한 건축 인문학자 유현준이 마침내 우리를 ‘공간 인간’으로 명명했다. 그가 설계한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 역사를 탐험할 때마다 그 시의적절한 스토리텔링에 놀라게 된다. 일찍이 역사학자였던 재러드 다이아몬드, 유발 하라리가 읽어낸 사피엔스의 충동과 욕망, 문명의 자취를 그는 공간과 인간의 퍼즐로 설명해 낸다.

예컨대 각 시대에 맞춰 진화해 온 건축물의 목적은 오직 ‘이기적인 인간’을 다음 세대에도 이어서 살리기 위한 진화의 몸부림이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건축 숙주’는 아파트다. 아파트라는 숙주는 엄청난 효율성으로 과도하게 번식했고, 한국인들은 그 안에서 초고속 인터넷망을 깔고 넷플릭스를 보며 산다.

유현준이 쓴 ‘공간 인간’을 읽다 보면 에덴 이후 첫 도시부터 나일강의 수로, 현대의 스마트 시티까지, 크고 작은 건축의 의미가 한눈에 잡힌다.

농경 사회 이후의 문명은 좋은 입지와 영토 확장, 공간 압축과 밀도의 역사였다.

배, 비행기, 스마트폰으로 공간을 융합해 온 기술의 역사, 신대륙, 우주, 인터넷으로 없던 공간을 발견해 온 확장의 역사, 배산임수와 접촉의 밀도로 유리한 생존을 만든 입지의 역사까지… 종횡무진 시공을 누비는 ‘공간 인간’ 유현준을 만났다.

-모든 세대가 좋은 ‘공간 경험’에 목말라 있습니다. 건축가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어요.

“맞아요. 좋은 공간이 많은 사회는 더 융합되고 더 화합할 수 있어요. 제가 ‘공간 인간’의 서문에도 썼듯이, 계단처럼 진화하는 역사 속에서 인류는 그 계단의 턱마다 상징적인 건축물을 지어왔어요. 가령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도 노예 학대와 독재자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집트 제국이 피라미드를 지을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평화가 유지되고 먹고살 만한 일자리가 창출된 면도 있어요.”

가장 안정적인 재료인 돌을 사용해 엄청난 토목공사로 만들어진 이집트 피라미드. 나일강 상류의 채석장에서 돌을 떼어다 하구에 있는 도시에 건축했다. 피라미드는 파라오 정부의 경제력과 통치력, 나일강 전체의 물류 시스템을 상징한다.

역사를 전쟁사, 정복사로만 볼 게 아니라, 인류가 함께 마음을 모아 이뤄낸 ‘공간의 역사’로 바라보고 싶었다고 했다. 공간으로 본 빅 히스토리 ‘공간 인간’은 에덴과 바벨탑, 피라미드와 모세의 성막, 솔로몬의 성전에 관한 치밀한 추리가 펼쳐진다.

특별히 바벨탑은 벽돌과 역청으로 지어진 바빌론의 탑이었을 거라고 그는 추정한다. 그 정도 규모의 건축을 위해 여러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언어 혼돈이 있었을 거라는 짐작과 함께.

-무엇보다 성경을 건축사로 훑는 시선이 신선했습니다.

“네. 저는 바벨탑이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존했던 건축물이라고 본 거죠. 솔로몬이 성전을 먼저 짓고 궁전을 짓는 이야기도 성경의 열왕기에 나옵니다. 사회 진화의 표본 모델을 도시와 건축물로 볼 때, 구약 성경의 많은 이야기를 고증해 볼 수 있어요. 그렇게 성경적 사실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할 때 종교의 진짜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고 저는 보는 거죠.”

자신의 공간지각적 사고는 성경을 읽는 데서 시작됐다고 했다. “성경에는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비유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 시대의 공간을 찾아서 스토리의 구조를 캐치하고 연상을 해나갑니다.”

