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도국제도시 바이오 단지 공사 현장. 사진=인천경제자유구역청
“앞으로 2주 이내에 의약품에 대한 품목별 관세를 발표하겠다.”
전 세계에 ‘공급망 쓰나미’를 일으키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5월 5일(현지 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말했다.
의약품이 미국 정부가 지정한 상호관세 대상에서 빠지자 한숨을 돌리던 바이오 시장은 품목별 관세 발표를 앞두고 다시 긴장하고 있다. 발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국내 바이오 업계도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미국 정부의 관세를 비롯한 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 국내 업체들이 생산 시설을 미국에 구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미국 대비 저렴한 인건비와 생산비용, 수월한 품질관리 여건 등 국내에 생산시설을 운영하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많다. 상호관세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에서 보듯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리스크가 있다. 의약품 리쇼어링(reshoring, 해외 생산시설 국내 이전)이 트럼프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과 충돌하는 측면도 있다.
이에 따라 국내 대형 바이오 기업들은 섣불리 해외투자를 결정하기가 어려운 분위기다. 기본 조 단위의 대규모 생산시설 투자는 수년간의 중장기적 계획에 따라 단행된다. 이 때문에 우선 당장 기존의 중장기 전략을 이어가는 선에서 단기적인 리스크 줄이기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계획된 국내 투자 그대로
미국 현지 기업을 인수한 SK바이오사이언스와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제외한 기업들은 아직 미국 생산시설 구축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하지 않은 상태다.
바이오의약품위탁개발생산(CDMO)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 관계자는 “당장 구체적인 미국 생산시설 구축 계획은 없다”며 “이미 수주한 물량이 충분해 2년여간 미국 관세로 인한 단기적인 영향은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올해 4월 송도국제도시에 5공장을 준공한 뒤 추가 부지 확보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생산능력을 집약해 ‘규모의 경제’와 ‘포트폴리오 다양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새로 입찰에 나선 곳은 송도11공구 산업시설용지(Ki17, Ki18, 1-첨C9블록)로 18만7827㎡ 규모다. 입찰가는 약 2500억원에 매겨졌다. 1캠퍼스와 2캠퍼스에 인접한 이 부지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으로부터 낙찰받는 데 성공한다면 제3캠퍼스가 될 예정이다.
5공장을 시작으로 2캠퍼스 조성을 진행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032년까지 3캠퍼스 조성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3캠퍼스까지 완공되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총 생산능력은 132만 리터(L)를 돌파하게 된다.
국내 CDMO 기업으로서는 유일하게 미국에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는 롯데바이오로직스도 현지 시설 확대 계획에 대해 “확인된 것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2022년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의 뉴욕 시러큐스 공장을 인수한 롯데바이오로직스는 현지에 항체약물접합체(ADC) 생산시설을 증설한 바 있다. 지난해에는 ADC 임상시험용 후보물질 생산계약을 체결해 첫 자체 수주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2030년까지 36만L 생산능력 확보를 목표로 조성 중인 송도의 3개 메가플랜트가 향후 주력 생산시설로 활약할 것으로 기대된다. 롯데바이오로직스 관계자는 “미국 공장은 트랙 레코드 확보 관점에서 인수한 측면이 크며 우선은 조 단위 투자가 계획된 송도 생산시설 조성에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의존도가 높은 SK바이오팜과 최근 짐펜트라(램시마SC의 미국 제품명)의 미국 직판 영업을 본격화한 셀트리온도 미국 관세의 직접적인 사정권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SK바이오팜은 뇌전증 치료제 엑스코프리(성분명 세노바메이트) 생산을 외주로 맡기고 있는데 이미 미국 현지에 원료를 비축한 뒤 FDA 승인을 받은 생산시설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기존에는 원료를 국내에서 생산하고 캐나다에서 패키징까지 마치는 방식으로 미국에 수출했다.
