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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얘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치즈 덩어리는 대체로 동그랗죠. 하지만, 치즈를 동그란 덩어리째 먹지는 않죠. 조각 내 먹는 게 일반적입니다.

회사를 치즈 덩어리라고 생각해 볼까요. 그러면 회사의 각 사업부는 치즈 조각쯤 될 겁니다.

이 회사를 팔려고 합니다. 치즈를 덩어리째 팔 듯이 회사를 통째로 매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치즈의 각 조각(사업부)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다면(사업성이 있다면) 잘라서 팔 수도 있겠죠.

실제로 적잖은 회사가 이런 식으로 잘라서 팝니다. 조각내서(carve-out, 카브 아웃) 판다고 해서 '카브 아웃 딜'(carve-out deal)이라고 부릅니다.

■ 공정 하나 '톡' 떼서 판 SK

SK그룹은 종속회사(50% 넘는 의결권을 보유한 경우)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거의 700개에 이릅니다. 그중 하나가 'SK엔펄스'입니다.

반도체 집적회로(IC)를 만들려면, 동그란 웨이퍼 위에 여러 층의 회로를 빽빽하게 쌓습니다. 그래서 집적회로라고 부릅니다.

층층이 잘 쌓으려면, 각 층의 표면이 평평해야겠죠.

회로의 울퉁불퉁한 면을 평평하게 갈아내는 작업을 CMP 공정(Chemical Mechanical Polishing)이라고 하는데, SK엔펄스는 그 공정을 잘합니다.

SK(주)도 사업보고서에서 SK엔펄스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2024년 SK 사업보고서 중

SK는 지난해 말 SK엔펄스의 CMP 패드 사업부를 3,600억 원에 팝니다. 사모펀드 '한앤컴퍼니'가 샀습니다.

SK는 재무 건전성을 개선하고, 신사업 투자를 위해 팔았다고 밝혔습니다. 쉽게 말해, 회사 한 조각을 팔고, 그 돈으로 다른 사업 더 잘해보겠단 얘기입니다.

전형적인 '카브 아웃 딜'이었습니다.

비슷한 의미의 '컷아웃'(cut-out)이란 단어와 비교해, 카브 아웃에는 정교하게 도려낸다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카브 아웃 딜은 그래서, 특정 회사의 특정 사업 부문만 정교하게 목표물로 삼기도 합니다.

대기업이 주력 사업이 아니라고 판단한 비핵심 사업부를 분리해서 팔거나, 자회사나 계열사를 사모펀드에 매각하는 거래가 최근 눈에 띄게 늘고 있습니다.

출처 : 삼일회계법인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대표적인 카브 아웃 딜을 정리하면 위와 같습니다.

지난해 12월 태영그룹이 구조조정 차원에서 폐기물 처리 부문 자회사를 사모펀드에 2조 7백억 원에 매각한 사례도 있습니다.

■ 치즈도 아닌데…조각 팔기 왜 늘까

카브 아웃 딜이 글로벌 PE(사모펀드 운용사)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상승세가 두드러집니다.

2022년 6.1%까지 하락했던 PE의 카브 아웃 거래 비중은 지난해 8.3%로 높아졌습니다.

출처 : 자본시장연구원 보고서 ‘최근 국내외 PE의 카브 아웃 M&A 거래 증가와 전망’

일본도 비슷합니다.

자본시장연구원이 낸 '최근 국내외 PE의 카브 아웃 M&A 거래 증가와 전망'이란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일본의 PE 거래 규모가 2023년보다 40.8%나 늘어난 179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이 비결이 바로 카브 아웃 거래입니다.

일본 리서치 기관 AVCJ는 지난해 20억 달러 이상의 모든 카브 아웃 거래가 일본에서 이뤄졌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카브 아웃 거래는 일본에서 왜 늘었을까요.

자본시장연구원은 일본판 '밸류업 정책', 주가 끌어올리기 정책이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일본은 기업지배구조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함께 주주가치 제고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업이 잇따라 사업재편(restructuring)을 위한 비핵심 사업을 매각하는 추세이며, 이는 글로벌 PE의 투자처로 부각되고 있다"
- 자본시장연구원 '최근 국내외 PE의 카브 아웃 M&A 거래 증가와 전망 중

일본 정부는 '잃어버린 20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장기업가치 향상이란 선순환구조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고, 10년여에 걸쳐 기업 가치 재고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도쿄증권거래소가 주도했습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한국의 밸류업은 자사주 취득이나 배당 증대 등에 초점을 맞춥니다. 의미 있는 조치이긴 하지만 단기적이고 일회성이 강합니다.

일본의 밸류업은 더 깊고 길게 봤습니다. 자본수익성을 자본비용보다 더 높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사업 자금을 돈 안 되는 곳에서 빼서, 돈 되는 곳으로 몰아가도록 유도했단 겁니다.

연구개발 투자, 인적자본 투자, 설비 투자, 대기업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같은 근본적 대응이 필요해졌고, 그 과정 중 하나가 카브 아웃 딜이었습니다.

일본 파나소닉홀딩스 홈페이지

파나소닉홀딩스는 지난해 3월 사모펀드 아폴로 글로벌에 자동차 사업부(PAS)를 3110억 엔에 팔았습니다.

소니 뱅크는 지난해 1월 결제서비스사업부를 사모펀드 블랙스톤에 500억 엔을 받고 매각했습니다. 블랙스톤이 핀테크 부문에 투자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두 회사 모두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핵심 사업에 집중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카브 아웃 딜, 한국도 뜰까

밸류업 원조 맛집 일본에서 카브 아웃 딜이 늘고 있다면, 밸류업 추격에 나선 한국도 비슷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본시장연구원도 그렇게 예상합니다.

국내 카브 아웃 딜은 2020년 11건에서 2024년 17건으로 늘었습니다.

증가 폭이 미미해 보일 수 있지만, 2022년에 8건으로 줄었던 점을 감안하면 2년 만에 두 배로 늘었습니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앞으로 더 늘어날 걸로 전망합니다. 여기서 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나옵니다.

"미국의 상호 관세 등 불확실한 대내외 환경을 고려해 당분간 기업은 적극적인 투자보다는 비핵심 자산 매각을 통한 유동성 확보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 자본시장연구원 '최근 국내외 PE의 카브 아웃 M&A 거래 증가와 전망 중

SK, CJ, LG그룹 등이 자회사 매각을 추진 중입니다. '투자 큰 손'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못 찾아 방황 중이기도 합니다.

금리 인하 국면인 점도 카브 아웃 딜 활성화에 호재입니다. 이자가 줄면, 돈 빌려서 회사 사기가 편해집니다.

지난 2023년 말 기준으로 국내 기관 전용 사모펀드의 약정액은 136.4조 원인데, 이 가운데 미집행 약정액이 37.5조 원입니다. 37조 원 넘는 여윳돈이 놀고 있단 뜻입니다.

돈을 잘 굴려 수익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PE 입장에선 놀고 있는 돈으로 대형 투자에 나설 압력이 점점 쌓이고 있습니다. 1조 원을 넘는 카브 아웃 딜 특화 PE 펀드가 결성됐단 소식도 들립니다.

여러 조건이 무르익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한 가지 변수는 있습니다. 바로 홈플러스 사태입니다.

동아시아 최대 사모펀드인 MBK를 둘러싼 여러 논란으로 인해 최근 금융당국과 정치권은 사모펀드 제도 전반을 재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어떤 규제책이 나올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고강도 규제가 나온다면 고개를 들고 있는 카브 아웃 딜도 당장은 주춤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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