-모닥불이 건축의 빅뱅이었다는 상상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글을 쓸 때 저는 텍스트보다 장면을 먼저 떠올립니다. 어떤 장면을 상상하면 거기에 항상 사람들이 있죠. 그러면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행동과 마음을 시뮬레이션해 봅니다. 모닥불 앞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죠. 앞은 따뜻하고 뒤는 어둡고 사람 얼굴은 불빛에 드러나고, 다 같이 한 방향을 바라봐요. 그게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하나의 불을 똑같이 쳐다보는 건 온 가족이 TV를 보는 것과 같아요. 그렇게 함께 무언가를 보고 있으면 공동체 의식이 생겨요.”

무형이든 유형이든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이 건축이라고 했다.

-벽이나 지붕 없이도요?

“건축을 쌓고 세우는 걸로 보면 괴베클리 테페가 시작이지요. 그런데 건축을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으로 보면 벽이나 지붕 없이도 가능해요. 모닥불을 중심으로 안과 밖의 구획이 생겼고, 모닥불 덕에 벽과 천장이 있는 동굴이라는 실내 공간을 사용했고,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의 독특한 관계가 디자인됐어요.”

인류는 건축 공간의 혁명으로 집단의 규모를 키워왔다. 최초의 건축은 모닥불이었다.

40만 년 전, 달을 올려다보는 대신 무리 가운데 모닥불을 쳐다보면서부터 인간은 다른 동식물과 다른 곳을 보는 존재가 되었다고 했다. 모닥불이 직장의 회식문화, TV와 스마트폰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모든 설계의 시작은 디자인인가요? 이야기인가요?

“이야기가 디자인이 되는 것 같아요. 모양만 예쁜 건축은 저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오랫동안 설계를 해왔는데, 건물 안을 뻥 뚫리게 하든 육각형으로 하던 건축주에게 이 디자인이 나오기까지 이유를 설명해야 했어요. 항상 그럴듯한 합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훈련이 돼 있어요.”

-요즘엔 무엇을 설계하지요?

“JYP 사옥, S기업 연수원 그리고 납골당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세 공간의 공통점이 있습니까?

“자연 그리고 창의적 융합이에요. JYP 사옥과 S기업 연수원은 둘 다 중정이 있고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도록 건물마다 발코니를 넣었어요. 방 구조도 여러 사이즈로 용도에 맞게 콤비네이션되어 있고, 아래층의 돌출부가 위층의 테라스가 돼요. 창의성은 자연을 가까이할 때, 다양한 사람과 시선이 섞일 때 올라갑니다. 납골당 디자인도 자연을 산책하면서 망자와 자연스럽게 섞이도록 했어요.”

-자연이라는 요소가 중요한가요?

“가장 중요합니다. 건축에서 자연은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해요.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본드죠. SNS 시대는 정보 과부하와 알고리즘으로 관계가 파편화되어 있어요. 그렇게 깨어진 관계들도 햇빛, 바람, 나무, 흙 앞에서는 저항 없이 하나가 됩니다.

도심 건물의 건폐율이 60%면 남은 40%는 햇빛, 바람, 나무, 흙이 들어올 수 있는 사이 공간이 되어야 해요. 그 사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지구와 인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어요.”

건축과 공간을 구심점으로 인류사의 퍼즐을 맞춘 유현준의 ‘공간 인간’.

-‘공간 인간’이라는 선언이 좋았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막을 수 없지만, 공간은 인간이 컨트롤해 왔어요. ‘시간 속의 인간’은 속절없지만 ‘공간 인간’은 확실히 뭐라도 이룬 것 같아요.

“제목은 ‘공간 인간’이지만 결국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긴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고, 앞으로도 긴 시간이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거죠.”

-긴 시간이 남아 있을까요?

“저는 사라지겠지만 80억 인구가 다 남아있지 못해도 1억 명이라도 이 지구에 남아 있지 않을까요? 일부는 생존할 것이고 다음 단계로 진화하겠지요. 살아남은 자들이 5천 년 간의 인류 문명의 에센스를 다음 단계로 잘 전승했으면 좋겠어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걱정합니까?