셀트리온도 미국 현지에 15개월치 재고를 마련할 계획이며 우선 원료를 수출한 뒤 현지 CMO를 통해 완제품을 생산할 채비를 마쳤다. 원료의약품(DS) 생산시설 구축에 대해서도 미국 내 48개 장소에 대한 예비검토를 마친 상태다. 하지만 구체적인 입지나 규모에 대해서는 아직 함구하고 있다. 지난해 말 설립한 CDMO 자회사 셀트리온바이오솔루션스의 첫 공장 부지에 대해서도 미국 또는 국내라고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올해 상반기까지 확정하기로 예정됐던 생산시설 구축 계획 발표는 관세 문제가 불거지면서 연말까지로 늦춰졌다.
다만 해외투자와 투트랙으로 송도 2공장 인근과 충남 예산 내포 농생명 융복합산업 클러스터(1단계) 내에 계획된 완제의약품(DP) 공장 조성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셀트리온 관계자는 “해외 생산시설에 대해서는 검토 중일 뿐 구체적으로 발표하기 어렵다”며 “새로 허가 받는 의약품 파이프라인도 늘고 있어 기존에 발표한 국내 생산시설을 계획대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가성비’ 인력, K-바이오 성장에 한몫
이처럼 대형 바이오 기업들이 국내에 대형 생산시설 투자를 집중하는 이유로는 ‘인건비’와 ‘인력의 품질’이 꼽힌다. 미국 대비 인건비가 저렴하고 생산작업의 오류나 불순물 등을 빠르게 포착하는 세밀하고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인력이 많다는 것이다. 서정진 회장은 5월 15일 간담회를 통해 미국 인력의 급여가 국내보다 70%가량 높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미국에 생산시설을 구축하려면 자동화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활약하는 위탁생산(CMO)이나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선 낮은 원가율로 신속하게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할수록 유리하다.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환경이 위탁개발(CDO)이나 위탁임상(CRO)을 진행하기에도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한 관계자는 “국내 연구진이나 생산직들의 세밀함이 남달라 국내에서 바이오 연구나 생산을 하기에 매우 유리하다고 본다”며 “서울 시내에 밀집한 소위 ‘빅5’ 병원에 전국 환자들이 다 모이기 때문에 임상을 하기에도 세계 어느 곳보다 좋은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급성장하는 바이오 산업이 국내 고용에 미치는 긍정적 역할도 점차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기준금리 인상 이후 유동성이 마르면서 바이오 고용난이 심화했다고는 하지만 대기업이 고용하는 바이오 인력의 규모는 확장일로인 생산시설 용량만큼 매년 늘고 있다. 특히 바이오 기업의 인력구조는 다른 산업에 비해 젊은 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정부 차원에서 신성장동력인 바이오산업의 관세 변수에 대응하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대미 의약품 수출액은 39억7000만 달러에 달한다. 2020년 19억 달러에서 4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는 전체 의약품 수출액의 42.8%에 달한다.
보건복지부는 미국 상무부에 “한·미 간 의약품 무역은 상호 신뢰에 기반한 전략적 협력으로 굳건한 한·미 동맹에 기여해왔다”며 “한국의 CDMO 기업이 미국 제약사의 생산 이원화를 지원하며 공급망 안정성과 환자 약가 부담 완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미국 현지에서도 수입 의약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면 약값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제약협회가 컨설팅 기업에 ‘미국 제약산업에 대한 잠재적 관세 영향 평가’를 의뢰하자 미국 정부가 25%의 관세를 부과할 경우 연 508억 달러의 비용이 증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따라서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이 값비싼 오리지널 의약품을 수출하는 글로벌 ‘빅파마’나 처방급여관리업체(PBM) 같은 중간 유통업계를 겨냥한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지금 관세를 매기는 품목이나 관세율 등 사실상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추후 관세 협상을 통해 어떠한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최소 수조원을 들여 5년 이상이 걸리는 현지 생산시설 조성을 단행하는 데 신중할 뿐”이라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는 “정권이 바뀌어도 정도의 차이일 뿐 미국이 리쇼어링 전략을 지속 추진하는 것은 맞을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현지 생산시설 구축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전망했다.