“양적으로 이 많은 인간이 환경을 유지하면서 살기는 힘들겠죠. 걱정되는 건 로봇입니다. 인간은 동식물을 먹으면서 생체 에너지를 얻어요. 원시 생명체일 때부터 같은 진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죠. 환경이 많이 파괴되긴 했지만 우리는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생명을 잇고 에너지를 쓰죠.

그러다 자동차라는 기계가 나오면서 자연이 크게 훼손됐어요. 기계는 화석에너지만 필요하지, 자연은 필요 없어요. 로봇도 마찬가지예요. 로봇은 자연이 필요 없어요. 전기만 필요하죠. 로봇이 늘어날수록 자연은 파괴됩니다. 80억 인구와 10억의 로봇이 존재한다면, 이런 생태계는 자연환경에는 재앙이에요. 자연 생태계가 축소될수록 우리가 느끼는 상실감과 문제는 더 크게 다가올 겁니다.”

-그 상실감을 메우기 위해 다들 디지털 고치로 피신하겠지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본 것처럼.

“그 디지털 솔루션을 운영하기 위해서 또 엄청난 서버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전기와 알고리즘으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공간은 어느 후미진 곳까지 밀려날까.

일론 머스크의 우주 개발 기업 스페이스X의 지구 저궤도 위성통신 서비스 스타링크.

-SF 영화를 보면 민간인들은 대부분 에너지를 캐는 식민지 행성의 광부로 전락하고, 일찌감치 행성을 이윤화한 기업가들이 빌런이 돼서 인류를 통제하더군요.

“일론 머스크가 인류의 공간에 영향력을 미친 대표적인 사업가 중 한 사람이죠. 그에 앞서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가상 공간으로 진입하도록 만들었어요. 사람 간의 커넥션이 증폭되면서 공간의 의미가 크게 달라졌죠. 이제 사람들은 내 방은 없어도 인스타그램에서 디지털 벽돌로 내 공간을 장식해요.

아시다시피 인류의 역사는 공간 확장의 역사예요. 인류는 계속 이주하면서 땅끝까지 흩어져 살았어요.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제도로… 평면에서 흩어져 살다가 도시를 만들어요. 밀도가 높아지니 2층짜리 집을 짓고 더 발전해서 8층짜리 건물을 지어요. 20세기 들어서 공간이 부족하니 철근 콘크리트를 이용해서 30층짜리 집을 짓고 공간을 뻥튀기했어요. 어느 시점에 물리적 공간 확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인터넷 가상 공간이 나왔지요.

“그 전에 우주 공간으로 확장하려고 했죠. 에너지 소비가 너무 많아서 포기했던 거예요. 일론 머스크는 스페이스 엑스를 만들면서 우주 공간으로 가는 비용을 확 떨어뜨렸어요. 거기다 스타링크라는 인공위성 인터넷 웹을 깔아버렸죠. 스티브 잡스는 물론 어떤 기업가든 이제까지 정부가 깔아준 광케이블로 비즈니스를 했는데, 스타링크는 정부 인프라에서 독립한 자금이에요.

일반 사기업이 인프라를 깔고 그걸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힘을 갖게 됐어요. 그 일의 의미가 바로 공간을 얼마나 압축시키는가였어요.”

-위험한 공간 정복자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21세기의 알렉산더라고 할 수 있죠.”

모세의 성막, 그리스의 반원형 극장, 파리의 하수도, 엘리베이터, 기계 융합 생태계까지, 박물관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책 ‘공간 인간’을 쓴 유현준./사진=김흥구

-미래주의자로 보이지만, 그 뿌리는 머스크의 외조부가 100년 전에 북미에서 주도하다 실패했던 소수 엘리트의 지술지배사회(테크노크라시) 모델에 있습니다. 어쨌든 사기업이 천공을 소유하고 전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아이러니해요.

“위험하죠. 지금은 트럼프 밑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고 보세요. 정치인은 4년 뒤에 나가지만 기업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구 표면적은 제한적인데 민족 국가 나오면서 땅따먹기는 다 끝났어요. 하나의 국가 수장은 이미 바운더리가 정해져 있고, 전쟁을 하지 않으면 공간 확장은 제한적입니다. 함부로 국경을 넘을 수 없죠. 기업은 달라요. 다국적 기업이잖아요.

다국적 기업의 수장이 정치 지도자보다 권력의 수명이 깁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나마 세게 가진 권력이 군대와 핵무기예요. 그런데 군대도 옵티머스 로봇 생산하면 끝이에요. 드론 10만 대 만들면 항공 모함도 힘을 못 써요. 전쟁조차 기업이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에너지 공급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 전쟁을 이야기할 때 핵심은 발전소 공격이라고 해요. 로봇 병사, 탱크, 드론 다 전기로 움직이니까.”

-패권주의자 트럼프는 어떤 류의 공간 인간인가요?

“트럼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달러 유통 공간이죠. 그런데 중국이 미국 국채를 구매하지 않고 중동 석유도 위안화 결제를 시도하면서 달러 유통 공간을 잠식하고 있어요. 달러 공간이 줄어들수록 트럼프는 가상 화폐 쪽으로 스테이블 코인을 만들어서, 미국 국채를 사줄 수 있는 코인 회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어요.

트럼프에게 중요한 또 하나의 관심사는 북극해예요. 기후 온난화로 얼어있던 북극해가 열리면, 그곳은 21세기 지중해가 될 겁니다. 앞으로 무역은 북극해를 중심으로 일어나겠지요. 그런데 미국은 북극해 쪽으로 해안선이 정말 짧아요. 알래스카가 있지만 알래스카만으론 부족해요. 그래서 캐나다와 그린란드에 눈독을 들이는 거죠.

그린란드를 미국이 가져가야 그나마 러시아와 캐나다와 견줄만한 해안선 길이가 생겨요. 따져보면 미국이 지금 같은 패권을 가지게 된 것도 대서양과 태평양에 접한 해안선이 전 세계에서 가장 길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북극 해안가가 녹으면 러시아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시베리아도 녹으면 머지않아 21세기 싱가포르는 동남아에 없을 거예요.”

북극해 패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이미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엔 어떤 영향이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입장에선 제일 중요한 지역이 울릉도예요. 사실 서해안 그러니까 황해는 이제껏 한 번도 지중해 같은 내해로 작동하지 못했어요. 북아프리카와 유럽 대륙 사이의 지중해처럼만 됐어도 엄청난 상거래와 르네상스가 일어났겠지만,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서 무역으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앞으로 북극해가 열릴 때 대한민국의 미래도 다시 그려봐야 해요. 그렇게 되면 무역선이 동남아시아를 거쳐 가는 게 아니라 북극해로 북아프리카와 북미, 유럽까지 갈 수 있어요. 지중해에서 제일 큰 섬이 시칠리아인데, 과거 로마 제국이 시칠리아섬을 거점으로 지중해를 장악했거든요. 동해에서 제일 큰 섬은 울릉도니까 우리가 동해를 제2의 지중해처럼 개발해도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현재 한국은 그런 상상에 에너지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사회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도 갈등 현상도 공간에 뿌리가 있을까요?

“고도 갈등도 근본은 공간 확장이 막혀서예요. 사회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공간 확장이 일어나야 해요. 일례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통일 신라입니다. 불국사 석굴암이 전통 건축 중에 가장 훌륭해요. 왜 그런가 들여다보면 한국 역사에서 정복 사업을 통해 공간이 확 팽창된 사례는 신라밖에 없습니다.

농업 경제 시대에서 GDP가 급성장하려면 땅과 노예밖에 없어요. 전쟁으로 영토 확장하고 노예 노동력을 흡수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구려도 조선도 영토 확장이 없었어요. 그 얘기는 인구는 늘어나는데 GDP 성장은 없다는 거죠. 파이가 줄면 상업을 해서 부가가치를 늘려야 하는데, 우리는 상업을 멸시했어요.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건 도시를 만들지 못해서죠.”

-정치의 문제인가요? 기술의 문제인가요?

“우리는 온돌방이라 단층집밖에는 못 지었어요 인구 밀도를 높일 수 없으면 고밀화된 도시를 가질 수 없어요. 밀도가 낮으니 매일 장이 서지 않고 5일마다 장이 섰죠. 국밥을 팔려고 해도 나흘을 기다려야 하니, 상업이 발달할 수가 없습니다. 장사를 못하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지어 돈 버는 사람은 땅문서 물려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부의 세습이 굳어진 사회죠.

평화를 사랑해서 남의 나라 침략을 안 했다고 포장하지만, 남의 나라 국민을 노예로 안 만들었기 때문에 자국민을 노예로 만드는 현상이 생긴 겁니다. 18세기 조선은 노예가 30~40%예요. 아무리 포장해도 자국민을 노예로 둔 비정상 국가였어요.

국토는 좁지만 빠르게 도입한 초고속 인터넷망 덕분에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더 큰 가상공간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건축가 유현준./사진=김흥구

반면 일본은 지진이 잦아서 온돌을 못 썼어요. 교토에 가도 몇백 년 전에 지은 2층짜리 집이 있어요. 그건 장사해서 돈을 벌 수 있었다는 거죠. 밀가루 사고 소금 사서 우동 만들면 땅문서 없이도 기술 소프트웨어로 돈을 벌어요. 그러니까 200년 넘는 우동집이 있는 거죠. 조선은 공간의 밀도를 높여서 도시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망한 겁니다. 일본은 도시를 만들어서 대량 생산과 유통이 가능했어요. 그림만 봐도 신윤복은 손으로 그렸지만, 우키요에는 판화로 찍었어요.”

-밀도 높은 도시 공간에서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만들어지는군요.

“그렇습니다. 보일러가 나와 2층 양옥집이 생기고 엘리베이터로 12층짜리 아파트가 만들어지면서 상가가 생겨요. 슈퍼마켓이 생기고 자영업자가 나오면서 중산층이 만들어지죠. 땅문서 없는 이북 사람 정주영도 돈을 버는 사회가 되는 겁니다. 땅 없는 피난민도 돈 벌 수 있는 사회, 그러니까 고밀화 혁명으로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한번 작동했어요.

도시 개발하고 고층 건물 짓고, 그렇게 공간 혁명으로 이룬 경제 부흥이 한계점에 이른 시기가 90년대였어요. 그 시점에 인터넷 가상 공간이 열리면서 네이버 카카오 같은 신흥 부호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인터넷 공간 혁명 이후, 한국에는 더 이상의 공간 확장이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 트럼프 관세 정책으로 무역 공간이 축소되고 스테이블 코인이 쓰이면, 한국은행에서 만드는 원화의 사용 공간도 줄어들겠죠.”

공간이 수축할수록 갈등은 더 심해질 거라고 했다.

문제의 핵심을 공간으로 꿰뚫어 보는 유현준 식 사고는 색다른 가능성들의 향연이다. 북한과의 경제 교류가 물리적인 공간을 확장하는 효과를 줄 것이라든가, AI로 실직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5천만 인구가 각자 아바타를 만들어 1억 인구로 뻥튀기하면 경제 생산 인구가 확장될 거라는 이야기들.

-그러나 인터넷 신대륙의 이민자인 AI가 무서운 효율성으로 생산물을 쏟아낼수록, 그것을 소비해 줄 사람도 시간도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어쨌든 역사적으로 신대륙이 약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어왔다는 데는 동의해요.

“그건 중요한 포인트예요. 산업혁명에서 소외됐던 아일랜드, 이탈리아인들이 증기선 타고 대서양을 일주일 만에 건너가서 아메리카대륙에서 기회를 얻었잖아요. 동부에서 기회를 못 잡은 사람들은 서부까지 뚫린 철길을 타고 와서 금광을 개발하고,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를 만들었어요. 공간이 확장되면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그곳으로 갑니다.

증기선이든 고층 건물이든 인터넷 가상 공간이든, 신기술로 신대륙이 만들어지면, 기회를 못 가졌던 눈 밝은 약자들이 이동해요. 온라인 공간 열렸을 때도 ‘올드머니’는 안 갔어요. 청년들이 가서 인터넷 벤처 기업 세웠죠.

그런데 부의 이동 사다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한정된 재화를 ‘나누어 쓰자’는 포퓰리스트들이 인기를 얻어요. 그래서 공간 확장의 비전을 가진 정치가가 없으면 그 사회는 미래가 없어요. 기술 혁명 공간 혁명에 실패해서 산업 구조를 못 바꾼 남미를 보세요. 포퓰리스트 정치가들 때문에 다 망가졌잖아요.”

인구는 적지만 대서양과 태평양을 누비며 최초로 주식회사를 만들었던 네덜란드처럼, 더 많은 청년이 해외에서 공간 확장의 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밀도가 높을수록 창의성과 생산성이 커진다.

-지난 100년간 세계의 수도 역할은 뉴욕이 담당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인종이 섞여서 창의성과 생산성이 끓어 넘쳤지요. 뉴욕과 비교하면 서울은 어떻습니까?

“일단 아시아의 수도 역할은 도쿄가 해왔습니다. 도시의 사이즈로 그 사회의 문명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데요. 뉴욕 인구가 1,600만 명이고 도쿄는 2천만 명이에요. 2천만 명이 무리 없이 모여 살 수 있도록 치안, 교통, 교육의 인프라를 갖췄다는 면에서 도쿄는 고도로 발달한 시스템과 문명을 갖췄어요.

실제로 한 시대를 이끌었던 제국은 당대 제일의 대도시를 유지하며 세련된 통치 시스템을 자랑했어요. 다른 게 있다면 그건 인구 구성이에요. 서울은 뉴욕에 비해 인종 다양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똑같은 천만 명이라도 뉴욕은 흑인, 백인, 황인, 러시아 사람 등등 온갖 인종이 모여있지만, 서울은 거의 단일 인종이죠. 온갖 나라 사람들이 모인 천만과 단일한 천만 명은 자극과 경험의 밀도가 확연히 달라요.”

-자극의 밀도가 확실히 다르겠죠. 한국의 다른 지방 도시들은 어떤가요?

“제대로 대응을 못 하고 있어요. 부산이 가장 심각합니다. 부산은 과거에 비하면 순식간에 밀도도 활력도 확 떨어졌어요. 살아남으려면 과거의 영광을 지우고 제2의 싱가포르가 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입지적으로 부산은 홍콩 같은 잠재력을 가졌어요. 사실 홍콩이 중국 반환됐을 때부터 부산은 금융시스템이나 다국적 기업을 유치해야 했어요. 두바이도 싱가포르도 외국인 부자들을 유치하는 데 부산이라고 왜 안 되겠어요.

가령 부산에 지천으로 깔린 창고들을 미술품 창고로 사용해서 아트 바젤 같은 아트페어 도시로 키울 수도 있어요. 예술품 면세 활용해서 예술 도시 금융 도시로 키울 생각을 해야죠. 바젤은 인구가 15만 명 정도로 적은데도 도심에 에르메스 샤넬 매장이 있어요. 마켓 스페이스가 전 세계면 그 정도 소비 규모가 나와요.”

인구가 적은 게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 도시에서 나오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전 세계에 팔 생각을 하면 자연스레 공간이 확장되는 거죠. 일본의 어떤 마을은 예쁜 단풍을 제품화해서 소득 수준을 높였고, 마을 전체를 호텔로 만들어서 관광객을 모으기도 해요.”

자율주행 버스가 시범 운행 중인 중국 선전.

-이즈음에서 스마트 시티 얘기를 해보지요. 탈부착 되는 자동차 건물도 실현 가능할까요?

“그럼요. 자율주행이 되면 자동차는 이동 수단이 아니라 머무는 공간이 됩니다. 주차장 따로 건물 따로 두지 말고, 건물에 기계식으로 쌓아서 도킹하면 방으로 쓸 수 있어요. 자율주행이 상용화되면 도시의 13% 공간인 도로도 ‘이동형 사무실’로 쓸 수 있어요. 그걸 제일 먼저 적용하는 도시가 경쟁력을 갖겠죠.”

-현재 자율주행은 기술보다 제도와 법의 영역인데요.

“그래서 중국이 유리해요. 중국은 독재국가니까 그냥 밀어붙이잖아요. 선전 같은 도시는 택시에 기사가 운전대를 잡지 않고 앉아만 있어요. 중국이 14억 인구라는 빅데이터를 활용해서 자율 주행 시범 도시, 로봇 기술 분야까지 약진하면 민주주의 국가도 어쩔 수 없이 중국을 따라가지 않을까 싶어요.”

-중국과 미국의 공간 전쟁은 어떻게 될까요?

“핵심은 미국의 카드보다 중국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빈부 격차와 사회 갈등으로 여러 국가로 쪼개지느냐, IT 기술로 더 완벽한 통제 국가로 가버리거나… 중국은 기로에 서 있어요. 과거에 중국은 고립된 국가였지만, 지금은 트럼프 때문에 오히려 중국과 EU 중심으로 자유무역 체계를 재편하자는 말까지 나와요.

여기에 맞서, 달러 공간을 지키려는 미국의 히든카드는 스테이블 코인이에요. 그걸로 중국 부자들의 돈을 빼 오는 거죠. 중국이 경제 강국이 되더라도 부자들은 시진핑 독재 공간에서 사는 건 불안할 테니. 결국 경제 무역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 중 뭐가 중요하냐의 싸움이겠죠.”

-에덴동산부터 AI 스마트 시티까지, 건축으로 인간 역사를 두루 탐사하셨습니다. 진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단언컨대 접촉의 밀도죠. 저는 그걸 시냅스라고 표현합니다. 인류와 도시는 시냅스의 총량을 늘리는 쪽으로 계속 진화해 왔어요.”

-코로나 시절에 인터뷰했을 때도 시냅스의 총량을 늘리기 위해 택배 터널과 테라스, 소셜 믹스를 강조했었지요.

“네. 제가 건축가로서 갖고 있는 카드가 그 세 가지입니다. 택배 터널, 테라스, 소셜 믹스. 택배 터널은 정치가들을 만날 때마다 얘기하는데 아직이에요. 부산 같은 해안 도시는 라인 하나만 깔면 택배 터널로 10분 내 로봇 배송도 될 거예요. 이런 식의 신기술을 활용한 특정 라이프스타일이 외국인들을 유인할 수 있어요.”

사방에 눈이 달린 유니콘처럼, 시선의 반경이 넓은 건축가와 나누는 대화는 한계가 없었다.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서울과 평양, 만주를 연결하는 초고속 열차는 강력한 클러스터를 만들어낼 거라고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만의 공간 자산을 만들라고 조언하는 유현준./사진=김흥구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어디인가요?

“서울이죠. 산지가 많아 지형적으로 다이나믹하고, 변화가 많아서 늘 역동적이에요. 넓이도 넓어서 제가 아직 못 가본 곳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 이 도시의 변천사를 다 봤어요. 강북에서 태어나 강남으로 와서 도시가 만들어지는 걸 목격했달까요.

어린 시절엔 구의동에서 자랐어요. 어린이회관을 놀이터 삼아 놀면서 과학의 영향을 받았고, 청년기엔 오렌지족과 클럽, 카페 문화의 변화도 지켜봤습니다. 골목의 2층짜리 양옥집이 철마다 옷가게로 술집으로 바뀌는 풍경을 다 봤지요. 런던, 뉴욕, 로마, 파리가 아무리 좋다 해도 그 변천사를 함께 해온 정서를 무시할 수 있겠어요? 추억을 나눈 사람과 가장 좋은 친구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현명한 ‘공간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삶의 공간을 설계할까요?

“일단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관찰하고 자기만의 공간의 라이브러리를 만드세요. 선조들은 누적된 데이터로 그걸 풍수지리로 정리했어요. 겨울에 덜 춥고 여름에 장마를 피할 수 있고 등등. 어렵지 않아요. 각자 자기한테 맞는 공간이 따로 있어요. 누군가는 탁 트인 전망에 반하고, 누군가는 벽이 쳐진 아늑한 공간에 빠져들죠. 결국은 자기 관찰이 먼저예요.

‘내가 어떤 곳에서 편안했나? 행복했나?’ 질문해 보면 나만의 공간 MBTI가 나와요.

그런 공간을 사유하진 못해도 누릴 수 있는 도시가 우리에겐 있어요. 나만의 공간 열 군데를 정하면, 그게 바로 내 공간의 별자리예요.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한남대교 밑, 사랑하는 이와 즐기고 싶을 땐 도산공원 카페 등등. 건축가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펜트하우스에서 인스타그램만 보는 부자보다 자기만의 공간 레시피가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누렸어요.”

조선비즈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52136 “7년 함께한 나의 파트너” 마약 탐지견 퇴역하던 날 [개st하우스] 랭크뉴스 2025.05.24
52135 술 취해 90대 노모에 “빨리 죽어라” 폭행한 60대 패륜아들 랭크뉴스 2025.05.24
52134 외교부, 중국 서해 ‘항행금지구역’ 설정에 “우려 전달” 랭크뉴스 2025.05.24
52133 이재명 46.6%·김문수 37.6%·이준석 10.4% [리얼미터] 랭크뉴스 2025.05.24
52132 “술 주정하냐” 핀잔준 90대 母에 “빨리 죽으라”며 때린 아들 랭크뉴스 2025.05.24
52131 이재명 46.6%·김문수 37.6%·이준석 10.4%[리얼미터] 랭크뉴스 2025.05.24
52130 트럼프, 아이폰 25% 관세에 “삼성 등 해외생산 다른기업도 해당” 랭크뉴스 2025.05.24
52129 "아이브 온대" 30만원대 암표도 떴다, 대학축제 웃픈 자화상 랭크뉴스 2025.05.24
52128 “생각 매우 올드” “기본 안된 사람”… 더 거칠어진 네거티브 랭크뉴스 2025.05.24
52127 윤석열 '王' 풍자? 이번엔 권영국, TV토론회에서 손바닥에 '民' 랭크뉴스 2025.05.24
52126 [단독] ‘건진 사넬백’ 구입 통일교 전 간부·처제, 동업하던 재단 철수 랭크뉴스 2025.05.24
52125 트럼프 "애플·삼성 25%‥EU는 50% 부과" 랭크뉴스 2025.05.24
52124 미국 법원, ‘하버드대 외국학생 등록 차단’ 하루만에 효력중단 결정 랭크뉴스 2025.05.24
52123 '직접 언급' 자제했지만‥못 버린 '단일화' 랭크뉴스 2025.05.24
52122 [비즈톡톡] 쏘카, 포르셰 카쉐어링 ‘아반떼N’ 때와는 다를까 랭크뉴스 2025.05.24
52121 보수 인사 광폭 영입하는 민주당, 이러다 보수 재편? 랭크뉴스 2025.05.24
52120 주민감시원 사라진 왕피천 보호지역 1년‥"이대로는 못 지킨다" 랭크뉴스 2025.05.24
52119 레이건도 퇴임 후 치매 판정…바이든 전립선암 고백 미스터리 랭크뉴스 2025.05.24
52118 가상 아이 돌보느라 아이 굶겨 죽인 부부... '리액션 영상'의 경고 랭크뉴스 2025.05.24
52117 서울 아파트값 또 오를라…‘토지거래허가구역’ 추가 지정 검토[Pick코노미] 랭크뉴스 2025.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